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코스 : 오정대 공원 - > 소사역
그동안 함께 경기 둘레길을 종주하던 박찬일 사장님께서 고엽제 후유증으로 인한 고환 부위에 림푸종 암이란 병명을 진단받았다. 단독으로 코리아 둘레길을 완주하는 꿋꿋한 의지를 보여 주었고 경기 둘레길을 종주하면서도 강인한 체력을 보여 주었기에 암이란 병명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그러나 눈앞에 닥친 현실에 그저 슬픈 눈물만을 흘릴 수 없고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을 모르는 굳센 인간답게 이번의 림프종 이란 암도 반드시 이겨내 잠시 중단하고 있는 경기 둘레길을 시작도 함께 하였으니 완주도 함께 할 수 있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하였다.
걸으면 살고 누우면 죽는다는 어떤이의 말처럼 하루빨리 병마를 박차고 발목이 시리도록 우리 땅을 걷어갈 수가 있기를 희망하면서 현재의 몸 상태에 대한 안부를 묻는데 박 사장님이 경기 둘레길 종주는 멈출 수 없다고 하시면서 오늘 오후에 경기 둘레길 55코스를 종주하시겠다고 하여 따라나섰다.
우리 땅 걷기는 흥이 나면 걷는 것이다. 물론 경기 둘레길처럼 장거리 도보 여행길은 계획을 세워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걷고 싶을 때 걸으면 그 걸음은 흥이 나지 않겠는가?
박 사장님과는 같은 동네에 사는 관계로 10시가 조금 지나 통화하고 11시 10분에 발산 중학교에서 서로 만나 박 사장님이 직접운전을 하고 부천 오정대 공원으로 향했다.
오정대 공원에 이르니 정오가 조금 지나서 준비해 온 점심을 먹었다. 박 사장님은 식사 전 당체크를 한바 혈당이 220이 나오니 싸가지온 밥은 먹지 않고 반찬만을 먹고 걷기에 나섰다.
오늘의 출발지는 오정대 공원이다. 이곳은 55코스의 날머리이자 56코스의 들머리 인지라 56코스를 걸어가는 것이 순방향으로 종주하는 것이 되지만 오늘은 55코스 시작점인 소사역까지 걸어가는 역 종주를 하기로 하였다.
오정대 공원을 알리는 커다란 표지석에 세워져 있는 곳이 오늘의 출발지이다. 길 건너 서래옥 설렁탕이란 식당을 지나 도로를 따라 걸어간다. 부천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도로를 걸어가 원일 초교 삼거리를 지나고 성진 그린 마을버스 정류장을 지나니 다소 교통량이 줄어들었다.
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이곳은 원종동이었는데 전봇대에 ‘황금 들판 길’을 알리는 표지기가 부착되어 있다. 개발된 도시의 거리에서 황금 들판을 실감할 수 없었지만. 수주 어린이 공원에서 고리울천과 오쇠천을 지나며 어렴풋이 들판 길이 연상된다.
수주 초중고를 지나 변영로 선생 기념비가 세워진 지점에 이르렀다. ‘술’하면 수주를 뛰어넘을 자가 없고 ‘담배’라 하면 공초를 뛰어넘을 자가 없다고 하던 수주가 바로 변영로 선생의 호이다.
그래서일까? 이곳의 도로는 수주로이고, 학교의 명칭은 수주 초등학교, 수주 중학교, 수주 고등학교인 것을 보면 이 고장 사람들이 얼마나 수주 선생을 흠모하고 있는지 알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수주 변영로 선생은 그가 지은 논개란 시를 통해 그의 이름을 처음으로 알았는데 그가 바로 이 고장에서 태어나신 것이다. 그의 기념비를 보니 잊힌 논개란 시가 떠 오른다.
논개 – 변영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이제 자동차 도로에서 산길로 걸어간다. 산길은 아늑하다. 아침에 황사로 인해 뿌옇던 흐린 날씨도 어느 정도 걷히어 마스크를 벗을 수가 있었고 파릇파릇 돋아나는 나뭇잎은 생기발랄하였다. 동네의 뒷동산의 완만한 산길을 걸어가니 흥이 절로 인다. 동네의 야산은 높지 않고 오르기 쉽고 완만한 오르막이 되어 걸어가기 좋다. 그래서인지 산책로에서 사람들을 끊이지 않고 만날 수 있었다.
산길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 고리울 가로 공원을 지나며 다시 또 도로를 걸어간다. 대로 아닌 골목길 같은 소로를 걸어가면서 ‘군자는 대로행’이라 하였는데 라고 불평을 터트릴 때 고강선사 유적 공원을 알린다.
변영로 선생을 기리며 그의 뜻을 계승하고자 하는 수주 문학관이 있었고 언덕 변에는 철쭉이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다. 내 몸에 붉은 피가 돌고 있기 때문일까? 붉은빛이 아름다웠다.
이곳에서 경기 둘레길은 한강 유역 초기 국가단계의 문화 유적을 볼 수 있다는 고강 선사 유적 공원으로 가지 않고 구름다리를 건너 능고개로 향한다. 계단을 타고 산마루에 이르니 조망도가 설치되어 있다.
짙은 황사로 인하여 눈앞의 계양산도 보일 듯 말 듯 하니 인근의 덕양산과 북한산은 볼래야 볼 수 없었다. 고강 선사 유적 공원을 지나며 도로를 걷지 않고 산길을 걸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조망까지 욕심을 내고 있으니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다는 말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일임을 알겠다.
선사시대 제사 유적인 적석환 유구 발굴터를 지나면서 철쪽의 붉은빛에 취한 내 마음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나뭇잎에서 다시 파란 물로 물들여진다. 계속되는 산길을 걷는 데에서 흥겨워하는데
박 사장님은 병마와 싸우며 오르고 내려가는 길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워할까! 하지만 함이 든다는 내색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걸을 수 있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다.
지양산 고스락에 올랐다. 사각 정자가 놓여 있고 넓은 공터가 되어 쉬어가기 좋은 곳이었다. 엉덩이를 땅바닥에 붙이고 산빛을 감상하기에는 가는 길이 멀어 걸으면서 봄동산의 따사로운 기운을 맞이하여야 했기에 쉬지 않고 걸어간다.
산 사람이 된 것일까? 산길을 걸을 때면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흥분에 젖을까? 선뜻선뜻 불어오는 바람, 파릇파릇한 나무 잎새, 저 홀로 피어난 봄꽃, 풀벌레 소리 등 나무와 숲 등의 향연에 어느 사람의 마음이 창공에 날지 않을 수 있을까?
능고개에 이르니 봄꽃이 만개하여 꽃동산을 이루어 그 아름다움에 취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면서도 다정하게 그 이름 한번 불러주지 못하는 그 어리석음을 어디에 탓하랴!
능고개는 “ 조선지지자료에는 작동에 속하는 우리말로 ‘능고개’이고 한자표기로는 ‘능현陵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능 너머 고개는 조선 시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 전에는 능고개라고 하였을 것이고 능고개는 ’는고개‘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늘어진 고개라는 뜻이다.
봉배산이 이어진 범바위산이 동쪽으로 쭉늘어져 있는 곳에 있는 고개라는 이야기이다. 부천이 개발되기전에는 서울로 가는 주요 통로였다고 한다. ”<표지판에서 퍼옴>
아름다운 우리말로 불렸던 이름이 한자로 표기되면서 그 아름다움 속에 담긴 본래의 뜻이 왜곡되어 그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고개로 전락한 슬픈 사연을 안고 있는 능고개를 위로하며 절골에 이르렀다.
절골은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는데 절에 빈대가 너무 많아서 중이 절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이야기가 ’절골‘의 이름의 유래이다. ‘절골‘의 원래 어원은 ’잘골‘ 이며 이름의 유래는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유학자들이 불교를 폄시 하였고 빈대로 비유되는 유학자들이 증가하면서 중이 도망하자 사찰이 멸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빈대 때문에 절이 망했다고 하여 빈대터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곳곳에 있는 빈대터는 절이 번성하다가 없어진 곳이다.“<표지판에서>
완만한 능선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정상을 알리는 표지판도 세워놓지 않은 와룡산을 넘어 진행할 때 다소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니 봉배산이었다. 이곳 또한 정상을 알리는 표지판이 없고 산불감시 초소만이 세워져 있을 뿐이다.
지양산, 와룡산, 봉배산을 넘어 하산할 때 다소 멀리 불쑥 솟은 산봉우리가 보인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 속담처럼 비록 완만한 오르막길을 오르고 내리지만 세 개의 산을 넘어 다소 지쳤는지 박 사장님은 우리가 저 산을 넘는 불행한 일은 없겠지요 라고 웃음을 지어 보인다.
가는 방향이 다른 것 같아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맞장구를 치고 봉배산을 하산하였더니 경기 둘레길은 도로를 따라 그 산의 입구로 진행하여 그 불행(?)한 일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물을 만나면 건너고 산봉우리를 만나면 넘는 것이 도보 여행가의 피할 수 없는 사명이거늘 무엇이 불행한 일이 되랴! 멀리서 바라볼 때는 은근히 넘어가지 않기를 바랐지만, 눈앞에 닥쳐서는 언제 그랬냐는 것이 산꾼의 근성이다.
칠일 약수터에 이르니 부적합이라는 빨간 딱지를 부착하여 음용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 악수터가 성곡동, 원종동, 오정동과 동부간선수로를 관통하여 굴포천에 합류하여 한강으로 유입되는 베르네천의 발원지였다.
다소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니 체육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많은 사람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원미산이었다. 고스락에는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팔각정이 세워져 있었는데 황사의 흐린 날씨로 인하여 조망은 불가하였지만,
눈앞의 소래산은 정삼각형 모양으로 뾰족하게 솟아있는 형상에서 시흥 늠내길을 걸으면서 땀을 흘리며 올랐던 그때가 되살아났다.
” 원미산은 멀미산으로 멀미의 ’멀‘은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머리는 “꼭대기 마루’를 뜻하며 ‘크다. 신성하다. 존엄하다’의 뜻도 가지고 있다. ”미‘는 산의 고유어로 “미, 메, 뫼’등이 쓰였다. 그러므로 멀미산은 아주 ‘신성한 큰 산’이라는 뜻이다. 이는 역전앞처럼 동의어 반복으로 별다른 의마가 없다. 원미산은 조선 후기 이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표지판에서 퍼옴)
원미산은 진달래 축제로 유명하여 봄이 되면 상춘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애석하게도 한 달 늦게 찾아 왔기에 그 수줍음의 대명사 진달래의 화사함을 볼 수 없었다.
원미산의 하산 등산로는 생각보다 길게 뻗어있어 그 이름이 지닌 의미를 실감하게 하였으니 그 누구도 200m도 되지 않는 작은 산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곳곳에 놓여 있는 체육시설에서 시민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부천 시민의 휴식 공원을 느끼며 하산하여 잠시 도로를 따라 걷다가 소사역에 이르렀다. 비록 13km가 되지 않는 짧은 거리였지만 지양산. 와룡산, 봉배산, 원미산을 넘는 고행을 즐겁게 넘어 왔으니 박 사장님의 병마는 두 손 들고 물러갈 것을 굳게 믿는다.
● 일 시 : 2023년 4월12일 수요일 흐림(황사)
● 동 행 : 박찬일 사장님.
● 동 선
- 12시40분 : 오정대 공원 표지석
- 13시35분 : 변영로 선생 기념비
- 14시15분 : 고강 선사 유적지 입구
- 14시50분 : 지양산
- 15시35분 : 능고개
- 15시45분 ; 절골
- 16시15분 : 와룡산
- 16시45분 : 봉배산
- 17시10분 : 베르네천 발원지
- 17시30분 : 원미산
- 18시21분 : 소사역
● 거리 및 소요시간
◆ 거리 : 12.9km
◆ 시간 : 5시간 41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