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 다음 날이면 마당으로 나가 잡초를 뽑는다. 질펀한 땅을 밟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으나 촉촉하고 말랑해진 흙은 풀을 뽑기에 제격이라,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장화와 호미를 꺼내 들고 마당으로 향한다. 전쟁에 나서는 군인이라도 된 듯 잡초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리라 다짐하며 호기롭게 씩씩한 발걸음을 옮긴다.
잡초에도 종류가 있는데, 그중 민들레는 양반에 속한다. 뿌리가 굵고 깊은 것은 힘을 좀 주어야 하지만, 땅만 촉촉하다면 통째로 쑤욱 뽑혀 나오기에 뽑는 맛이 있다. 남는 것도 없어 개운한 느낌이다. 민들레는 약초로도 쓰인다고 하니, 자리를 잘못 잡은 죄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하는 것이 미안한 마음도 든다.
문제는 토끼풀이다. 뿌리가 깊지는 않지만, 양옆으로 뻗어나가며 잔디를 휘감아, 뽑으려 치면 잔디까지 같이 뜯겨버리기 일쑤다. 마치 물귀신처럼 혼자 떨어지는 법이 없다. 게다가 약한 뿌리는 힘을 주면 뽑히기보다는 중간에서 뜯겨 나가서 찜찜하기까지 하다. 퍼지기는 어찌나 빨리 퍼지는지, 아무리 애를 써도 토끼풀 앞에서는 번번이 패잔병이 되어버린다.
토끼풀과의 사투를 포기하고 해가 지기 전에 텃밭으로 자리를 옮긴다. 텃밭에도 바람에 날아든 잡초들이 듬성듬성 자라 있는데, 개중에는 버팔로 잔디도 눈에 띈다. 토끼풀의 감아내기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쏙쏙 뽑히던 잔디가 막상 홀로 있으니 어찌나 단단한지 난이도가 최상급이다. 마당의 주인이던 잔디가 텃밭에선 마땅히 뽑혀야 할 불청객이라니. 엉뚱한 곳에 자리 잡아 제 대접을 못 받는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잔디를 뽑고 있자니, 아이러니하다. 잔디밭의 토끼풀과 민들레가 떠오른다.
책을 읽다 ‘민들레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는 법칙. 약초 채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다.”* 잡초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은 본질이 아닌 관점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어떤 존재로 인식되는가의 문제.
언젠가 내가 잡초는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언어도 문화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꿋꿋하게 등교해 홀로 밥을 먹으며 이곳이 내 자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던 시절. 불안함을 애써 숨겨 당당한 척 행동하고 집에 와서 침대 위에 지쳐 쓰러지던 시절의 나는 내가 잔디밭의 민들레인 줄 알았다.
시간이 흘러 주위를 둘러보니 넓은 들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나는 들판의 민들레였다. 가꿔진 정원의 잡초가 아닌, 야생의 민들레는 존재하는 곳에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제 자리를 찾는 것. 그것은 들꽃이 장미가 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위로이자 다양성이 필요한 곳에서 빛을 발하는 유일한 길이다. 나는 지금 제 자리에 있는가?
열심히 잡초와의 전투를 벌인 다음 주, 옆집 마당을 관리하러 오는 정원사가 우리 마당에도 토끼풀 약을 한껏 쳐 놓고 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맙소사. 내가 몇 시간에 걸쳐 사투를 벌이던 토끼풀이 며칠 사이에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심지어 잔디는 그대로이다. 패잔병의 결정적 실수는 잘못된 무기 선택이었다. 노동과 맞바꾼 치열한 사투는 잡초엔 제초제가 최고라는 깨달음을 안겨주며 막을 내렸지만, 비가 온 다음 날이면 종종 길 잃은 민들레를 찾아 마당으로 향한다.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박새미 / 2020 창작산맥 수필 부분 신인상 등단, 2023 시드니 문학상 수필 부분 당선.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