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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요동침 없이 머물 마음의 집을 찾아라>의 줄거리:
몸이 거할 집이 월세나 전세라서 아직 내 집이 없음으로 근심하십니까? 내 집을 가져도 근심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아예 마음의 집을 관심하여야 합니다. 몸이 궁궐 같은 집에 머물러도 마음의 집이 불안한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머리 둘 곳이 없어도 우선은 마음이 흔들림도 동요도 요동침도 없이 지낼 마음의 집을 찾으십시다.
요동침 없이 머물 마음의 집을 찾아라
(요한복음 14:1~3)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요동침 없이 머물 마음의 집을 찾아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요동침 없이 머물 마음의 집을 찾아라”
본문의 말씀 이후 6절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는 유명한 구절이 이어집니다. 이 부분을 함께 다루기에는 앞부분의 내용도 중요하기에 3절까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절 앞부분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에는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시각 현재 눈여겨보고 계신 대상이 무엇인지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 중에 당신을 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은 누가 예수님을 팔 것인가를 두고 수군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말씀하셨고 가룟 유다는 떠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이 되었는데도 다른 제자들은 누가 예수님을 팔려는 자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산헤드린공회에 예수님을 팔고 예수님은 체포당하고 재판을 받으시게 됩니다.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넘겨져서 채찍을 맞으시고 고난을 당하신 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주목하고 계신 것은 이 모든 일련의 사건을 마주하게 될 제자들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절의 뒷부분에서는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맥락에서 믿음이란 마음의 문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마음을 어떤 특별한 대상에게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대상들이 사실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상들 중에서 특정한 대상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특정한 대상에게 마음을 주게 되는 이유는 마음은 하나님 크기의 공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채워지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움직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채워지리라 믿어지는 대상에게 마음을 주게 됩니다. 이와 연관하여 마음에 근심이 생기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마음에 근심이 생기는 이유는 믿음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마음을 주고 있는 대상에게 문제가 있으면 근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어떤 대상에게 마음을 주는 이유는 그 대상으로부터 채움을 기대하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준 대상에 문제가 있어서 채움에 대한 기대와 확신에 빨간 신호등이 켜지면 그것이 곧 근심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근심이나 걱정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생기는 이유는 말씀드렸듯이 마음을 준 대상에게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준 만큼 채워지리라는 기대와 확신이 있다면 근심과 걱정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와 확신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거나 좋아지지 않으면 근심과 걱정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처럼 근심과 걱정은 믿음과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마음을 주는 것이 믿음이고 마음을 준 대상에게 문제가 있을 때 근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근심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타라세스도(ταρασσέσθω)는 동요하다, 요동치다, 흔들리다는 뜻의 타라소(ταράσσω)를 원형으로 합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직역해보면 “마음을 요동치게 하지 말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제자들의 상황에서는 지키기 힘들고 불가능한 당부의 말씀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관계를 맺게 되었고 측근으로서 예수님께 마음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지내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능력에 기초하여 이 세상 안에서 영광된 미래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예수님의 능력 때문에 가능한 영광된 미래 쪽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아닌 영광된 미래로부터 마음 채움을 기대하고 확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제자들이 꿈꾸던 미래가 송두리째 사라져버리는 상황을 맞닥뜨리기 직전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능력에 기초한 영광된 미래는 사라지고 마음이 동요하고 요동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상황들이 너무나 무시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 무시무시한 상황은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설령 한 제자가 예수님을 팔려고 시도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능력을 발휘하셔서 팔리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팔릴 것이라는 뉘앙스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제자들이 갖고 있던 미래를 향한 들뜬 마음에 찬물을 끼얹고 짙은 먹구름이 덮치게 하는 발언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팔려 체포되시고 산헤드린공회에서 재판을 받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넘겨져서 사형이 선고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이 하루 만에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보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이루게 될 꿈을 멋대로 마음의 거처로 삼고 있었으나 그 꿈이 없어짐으로써 마음이 요동치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제자들에게 이 세상에서는 마음을 줄 수 있는 대상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게 하실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요동치지 않으려면 마음 줄 곳이 이 세상의 어느 특정한 대상이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제자들에게 남겨주실 것이 없으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오직 믿음에 대한 당부를 하십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나인 성 과부의 경우는 마음을 주는 대상이 외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안에 어떤 대상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기를 예상하고 계셨습니다. 마음을 요동치지 않게 하라는 말씀은 결국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는 방법이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는 말씀에 담겨있습니다.
근심이 흔들리는 마음이라면 평강은 마음에 흔들림이 없는 상태입니다.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요동치지 않는 상태입니다. 마음을 무엇에 두었는지를 보면 근심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말씀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믿음이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공백의 마음을 어떤 대상에게 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공생애 때의 기적을 보이시던 예수님의 능력에 마음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마음은 자동적으로 이 세상 안에서 미래를 꿈꾸게 되고 미래를 향한 목표의식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마주하게 된 것은 십자가의 예수님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 앞에서 마음은 요동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면서도 마음이 요동치지 않으려면 이 세상에 마음을 두는 일은 중단되어야 하고,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고 싶다는 목표의식도 없어져야만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 세상을 향한 목표의식을 갖지 않아야 근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만 했던 이유는 이 세상을 향하여 마음을 두고 있는 목표의식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위해서라도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믿음은 바로 마음을 두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음의 근심과 연결됩니다. 마음을 무엇에 두느냐에 따라서 근심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이루고 싶은 미래에 마음을 두고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마음이 동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고서도 동요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마음을 두고 있는 목표를 제거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근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님께 마음을 두면 이 세상에서 근심할 일은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풀어보자면 “내가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을 볼 때에 너희는 십자가에서 죽는 나에게 마음을 두어라. 더는 나의 능력을 사용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이루지 못하게 될 이 세상의 목표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 것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권자이심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창조주 되심과 거룩하심과 역사의 주권자 되심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말씀은 그 마음 그대로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님께 옮겨놓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는 모습은 전지전능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과도 정반대인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마음을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님께 옮겨놓으라는 것입니다.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리던 마음을 그대로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죽는 예수님께 옮겨놓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시고 창조주 되시고 주권자 되시고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무력하고 수치스럽고 창피하고 고통스럽게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님께 그대로 옮겨놓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강력하게 십자가 예수님께 마음을 둘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의 근심이 없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근심의 완전정복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눈앞에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채워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고, 주권자 하나님을 믿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살아서 내 앞에서 움직이고 계심을 본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으로서 눈앞에 계심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런 정도의 강한 마음을 십자가 예수님께 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믿음을 그대로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님께 옮겨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특징은 걱정이 근절되고 근심이 없어집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님께 마음을 두려면 이 세상의 어떤 대상과 목표에도 마음을 둘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의 어떤 대상에게도 마음을 두게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근심이 사라지는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2절에서 아버지 집을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님께 마음을 두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집으로 데려가셔서 머물게 하십니다. 우리 마음을 아버지 집에 머물 수 있게 해주십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드릴 때 4차원 천국에 머물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아무리 잘되는 미래를 꿈꾸어도 그것은 마음이 머물 집은 될 수 없습니다. 4차원의 천국은 이 세상 안에서 최고로 잘 되는 미래가 완전히 망각될 정도로 좋은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좋은 곳으로 우리의 마음을 끌어가고자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님께 마음을 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던 이유는 마음을 세상에 두는 우리의 체질을 끊으시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에서 마음의 집을 찾는 습성에 반대되는 역사를 일으키신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십자가 사건에 마음을 두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사건에 마음을 두기 위해서는 세상에 마음을 두는 일은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걱정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게 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마음의 요동함 없이 머물 수 있는 아버지 집으로 데려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둘 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은 어떤 일이 생겨도 마음이 요동치 않는 집으로 들어가게 하라는 뜻입니다. 마음의 집이 튼튼하면 천지가 다 없어지더라도 마음이 요동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해와 달이 떨어지고 전쟁이 일어나고 돈이 안 벌리고 병이 나고 온갖 난리가 나더라도 육체가 만나는 3차원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의 진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가끔 차를 타고 가다 보면 무진동이라고 적혀있는 긴 컨테이너 차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반도체나 진동에 민감한 장비들을 옮기는 특수차량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러한 무진동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일에 가 있으면 일이 안 될 때 마음도 요동칩니다. 마음이 자녀에게 가 있으면 자녀에게 문제가 있을 때 마음도 요동칩니다. 같이 요동친다면 문제에도 나에게도 구원은 주어질 수 없습니다. 삶에 문제가 생길 수 있지만 마음은 문제로 인한 진동이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 평강을 유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문제를 위해서나 마음을 위해서나 최선의 상태입니다. 문제가 물속에 빠졌는데 그 문제를 구하겠다고 물속에 뛰어든다면 같이 허우적댈 뿐입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은 엄청난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근심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속는 것입니다. 근심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죄 때문에 근심합니다. 죄는 마음이 머무를 집을 엉뚱한 곳에 정해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원래 몸으로 만나는 3차원 세상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로부터 나오는 진동과 충격이 닿지 않아야 정상입니다.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은 “3차원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일의 진동이 마음에 전달되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 일에서 생기는 진동과 함께 마음이 요동쳐서는 안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서 내 앞에서 움직이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다면 마음을 드리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이와 똑같은 마음으로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는 예수님을 붙잡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변화산의 사건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해주시기 때문에 붙잡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 자체가 너무 좋아서 붙잡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전지전능하시고 너무나 좋은 보석빛으로 찬란해서 이 세상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게 하실 하나님께서 눈앞에 나타나셨다면 붙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상태를 십자가 예수님께 옮겨놓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옮겨놓은 결과는 이 세상에 대한 모든 근심과 걱정이 없어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는 믿음을 고수하면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4차원 아버지 집으로 데려가십니다. 마음이 아버지 집에 있으면 3차원 세상에서 몸이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그 진동은 마음에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생기지 않는 상태가 구원을 받은 상태입니다. 돈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동이 마음에 전달되지 않습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대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동요하지 않고 요동치지 않습니다.
본문 3절을 보면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종말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주시하시는 차원에서 이어져 나가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완수하시고 보좌 우편에 계신 후에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마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내가 가야 할 길로 깨닫게 해주십니다. 3절의 말씀은 그럴 때 일어나는 일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믿음은 십자가 예수님께 마음 드리기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마음은 상황의 진동이 느껴지지 않는 아버지 집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풍랑에도 가라앉지 않고 풍랑 위를 걷고 풍랑을 잠잠케 할 수도 있는 하늘의 뜻을 이 땅에 펼쳐나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근심이 없는 상태는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전제조건입니다. 세상의 문제로 인해서 마음이 함께 동요하지 않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 마음의 집은 천국에 계시는 아버지의 집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이 땅에 어떤 상황이 펼쳐지더라도 상관없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 갑니다.
정리해봅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은 “너희의 마음이 이 세상 상황에 따라 같이 동요하고 요동치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보석빛으로 찬란하신 분으로서 눈앞에서 움직이신다면 붙잡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눈앞에 나타나시는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을 때까지 근심 없이 살아가게 되고 근심이 없어지면 하나님의 뜻은 본격적으로 땅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시기 위하여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세상에 마음의 집을 마련하려는 우리의 체질을 끊어버리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몸이 처한 이 세상의 상황과 마음이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상태, 세상의 진동이 조금도 전달되지 않는 마음의 무진동 상태가 평강입니다. 이 평강이 유지되는 경험을 실제로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잡는 마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눈에 보이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그 십자가 예수님을 붙잡으면 실제로 영광스러운 하나님께로 도달하게 됩니다.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장 처참하고 부끄러운 십자가를 죽을힘을 다해서 붙잡는 이유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자아의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근심이 사라지는 삶을 경험하실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만사를 젖혀놓고 가장 우선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의 요동함이 없는 상태를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에 요동함이 없는 상태로부터 손대는 일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일마다 아버지의 주권이 발사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