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화장(自火火葬)
자기가 스스로 화장하다.
곽산선사(霍山禪師)는 위앙종(潙仰宗) 개조(開祖)인 위산영우(潙山靈祐) 선사의 고제(高弟)인 앙산혜적(仰山慧寂)선사의 경통(經通)과 기봉(機)이 뛰어난 제자(弟子)다. 곽산(霍山)에 주석하면서 종풍(宗風)을 선양(宣揚)했다. 곽산선사(霍山禪師)가 백발(白髮)이 성성한 말년(末年)에 어느 날 산 아래 들판에 매일 장작을 손수 짊어지다가 차곡차곡 쌓기 시작하였다. 스님들은 이 노승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장작더미가 어느 정도 높이로 쌓이게 되자, 그동안 절에 시주한 독실한 신도 집을 하나씩 매일 찾아가서 나는 이제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인연(因緣)이 다 해서 좀 쉬려고 하오. 말하였다. 신도들은 큰 선지식(善知識)이 농담(弄談)을, 할 일은 아닐터라 깜짝 놀라 반신반의(半信半疑)하였다. 임종 때가 되는 날 장작더미가 있는 곳으로 가서 엄숙히 가사장삼을 입고 좌정(坐)하고 제자들에게 한낮 정오가 되면 알려 달라고 부탁하고 선정에 들었다. 정오 시간이 되어서 제자들이 정오를 알리자 몸을 일으켜서 장작더미에 사방으로 점화(點火) 불을 붙이고 위로 올라가서 앉은 채로 요지부동(搖之不動)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어 붉은 불길 화염(火焰) 속에 앉은 채로 자화장(自火葬)을 치뤘다. 화염속에 곽산선사(霍山禪師)의 위용(威容)은 손가락 눈썹 하나 흔들림 없이 삽시간에 잔재로 남아 화정열반(火定涅槃)에 들었다는 선화(禪話)다. 마지막 임종까지도 남의 손을 빌려 빚을 지지 않으려는 임종미학(臨終美學)이다.
화옹도 목격한 일화(逸話)는 범어사(梵魚寺)에서 어느 선사님께서 평생을 참선수행만 하다가 말년에 중풍(中風)이 들어서 반신불수(半身不遂)가 되자 매일 식사때마다 대중공양(大衆供養) 처소에 나오지 못하고 행자(行者)가 공양(供養) 수발을 하게 되자, 사는 것이 빚이라고 생각이 들었는지 자신의 몸에 신나 휘발유를 뿌리고 임종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이 이 세상에 왔다가 가는 것은, 필연(必然)이다. 그 필연(必然)의 양상(樣相)은 다양(多樣)하다. 그 다양함을 평가(評價)하는 것은, 의미(意味)가 없다. 그러나 작년에 조계종 총무원장을 두 번씩이나 역임하고 불교계를 쥐락펴락했던 자승(慈乘)스님의, 임종(臨終)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불교 요사채 방화사건이라, 보는, 입장 따라 평가는 다르겠으나 또 지으려면 돈이 엄청들어가는 삼보정재(三寶淨財)를 불태우고 방화(放火)로 간 입적(入寂)이라, 빚을 진 임종작태(臨終作態)라고 본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가야 할 명분도 이유도 없는 의문투성이 임종이라 말들이 많다. 수행자의 마지막 임종(臨終)은 세상 사람들이 보고 본받아야 할 열반미학(涅槃美學)이어야 한다. 옛 선사나 조사님들은 수행자답게 여법하게 사시다가 가셨다. 화옹이 임종열반(臨終涅槃) 미학(美學)을 이렇게 페이스북에 공유한 뜻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