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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56
마태복음 6장 9-13절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다섯 번째 간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입니다.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하라는 것인데,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고서 불쌍한 죄인인 우리의 허물들과 언제나 우리에게 붙어 있는 악들을 우리에게 돌리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은 자가 이런 기도를 할 필요가 있는가?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의인이라고 칭해집니다. 그러나 의인이라고 칭해진다고 해서 전혀 죄를 짓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거룩에 있어 진전을 보인 사람이라도 금생에서는 죄의 잔재가 붙어 있습니다. 요리문답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붙어 있는 악이 항상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함에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죄책과 부패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때 궁극적으로는 죄책과 부패 모두를 해결하는 것이지만, 지상에 있는 신자들은 일차적으로 죄책에서 놓임을 받게 됩니다. 그 말은 우리 안에 부패함이 여전히 있다는 것이고, 부패함으로 인해 자범죄를 짓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죄에 대하여 사해주시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기도의 다섯 번째 간구를 보면 단순히 죄 용서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고 표현함으로 이것이 조건이 되어 죄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것처럼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어떤 조건을 근거로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용서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까지 우리를 대신하여 내놓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고 표현하고 있는가? 요리문답은 이것을 주의 은혜의 증거라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주의 은혜의 증거로서 우리가 우리 이웃을 진심으로 용서하기로 굳게 결심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계속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 대한 내용에서 더욱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은 자의 마땅한 자세는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타나지 않을 때 도리어 책망과 심판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이 마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증표라는 것이고, 이 은혜의 증표를 가진 자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해주신다는 더욱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여섯 번째 간구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입니다. 시험에 들게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은 시험에 들 수 있을 만큼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연약한가? 우리 자신만으로는 한순간도 설수 없을 만큼 연약합니다. 심지어 우리의 철천지 원수 마귀는 우리는 넘어뜨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합니다.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도 하고, 우는 사자 같이 덤벼들기도 합니다. 세상은 어떠합니까? 모든 원리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원리와 하나님의 원리는 늘 충돌합니다. 세상은 결코 하나님을 반기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육신 역시 부패함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법과 싸우게 만듭니다. 즉 우리는 연약할 뿐만 아니라, 마귀와 세상과 우리 자신의 육신이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시기를, 악에서 구해주시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요리문답이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주의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존하시고 강건케 하사 이 영적 전쟁에서 굴복하지 않고 마침내 완전한 승리를 얻기까지 언제나 강건하게 대항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기도의 결말 부분에 이르게 되는데, 요리문답은 128문과 129문으로 이 부분을 설명합니다. 우선 128문입니다.
128문. 그대는 이 기도를 어떻게 결론짓습니까?
답.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로 결론짓는데, 이는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주께 구하는 것은, 주께서 우리의 왕으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지니시고 우리에게 모든 선한 것들을 주실 수 있으며 또한 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이오니(롬10:11-13, 벧후2:9), 우리가 아니라 오직 주의 거룩하신 이름이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시옵소서(시115:1, 요14:13).”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여섯 가지로 간구한 모든 기도의 원인과 이유를 밝히는 내용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에 첫째 간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에 둘째 간구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에 셋째 간구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고 기도할 수 있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에 넷째 간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에 다섯째 간구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에 여섯째 간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겁니다.
여기서 나라란 왕의 임무를 이끌어낸 것입니다. 단순히 영토라는 의미가 아니라, 두 번째 간구의 내용처럼 하나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의 진정한 왕으로서 그 백성의 요구를 들으시고 그들을 보호하고 보존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섯 개의 간구와 함께 나라가 아버지께 있기 때문이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왕이시요, 모든 원수들보다 더 권능이 크시며, 선한 것이나 악한 것이나 모든 것이 주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주의 백성인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친히 우리를 보호하시고 보존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라와 함께 권세를 말하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이상 그에게는 결코 제한된 힘이 아니라 무한한 힘과 능력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세상의 악한 왕들처럼 자신의 권세를 악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늘 선하게 사용하신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섯 개의 간구와 함께 권세가 아버지께 있기 때문이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세로서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고, 거기에는 무한한 선하심이 함께 있기 때문에 선한 역사로서 그의 권세가 나타나기를, 그리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광을 말한 것은 최종적인 목적에서 이끌어 낸 것입니다. 왜 여섯 가지의 간구를 하라고 말씀하시느냐?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왕의 왕으로서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으시되 반드시 선한 역사로서 행하시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요리문답은 이 모든 것을 주께 구하는 것은 우리의 왕으로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지니시고 우리에게 모든 선한 것들을 주실 수 있으며, 또한 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첫 번째 기도부터 여섯 번째 기도까지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 그리고 그분은 이름만 왕으로 계신 분이 아니라 실제로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지니신 분으로 특별히 자기 백성에게 모든 선한 것을 주실 수 있으며, 또한 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들 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마태복음 7장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도 하십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7:7-8)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나 선하신 분으로 선한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9-11) 이때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 좋은 것은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에서는 성령 하나님으로 말씀합니다(눅11:13). 하나님 자신이 가장 좋은 것이요, 그가 주고자 하시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가장 좋은 것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시기 때문에, 자기 백성의 왕으로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요리문답은 우리가 아니라 오직 주의 거룩하신 이름이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한다는 뜻에서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우리가 아니라’고 표현한 부분인데, 굳이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 우리가 아니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성경의 진술이요, 이 진술은 하나님의 영광을 말할 때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단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도 결국 인간에게 그 영광을 일부를 돌리고자 하는 역사가 있었는데, 그만큼 인간은 자기 의가 매우 강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준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도 자체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외적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누가복음 18장에서 자기 의로 똘똘 뭉친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게 되는데, 그는 이렇게 진술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1-12) 얼핏 보면 자기 자랑을 나열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 그리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다. 그런데 이렇게 같지 않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자기 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세는 교회 역사 안에서 얼마나 많이 나타났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역사임을 부인하고 우리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좀 더 부드럽게 하나님의 역사임을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우리가 함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 이런 내용들은 과거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 안에서 말해지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사고방식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 돌릴 때,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은혜라고 말할 때 놓치지 않고 표현하는 것이 있는데, 요리문답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아니라’는 이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3장 4절 이하를 보시면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4-7) 고린도교회 안에는 분쟁이 있었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속했다는 그런 분쟁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사람은, 특별히 말씀을 맡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사도인 나는 심는 자로, 아볼로라는 말씀 사역자는 물을 주는 자로, 그리고 하나님은 자라게 하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을 합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에 그들의 사역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8절을 보면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가치가 없다면 상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치가 있습니다. 일한 것에 대한 상을 약속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심을 수 있는 것, 아볼로가 물을 줄 수 있는 것은 주께서 그들에게 그런 은사를 주셨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심고 물을 주는 모든 것도 사실은 하나님은 은혜의 내용이라는 것이고, 그 결과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일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사역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 일이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이 주셔서 충성한 것이기 때문에 상급을,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공로에 대한 상급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은 은혜의 상급을 사역자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도 보면 똑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나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바리새인의 의라면 여기서 자랑하게 됩니다. 은혜라고 말하면서도 자랑하게 됩니다. 은혜와 함께 자기 의를 말하게 됩니다. 은혜라고 말하기 때문에 자기 의에 대해서는 너무 티 나게 드러내지는 않겠지만, 은밀한 공로주의처럼 드러내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강조를 이렇게 합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여러분,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것은 인간 편에서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고 할 때 구원의 시작처럼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는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에 대한 내용에서처럼 죽어 썩어져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자를 살려 일으키시는 그런 역사일 때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의 시작만이 아니라 구원의 과정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수고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수고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내 노력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과 수고조차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고 할 때 성경은 사람 편에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사실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말하면 반드시 뒤따라와야 할 말이 있는데,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이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인간의 전적 부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면 거기에는 언제든지 인간의 공로가 자리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공로가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은밀한 공로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공로가 있는 그 자리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 말을 부인하는 자리입니다.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은 무엇입니까? 기도와 응답에 있어 내가 기도하기 때문에 응답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경이 그런 면을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마태복음 7장에 있는 내용을 언급했지만 성경은 구하라고 말씀하시고, 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마7:7). 그러나 이것만 말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기도 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또한 로마서 8장 26절에서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연약한가? 부패성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 스스로는 무엇 하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도 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합니다. 그런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계신데,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여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할 때 첫 번째 부분은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두 번째 부분은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분은 그 구원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 감사에서 우리는 우리의 마땅한 의무인 십계명과 주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요, 감사라는 것이고, 또한 순종해야 하지만 순종할 수 없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여 받아야 할 자가 우리라는 것입니다. 즉 기도한다는 것은 내 힘과 능력이 아니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무언의 고백이 거기에 들어 있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주셔서 행한다는 고백까지 거기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공로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만 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피조물 중 어떤 것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 115편입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어찌하여 뭇 나라가 그들의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115:1-3)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분,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요 섭리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분,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을 따라 선하고 공의로운 일만 행하시는 분으로서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 분, 그렇기에 피조물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만,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려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의 마침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멘’이라는 말로 기도를 마치도록 하시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29문입니다.
129문. “아멘”이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답. “아멘”이란 “참으로 진정으로 그렇게 되리라”는 뜻인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소원하여 하나님께 아뢰는 나의 마음의 느낌보다도 더 확실하게 내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사66:24, 고후1:20, 딤후2:13).
즉 우리가 바라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그가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시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기도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속히 이루어주시기를 기도한다는 의미에서 아멘인 것입니다.
아멘과 관련해 고린도후서 1장 20절은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언제나 예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약속을 믿음으로 고백해야 하는데, 그것이 아멘인 것이고, 아멘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전체 내용을 살폈는데,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전체 구조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 두 번째 부분,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세 번째 부분, 그 구원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가? 그런데 왜 이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가? 이것을 알아야지만 우리의 유일한 위로인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로서 살고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사나 죽으나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라,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살고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습니까? 그가 자신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죄값을 다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게 구원해 내셨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더 이상 나는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 머리털 하나도 떨어질 수 없도록, 과연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그렇게 나를 보존시켜 주십니다. 나아가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확신하게 하고, 이제부터는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위하여 살기를 진정으로 바라도록 만드시고, 또한 그렇게 살 준비를 갖추도록 만드시기 때문에 신자라면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게 하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