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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오감을 열기 전에 먼저 행복하라>의 줄거리:
지금의 아테네인 아덴이라는 도시에서 사도바울이 전도하십니다. 아덴이라는 도시의 특성은 한 마디로 행복으로의 길을 주도적으로 찾는 사람들의 도시라는 점입니다. 소위 철학자들의 도시입니다. 일반인들은 오감으로 들어오는 세상에 끌려다니면서 행복을 욕망한다면 철학자들은 주도적으로 행복의 길을 찾습니다. 그러나 답을 모른 채.
오감을 열기 전에 먼저 행복하라
(사도행전 17:16~21)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 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오감을 열기 전에 먼저 행복하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오감을 열기 전에 먼저 행복하라’
지난 시간까지 사도 바울과 일행이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한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혼자 아덴 즉 지금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 와서 전도 활동을 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테네는 십자가 복음과의 연관성에서 볼 때 사도 바울에게 굉장히 큰 이슈를 제공한 곳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도 아테네라는 도시의 특성과 십자가 복음과의 관계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아시는 대로 아테네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계 3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3만이나 되는 신들의 이름이 거명되는 도시였으며 신전이나 사원 등의 건축물들이 즐비한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문학 철학 과학 수사학 등이 꽃을 피운 헬라문명의 눈이라 불릴 정도로 학문과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서양문명의 발상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이기도 하며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유명한 철학의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활동무대이기도 합니다. 이들과 사도 바울이 대체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본문에서는 대화를 나눴다는 암시만 있을 뿐이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대화를 했는지는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염두에 두고 복음을 생활화해야 되는 입장에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덴이라는 도시의 특성을 한마디로 하자면 주도성이었습니다. 아덴의 사람들은 행복에 이르는 길을 주도적으로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덴을 지배하는 철학의 핵심 주제는 행복이었습니다.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는 상반되는 의견을 갖고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붙잡고 있었던 주제는 행복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행복이다.”라는 말을 했듯이 당시 세상의 지혜자라는 사람들이 아덴에 모여 추구하고 쟁론했던 주제는 바로 “인간이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겠느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를 내려 보고자 합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생활 속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한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구조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마음의 채워짐이 지속되는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채워진 상태가 만족이라면 바로 이 만족이 지속되는 상태가 행복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아덴의 철학자들의 목적은 행복의 길을 찾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철학의 도시 아덴에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한 무리의 철학자들과 사도 바울이 대화하게 되고 논쟁을 벌이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자 했다면, 논쟁을 벌이던 철학자들은 주도적으로 행복의 길을 찾으려고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오감(五感)을 열고 세상을 마주하고자 합니다. 그 결과 오감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세상이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상태에서 행복하기를 욕망합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기본적 상태입니다. 여기서 철학자들은 오감을 통하여 쏟아져 들어오는 세상이 마음을 지배하는 상황을 좌시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세상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대답을 내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오감이 열려있는 한 세상은 계속해서 마음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으로 느끼는 세상은 계속해서 마음에 들어오게 되고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마음이 세상에 지배당하는 상태에서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마음이 지배당하는 동안에는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에 지배를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끌려가는 대신 주도적으로 세상과의 만남을 조절함으로써 끌려다닐 때는 절대로 주어질 수 없었던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해지는 것은 주도성입니다. 세상과의 만남이 어쩔 수 없다면 세상과의 만남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덴의 철학자들이 가진 사상의 기본 바탕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과 쟁론했던 사람들 중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상태를 아타락시아(ἀταραξίᾱ)로 표현했습니다. 아타락시아는 없다는 뜻의 접두어 아(ἀ)와 분쟁, 갈등, 방해를 뜻하는 타라소(ταράσσω)의 합성어입니다. 즉, 에피쿠로스학파가 주장했던 행복이란 내적 갈등이 없는 상태로서 마음에 혼란과 고통과 근심 걱정 등이 없는 평정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에피쿠로스학파의 주장은 우리가 계속해서 이야기해온 내용들과 닮았습니다.
에피쿠로스학파에 따르자면 사람은 자연적으로 오감을 통해 만나는 세상에 대해서 좋고 나쁨을 판단하게 된다고 합니다. 좋고 나쁨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계속 불만족하다는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의도치 않게 이미 좋은 것들을 갖고 있지 않아서 화가 나고, 나쁘다고 믿어지는 것들을 갖고 있기에 고통을 받습니다. 즉, 사람은 좋다고 믿는 것을 추구하게 되고 얻으면 기뻐합니다. 그리고 얻고 나서는 잃을까봐 걱정하면서 괴로워한다는 것입니다.
에피쿠로스학파가 아타락시아라는 최고의 행복상태, 즉 평정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취한 방법은 바로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을 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병에 걸리는 것을 싫어합니다. 여기서 에피쿠로스학파는 “병에 걸리는 것이 왜 나쁜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병이 나쁘다는 판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또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학파는 “돈이 많이 벌리는 것이 왜 좋은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비싼 집과 비싼 차를 살 수 있으니 좋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학파는 애초에 비싼 집과 비싼 차가 왜 좋은지에 대해서 다시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들은 이처럼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오감을 통해 만나게 되는 세상에 대한 좋고 나쁨의 판단을 버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내적인 평정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아타락시아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한편 스토아학파는 행복의 상태를 아파테이아(ἀπάθεια)로 규정했습니다. 아파테이아는 없다는 뜻의 접두어 아(ἀ)와 열정, 정열, 충동, 욕망을 뜻하는 파토스(πάθος)의 합성어입니다. 마음이 감정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상태를 행복이라 규정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금욕주의를 내세우며 열정과 정열과 충동과 욕망에 의해 지배되는 삶을 종식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오직 이성에 의한 삶을 살 때만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사도 바울과 쟁론을 벌이게 되는데 이들이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부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부활은 죽은 뒤에 가는 또 다른 세상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아덴의 철학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세상에서의 행복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세상 바깥에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사도 바울이 전하는 부활은 무척 이상하고 낯선 개념이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라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 행복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덴의 철학자들은 오감을 열고 있는 상태에서는 마음에 세상이 물밀듯 쇄도해 들어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 행복을 찾고자 하였고 그 해답으로 제시한 것이 아타락시아나 아파테이아였습니다. 인간이 죽는다면 오감도 사라져버리기에 세상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의 상태에서는 애초에 행복이라는 개념을 논할 수 없다고 여겼기에 사도 바울이 말하는 부활이라는 개념 또한 혼란스러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부활에는 아덴의 철학자들이 결코 알 수 없었던 비밀이 하나 있었습니다. 육체의 오감을 열고 나면 세상이 물밀듯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덴의 철학자들이 오감을 통해 세상이 들어오는 것을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보았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바울은 일단 오감을 통해 세상이 마음에 들어오게 된 후에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행복은 주어질 수 없음을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행복이란 이 세상에서 어떠한 행동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기준이나 원칙을 세우고 따름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무엇을 가질 때에 주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피쿠로스학파나 스토아학파는 물론이고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도 알 수 없었던 비밀이었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행동을 통하여 행복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후에야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고 올바른 소유 활동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사람은 행동을 통하여 행복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원칙을 수행함으로써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행복하고서야 올바른 행동이 나타날 수 있고 원칙이나 규정도 지켜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삶은 이미 행복한 사람의 행복 발산의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어떤 조건을 지키거나 행동을 통해서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행복한 가운데 오감을 열고 세상을 만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행복을 발산하는 과정으로써 말과 행동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에 담겨있는 행복에 관한 진리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행복한 사람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세상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눈을 닫아 보이지 않고 귀를 닫아 들리지 않고 코를 닫아 냄새를 맡지 않고 입을 닫아 맛보지 않고 촉감을 닫아 느끼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오감이 닫혀 있는 상태이지만 마음은 비어있기에 채워지기를 바라고 욕망합니다. 이때 부활이라는 지점에서 세상 밖에 있는 다른 세계가 열립니다. 이 과정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담겨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늘로 올라가면 하늘에서 하나님을 마주 대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마주 대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유일한 참 행복의 상황입니다. 이러한 참 행복을 얻은 상태에서만 비로소 오감을 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삶은 행복을 발산하는 과정이 됩니다. 이것이 본래 인간의 모습입니다. 찾을 수 없는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계시받지 못한 아덴의 어떤 철학자들도 이 진리에는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아덴의 철학자들뿐만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세상이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3만이 넘는 신을 거명할지라도 그 신들 또한 세상 속에 있는 신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행복을 찾아도 이 세상 안에서 찾고자 하였습니다. 오감을 통해 만나는 세상 속에서만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행복은 세상 밖에 계시는 하나님과의 대면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기에 이들에게는 행복이라는 답안이 주어질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의 철학자와 사상가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전했습니다. 이 복음에는 오감으로 접하는 세상에서는 절대로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결혼을 통하여 행복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본래 결혼과 행복은 무관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보고 아내가 남편을 보는 중에 행복할 길은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낳아 잘 키워서 행복하고자 하지만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오감을 통해 자녀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상태에서는 자녀와의 관계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감으로 돈과 관계된 일들을 받아들이는 동안에 돈과의 관계에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건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의 상태가 오감을 통하여 마음으로 쇄도해 들어오는 중에는 육체와의 관계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배우자와 행복해지고 싶다면 배우자에 대해 오감을 닫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오감이 닫히는 죽음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부활한 마음으로 전혀 다른 세계인 하늘나라로 예수님을 따라가야만 합니다. 마음이 하늘나라로 가면 하나님으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행복해진 뒤에 오감의 문을 열면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행복을 발산하게 됩니다. 이것이 부부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아덴은 철학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의 길을 주도적으로 찾는 철학자들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부부간에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오감을 통해 배우자가 마음에 들어오게 된 이후에 행복해질 방법을 찾고 있었기에 애초에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행복이란 마음의 채워짐이 지속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본래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지음 받았기에 하나님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는 하늘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오감을 통해 쇄도해 들어오는 상태에서 마음은 하늘로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여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오감을 닫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행복은 발산하는 것이지 세상에서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하나님보다 마음에 와닿는 상태에서는 행복은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은 좋고 나쁨을 따라 판단하고 좋은 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조금 이루어지면 행복하다고 느끼지만 금세 다시 불안에 휩싸이고 조급함과 긴장과 걱정을 하며 살아갑니다. 가짜 행복이기에 지속될 수 없습니다. 오감을 열어둔 상태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세상과의 관계에서는 결코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감이 닫힌 상태에서 행복을 찾은 뒤에 오감을 열고 행복을 발산하며 살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발산할 수 없는 행복한 인생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고 하였습니다. 뛰어난 철학자이자 사상가들을 보유하고 있었던 아덴 사람들이 새로운 것에 그토록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의 울타리에 갇힌 상태에서는 그 어떤 그럴듯한 사상이나 말을 따르더라도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에 이르는 답이 없기에 계속해서 새로운 답을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복음 속의 새로움이란 무엇일까요?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오감을 닫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빠져나옵니다. 그럴 때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 다른 세계인 천국에 이르러 하나님을 마주 대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복음 속의 새로움이란 하나님 한분과의 관계에서 끝없이 새로움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깊이의 행복을 느끼고, 새로운 깊이의 기쁨과 즐거움을 끊임없이 발견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가 우리에게 주는 효과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십자가 생활화에 어려움을 느끼고 중단하는 이유는 오감을 열어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감을 통해 세상이 쇄도해 오는 상태에서 십자가 생활화를 하려고 하니 그 효과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행복하지 못하다면 세상에 눈을 떠서는 안 됩니다. 행복하지 못하다면 귀를 열어도 안 되고, 먹으면서 행복하려고 해서도 안 되기에 먹지도 말고, 냄새도 맡지 말고, 촉감으로 느끼고자 해서도 안 됩니다. 오감으로 느끼는 것으로 행복하려는 삶은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오감을 닫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자녀들이 말썽이라면 자녀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는 것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듣는 것에 대해서도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냄새도 맛도 촉감도 십자가로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채움을 위해 움직일 수 있는 길은 외통수가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 부활의 자리에 이르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외통수 길이 되기 위해 오감을 닫는 것입니다. 오감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열려있어서 마음이 닿고 반응하게 된다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기에 행복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 이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덴 사람들은 끝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는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과정에 대해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 내용은 어느 곳보다 행복에 관심이 많았던 아덴 사람들이 정작 행복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오감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중에 행복하고자 했던 그 어떤 철학자도 답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려고 했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알려지지 않고 깨달아지지 않는 한 행복은 말뿐입니다. 십자가로 오감을 닫고 행복한 뒤에 만나는 세상 모든 대상들에 대하여 행복을 발산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행복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로 오감을 닫고 행복함이 숙달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행복을 발산하는 발광체로 세상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