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다. 대전파와 포항파의 분열은 과거 대한기독교회의 분립 사건을 회상하도록 만들었다. 대한기독교회의 분립 사건은 우리 교단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분규로,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한국 침례교의 정체성과 관련되어 발생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 의미가 컸다.
그런데 1951년 미국 남침례교단과 제휴하여 세계 속의 침례교회로 발돋음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우리 교단이 또다시 분열을 맞이한 것이다. 우리는 과거 대한기독교회의 분립 사건을 지켜보면서 배워야 할 역사적인 교훈을 소홀히 했다. 분열의 일차적인 책임은, 비록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 믿었더라도, 분열이라는 극단의 처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는 교단 총회 안에서 민주적인 방법으로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인내와 성숙함을 배워야 한다. 물론 역사 앞에서 좀 더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분열해 나간 쪽이나 분열해 나가도록 내몰고 방치한 쪽이나 다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점도 아울러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분열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교단이 분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분열은 주님과 교회 앞에 백해무익한 일이었다. 그러나 원하든 원치 않든 환경의 지배로 분열은 불가피하게 초래되었다. 나는 태도를 결정지어야했다. 기도중에,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약 4:1)는 말씀이 떠올랐다. 이 말씀을 토대로 싸움에 가담하지 않기로 했다. 결코 그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으려 했다. 비록 소극적인 태도였지만, 당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주변의 친구들에게 선언한 뒤 두문불출하고 목회에만 전념했다.
어느 날 대전총회 측 목사가 선교사를 대동하고 우리 교회를 방문했다. 그때는 교단 분열이 각 지방 교회들에까지 파급된 상태였고, 문교부가 중간에서 평화적으로 재산을 분립하도록 종용함으로써 양측은 이에 합의했고, 대전파에서는 각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교회를 규합하는 중이었다. 이미 나의 장인인 곽효정 목사는 대전파에 속해 있었다. 남들은 나도 대전파에 속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내가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말을 듣고 설득하러 온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대전파에 속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선교부도 이제부터는 대전총회만을 도와주기로 결정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때까지 선교부의 도움을 받고 있었던 나에게 그 소식은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조용히 지내고자 했지만 주위 환경이 나를 그대로 두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졸지에 결정을 내려 답변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달라 요청하고 결정해서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한 달 뒤에 다시 오겠다고 하면서 떠났다. 실상은 우리 교단의 전국 교회는 거의 다 선교부로부터 전도비 보조금을 받고 있었다. 16개 지방회의 223교회 가운데 완전히 자립한 교회는 서울교회를 위시하여 부산, 점촌, 광천(廣川), 행곡, 광천(光川) 교회 등이었다. 그 외 218개(경기 16, 충서 16, 충남 10, 천안 11, 전북 23, 강호 17, 대전 18, 충북 8, 경남 16, 경중 10, 경북 9, 경서 12, 울도 17, 영서 12, 영동 10, 경동 13)는 보조금을 받고 있었다. 보조금은 등급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순 개척교회는 평균 37,500원, 준 개척교회는 22,000원, 미자립교회는 13,500-15,000원, 기성교회는 7,000-10,000원 정도였다. 이상의 보조금은 교역자의 생활비로 쓰였는데, 나는 13,500원을 받았다.
나는 한 달 안에 어떤 결정이든 해야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기도하며 지혜를 구했다. 여러 날 기도하는 가운데, 마치 나침반이 한 곳만을 가리키듯이 결론은 합법적인 총회로 귀착되었다. 그러나 보조금에 의존하여 생활하는 터라 그것이 중단되면 당장 생활이 막연하고 어려울 것이 뻔했다. 마음이 약간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루는 아내에게 급변하는 총회 사정을 이야기하고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었다. 아내는 기도하는 목사가 결정해야 할 문제가 아니냐고 오히려 반문했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이유 없이 따를 것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느냐고 다시 물었다. 아내는 그렇다고 답했다.
한 달 뒤에 그들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나는 포항총회에서 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들은 섭섭한 마음으로 돌아서면서 혹시 생각이 바뀌면 연락해 달라고 하면서 떠났다. 그 뒤 나는 지방회 모임에 참석하여 이제부터는 중립으로 있을 수 없고, 어느 한 편에 속해야 하므로 나는 포항총회로 정했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곳에 모였던 교역자들은 단합하여 결속을 다졌다.
선교부의 보조금은 예상외로 빨리 중단되었다. 몇 주일이 지나자, 여기저기에서 교역자들이 견딜 수 없어 대전파로 간다며 미안해했다. 과연 돈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 새삼 느꼈다. 계속해서 교회들이 대전파로 이동했다. 졸지에 포항파 교역자들은 생활비가 끊어져 생활고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지켜보던 교계에서는 소위 선교부에서 어떻게 이런 기아정책을 쓸 수 있느냐며 여론이 좋지 않았다. 그야말로 포항총회 측에 속한 교역자들은 경제적으로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극심한 곤궁에 처했다. 하루에 제때 식사를 못하는 것은 다반사였다. 가장 마음이 괴로운 것은 젖을 갓 뗀 자식에게 먹일 것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아이가 밤중에 일어나 배고프다고 보채면 물 한 대접을 마시게 했고, 그 아이는 그것을 다 비웠다. 거기다 땔감나무를 구입하기도 어려웠다. 그때는 장작과 낙엽 등을 땔감으로 사용했는데, 값이 싼 왕겨를 정미소에서 구입하여 풍로로 밥을 지었다. 특히 겨울에는 물이 얼 정도의 추운 방에서 지내려니 무척 고생스러웠다.
한 번은 하늘과 땅이 빙 돌면서 쓰러졌는데, 벽에 이마를 부딪쳐 피를 흘렸다. 의사는 영양실조라 진단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때로는 캄캄하고 절망이 될 때도 있지만, 세인(世人)처럼 남을 원망 또는 불평불만하기 전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길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주의 사역을 하다가 역경에 부딪히더라도, 인내력을 가지고 극복해 나간다면 주님으로부터 반드시 위로와 축복이 있으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때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불평이나 불만을 토로하지 않으리라는 각오를 다시금 했다.
분열 이후 각 지방과 교회마다 물질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당했다. 강릉에서 한 선교사가 자기에게 오면 생활고에 시달리는 교역자들에게 생활비 보조와 도서비, 교통비 등을 지급해주겠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 바람에 울진구역의 일부 교역자들이 강릉으로 찾아가다가 차가 전복되는 바람에 여러 명의 교역자가 중경상을 입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김강률 전도사는 한쪽 귀가 잘려 나가는 불상사를 당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이 일로 많은 것을 깨달았다. 우리 주님께서도 일정한 집도 없으시며 종일 일하시고 피곤한 몸으로 밤에 산으로 올라가셨던 것이 아닌가. 세상에서 그처럼 가난하게 사신 주님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고생스러운 것은 사실이나 비참한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는 내게 이만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여겨서 허락하신 것이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보살피고 위로해 주셨다. 한편으로 손해를 보는 것 같으나 다른 면으로 보면 현저하게 우리를 축복하셨다. 그러므로 역경에서도 우리는 주님께 감사할 수 있다.
장인 곽효정 목사는 해방 후 장로교단에서 침례교로 넘어온 소위 “유월파” 목사에 해당되는데,
그는 대전파에 속했고, 나는 포항파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