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계일학(群鷄一鶴) - 평범한 무리 가운데 뛰어난 인재
이상호(전 천안아산경실련대표, 소소감리더십연구소 소장)
1. 인재는 넘쳐난다는데 주나라가 망하고 갈기갈기 쪼개진 나라는 서로 싸움질만 하였다. 이 춘추전국시대에는 인재가 넘쳐났다. 이때 나타난 사람들을 일컬어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한다. 이들은 각기 자기의 논리를 펴며 세상의 이치를 논하고 세상을 구할 방법을 찾아 설파하였다. 이들은 모두 글줄깨나 읽은 사람들이기에 선비라 불렀다. 그러나 그들은 갈 곳이 마땅하지 않았다. 이 선비들은 나라가 혼란하고 세력가들이 득세하는 바람에 안정되게 한곳에 머물러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장사를 하여 대승을 거두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산속에 들어가 은둔하며 자기 학문의 길을 닦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상당수는 권세가들의 집에 들어가 책사 노릇을 하면서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었다. 이들을 일컬어 식객(食客)이라고 한다. 전국시대에는 이 식객들이 넘쳐났다. 그야말로 정치지망의 지식인 과잉시대였다. 이들 중에 대부분은 주인에 충성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배신을 하고 다른 주인을 찾아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이를테면 자기를 알아주는 주군을 끊임없이 찾아다니기를 반복했다. 그때는 학문의 자유와 지향이 쉽지 않았던 신분제 사회였다. 그 시기에도 지식인은 수요보다 넘쳐났다. 하지만 쓸만한 지식인은 부족했다. 지식인을 인재라는 말로 대신할 때 오늘날은 전 세계적으로 인재가 넘쳐난다. 특히 오늘날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지식인은 더욱 넘쳐난다. 젊은이들은 거의 다 최고 학부인 대학 졸업자들이다. 그런데 그 넘쳐나는 대학 졸업자 중에서 정작 기업이나 국가가 필요한 인재는 드물다고 한다. 왜 그럴까? 학계의 상황을 보더라고 이런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대학은 넘쳐나고 각 분야에서 분야별 전문가라 자칭하는 사람들도 넘쳐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다행이지만 그들의 충돌로 사회적 이론이 혼란스러울 때도 있을 수 있다. 지식인들이 넘치다 보니 그들 중에는 각자 자기의 존재와 삶의 길을 찾아 옛날 식객들이 그랬듯이 유력 정치인들을 찾아 그들의 책사 노릇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그들은 선거철이 되면 자청하여 유력한 후보나 마음에 드는 후보에게 줄 서기를 한다.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작 정당한 이론이나 정치적 소망의 실현보다는 자기의 자리를 얻기 위한 노릇이었다면 문제가 된다. 이렇게 정치적 줄서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넘치는데 정작 인재다운 인재는 드물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저마다 국가나 지방을 경영하겠다고 나서는 정치인들 이를테면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 자치단체장, 지방의회 의원 등을 지망하는 수많은 후보들, 나아가 그들의 낙수효과를 노리며 그들에게 온갖 충성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 이들을 합하면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막상 그들이 당선되고 나면 구설이 없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어떤 이들은 도덕적 흠결이 많아 구설에 오르고 어떤 이들은 부정부패의 의혹으로 구설에 오른다. 또 어떤 이들은 전과 이력을 가지고 있어 실망스럽다. 그렇지만 그들은 당당하다. 그들의 극렬지지자들은 그런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지지를 보내며 국민은 그리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니 인재다운 인재는 보이지 않고 어딘가 한곳이 비어있는 사람들이 인재를 자처하는 세상이 되었다. 민주주의 시대의 정치라는 것이 그런 것인가? 하기야 옛날에도 정쟁이 심할 때는 인재다운 인재보다는 정쟁에 능한 인재만 돋보이게 되며, 정쟁을 이끄는 사람들은 그런 인재를 눈여겨 뽑아 왔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정쟁의 정점에 서 있는 정치 지도자들도 인재다운 인재보다는 정쟁에 능하여 상대를 이길만한 인재를 더 좋아한다. 그러니 정쟁이 심할 때는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인재는 많지만, 막상 인재다운 인재는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나라가 발전하고 정권이 오래 지탱하려면 정말 인재다운 인재를 찾아 나서야 한다. 그것은 기업도 마찬가지고 공직도 마찬가지이며, 정치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한 명의 현명하고 정의로운 인재가 세상을 살려내기 때문이다. 그런 인재는 어떤 사람일까?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는 고사를 통해 참 인재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2. 군계일학(群鷄一鶴)의 의미와 유래 군계일학(群鷄一鶴)이란 여러 무리의 닭 속에 한 마리의 학이라는 의미로 사람들 속에 아주 돋보이는 인재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다른 말로 계군일학(鷄群一鶴)이라고도 하고 학립계군(鶴立鷄群)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진서(晉書) 혜소전(嵇紹傳)에서 유래되었다. 중국 고대의 삼국 시대와 위·진 시대로 이어지는 시기는 정권이 교체되는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이때는 권력을 앞에 두고 배신과 부패가 만연하였다. 특히 권세를 잡은 공신들의 횡포는 말이 아니었다. 위나라 공신인 사마씨 일족이 국정을 장악하고 전횡을 일삼았다. 이들의 횡포를 보다 못한 완적(阮籍), 혜강(嵇康), 산도(山濤), 향수(向秀), 유영(劉伶), 완함(阮咸), 왕융(王戎) 등의 선비들은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며 시를 짓고, 거문고를 뜯으며, 술을 마시며 고담준론을 펼쳤다. 이들은 세상을 한탄하고 은유하며 당시 지배 세력을 향한 저항을 표시했다. 그들을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 부른다. 이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혜강(嵇康)에게는 혜소(嵇紹)라는 아들이 있었다. 혜강은 위(魏)나라에서 벼슬이 증산대부에 이를 만큼 학덕이 뛰어났으나 당시에는 곧고 뛰어난 인재를 그냥 두지 않았다. 그는 주변의 무고로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이때가 혜소의 나이 열 살 이었다. 그래서 혜소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근신하면서 아버지처럼 학덕을 쌓아갔다. 무제(武帝)(256〜290, 조조가 세운 위나라를 멸하고 진나라를 세웠으며 중국 천하를 진나라로 통일한 인물인 사마염) 때였다. 죽은 부친의 친구인 산도(山濤)가 이부(吏部)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다. 그는 과거 절친이었던 혜강의 아들인 혜소가 어려운 형편에서도 매우 총명하게 자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날 무제에게 혜소를 추천하였다. “강고(康誥-書經의 편명)에 이르기를 아비의 죄는 그 아들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아들의 죄 또한 그 아비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혜소는 혜강의 아들이긴 하지만 지혜롭기는 춘추시대의 진(晉)나라의 대부인 각결(卻缺)보다 나으면 나았지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를 불러 그에게 비서랑(秘書郞)의 벼슬을 주면 그 임무를 백배 이상 해 낼 것입니다.” 그때 무제는 산도를 매우 충직한 신하로 신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습니까? 경이 추천한 사람이면, 낭(朗)의 자리보다 승(丞)의 자리를 주는 것이 더 낫지 않겠소”라고 말하며 혜소에게 비서랑보다 한 단계 위의 자리인 비서승(秘書丞)의 자리를 주었다. 혜소가 벼슬을 하고 명을 받아 처음으로 낙양 땅에 갔을 때의 일이었다. 혜소를 본 어떤 사람이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왕융(王戎)에게 이렇게 말했다. “며칠 전에 사람들이 많은 혼잡한 속에서 혜소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드높은 기세와 의기가 마치 <닭의 무리 속에 학(群鷄一鶴)>이 끼어 있는 듯하였습니다.” 이에 왕융은 말했다. “그런가? 자네는 전에부터 그 부친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일세” 왕융은 혜소를 그의 부친인 혜강보다는 못하나 매우 뛰어난 인물로 평가하였다. 혜소는 맡은 바 임무를 충직하게 하여 얼마 안 가서 여음태수(汝陰太守)에 봉해졌다. 그때도 혜소는 정사를 잘 보아 사람들의 칭송이 잦았다. 그중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의 벼슬을 하고 있던 배위(裴頠)가 “연조(延租-혜소의 자)를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삼는다면 천하의 모든 인재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등용될 것”이라며 상소하였다. 이에 혜소는 산기상시(散騎常侍)의 벼슬에서 승진하여 시중(侍中)이 되었다. 그리하여 혜소는 혜제(惠帝)를 가까이서 모시면서 충직한 말과 행동으로 혜제가 정치를 바르게 이끌도록 했다. 이렇게 혜소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학덕과 충절을 주변에서 인정하여 추천되었기 때문이었다. 제나라 왕 경(冏)이 상당한 위세를 떨치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때였다. 혜소는 황제의 명을 받고 제왕 경(冏)과 의논할 일이 있어 찾아갔다. 그때 제왕은 측근들과 연회(宴會) 중이었다. 제왕의 측근들은 혜소를 떠보기 위해 농담이 섞인 말을 걸었다. “듣자 하니 시중께서는 거문고의 명수라 합니다. 한번 뜯어 보심이 어떨런지요?” 이 말을 들은 왕은 거문고를 가지고 오게 하여 혜소에게 한 곡조 뜯어 보게 하였다. 그러나 해소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왕께서는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해 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할 분이십니다. 이 혜소는 못난 사람이지만, 천자의 은덕을 입고 가까이 모시면서 조복(朝服)을 입고 궁중을 출입하는 몸입니다. 그런 제가 감히 거문고 줄이나 튕기면서 악사(樂士)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제가 평복(平服)을 입은 사적인 술자리라면 언제고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이에 제왕은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 영흥(永興)이 즉위하고 첫해였다. 황제 보위에 불만을 품은 제후들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팔왕의 난(八王之亂)이라고 한다. 이때 황제는 하간왕(河間王) 옹(顒)을 먼저 치고자 계획하고 출병하였다. 그러나 싸움에 패하여 수도를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혜소는 황제의 부름을 받고 피난길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황제의 군대는 탕음(湯飮)에서 대패한 후였다. 주변을 보니 황제를 모셔야 할 문무백관들과 시위(侍衛)들은 거의 다 도망을 치고 남은 사람들은 열 손가락 안이었다. 황제의 목숨은 풍전등화였다. 혜소는 의관을 반듯하게 입고 황제의 수레 앞을 지키며 피난길을 열어갔다. 반란군들의 무수한 창과 칼이 날아들었으며 화살이 빗발쳤다. 그러나 혜소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막아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헤소는 온몸에 화살을 맞고 피투성이가 되었다. 혜소는 죽는 순간까지 천자를 지키며 싸우다가 끝내 목숨을 거두었다. 그때 화살을 맞은 혜소의 피가 튀어 황제 옷에까지 핏자국이 낭자했다. 황제가 위험에서 벗어난 후 황제를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이 황제의 옷에 묻은 혜소의 피를 씻어 내려 했다. 그러나 황제는 손사래를 치며 그 옷을 벗지 않고 말했다. “이 피는 혜시중의 충성된 피이니라. 절대로 씻어내지 마라!” 혜소가 죽은 후 같은 시중이었던 진준(秦準)이 이런 말을 남겼다. “혜시중은 황제가 위험에 처하여 불렀을 때 급히 출발하려 했다. 그때 내가 ‘혜시중은 싸움판에 나가는데 좋은 말을 가지고 계시느냐’고 물었다. 이에 혜시중은 ‘폐하의 친정(親征)은 정(正-바른 일)으로 역(逆-역적)을 치는 것이니만큼 정토(征討)이지 싸움이 아닙니다. 다만 폐하의 옥체를 보존하지 못한다면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니 준마(駿馬)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고 말했다. 혜시중은 학덕이 높은 충신 중의 충신이다.” 이 말은 전해 들은 사람들은 혜소의 학덕과 충절에 모두 감동하여 칭송하였다. 혜소는 진정한 인재인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 3. 군계일학(群鷄一鶴) 즉 뛰어난 인재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위의 이야기를 보면 지금도 혜소는 보기 드문 뛰어난 인재였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뛰어난 인재란 어떤 사람인가를 유추해 낼 수 있다. 첫째, 뛰어난 인재는 학덕(學德)이 겸비되어야 한다. 혜소는 아버지 혜강의 뜻을 이어받아 학문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덕을 쌓아 주변의 추천이 자자했다. 그러나 겸손하여 스스로 자기를 유세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세상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기다렸다. 공자도 “진정한 선비란 어떤 자리에나 보배가 될 자격을 가지고 있어 남이 초빙해주기를 기다린다(儒有席上之珍以待聘)<공자가어 권5 유행해)”고 하였다. 학덕은 학식과 덕망을 말한다. 학식은 전문적 지식은 물론 세상살이와 만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일을 처리하는데 손색없는 지식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다. 덕망이란 곧 인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직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 성품이 순후하고 인의(仁義)가 겸비된 사람을 일컫는다. 유가(儒家)의 입장에서 인재의 자질을 말한 공자는 “선비는 학문이 넓어 끝이 없으며 독실하게 행하면서도 권태를 느끼지 않는다. 그윽한 곳에 처해 있어도 방탕하지 않으며, 위로는 궁함이 없고 예(禮)는 반드시 화합을 근간으로 하며 부드럽게 함을 법으로 삼으며 어진 사람을 사모하고 무리를 용납하며 모난 것을 버리고 원만함을 따른다, 儒有博學而不窮하고 篤行而不倦하며 禮必以和하고 優游以法하며 慕賢而容衆하고 毁方而瓦合하니 其寬裕有如此者라)<공자가어 권5 유행해>”고 하였다. 학식과 덕망은 인재가 가져야 할 첫째 조건이었다. 둘째, 공무를 수행하는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공무를 수행하다 보면 온갖 유혹이 따른다. 그 유혹에 넘어가면 공무를 그르치고 자신의 품위를 상실한다. 혜소가 제나라 왕을 면담하였을 때는 조목을 단정하게 입고 있는 엄연한 공직 수행 중이었다. 그런데 제왕은 연회를 하다가 공무 중인 혜소에게 거문고를 뜯으며 가무를 즐길 것을 권했다. 이에 혜소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거절하였다. 이는 공무원으로서의 품위를 지킨 것이었다. 이러한 일에 대하여 공자도 “선비는 재물을 주면서 일을 부탁해도 탐욕을 부리지 않으며, 즐길만한 일을 주어도 음탕하게 굴지 않으며 많은 수의 사람으로 위협을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儒有委之以財貨不貪 淹之以樂好以不淫 劫之以衆以不懼)<공자가어 권5 유행해>”라 하였다. 셋째, 정의와 불의를 정확하게 구분하여 대처할 줄 안다. 혜소와 같은 시중 진준(秦準)이 남긴 말에서 “폐하의 친정(親征)은 정(正-바른 일)으로 역(逆-역적)을 치는 것이니만큼 정토(征討)이지 싸움이 아닙니다.”란 말에서 혜소는 대세의 경중을 떠나 사태의 정(正)과 반(反)을 정확하게 꿰뚫고 그에 대처하였다. 참된 인재는 이익이나 대세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다. 다만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판단하여 행할 뿐이다. 이점에 대하여 공자도 “선비는 그 몸을 위태롭게 할 수는 있어도 그 뜻을 빼앗을 수는 없다(身可危也 其志不可奪)<공자가어 권5 유행해)”고 하였다. 위기가 닥친다고 옳은 뜻을 굽히는 자는 진정한 인재가 아니다. 넷째, 지극한 충성심이 있다. 위에서 해소는 온몸을 창칼에 찔리고 화살을 맞아 죽는 순간까지 의리를 지켜 충성을 다하였다. 그러기에 황제도 그의 옷에 묻은 그의 피를 씻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단순히 사람에게 충성한다는 의미를 넘어 정의와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공자도 이에 대하여 “선비는 충성과 신의를 갑주로 삼고 예절과 의리를 간로(干櫓-방패)로 삼는다. 어진 것을 싣고 행하며 덕을 품은 채 살아간다. 비록 포악한 정치가 자신을 위협해도 지조를 바꾸지 않는다. 그 자립함이 이와 같다(儒有忠信以爲甲冑 禮義以爲干櫓 戴仁而行 抱義而處 雖有暴政 不更其所 其自立有如此者)”<공자가어 권5 유행해>고 하였다. 참된 인재는 위협이나 정치적 거래에 넘어가지 않으며 오로지 충성과 의리를 지키며 그 지조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의 고사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뛰어난 인재가 되려면 위와 같은 4가지의 덕목을 두루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 이러한 인재는 과연 얼마나 될까? 정의는 팽개치고 당리당략에 따라 의결하고 표를 던지며 패거리를 꾸미는 국회의원과 정치인들은 어떤 뜻과 지조를 몸에 간직하고 살까? 정의로운 소신을 내팽개치고 사소한 이익과 정치적 이권에 의해 좌우되는 정치인들을 뭐라고 해야 할까? 돈에 눈이 어두워 회사의 소중한 정보와 기술을 빼돌리는 사람을 인재라 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나라는 문맹률이 제로에 가까울 만큼 공부한 사람이 많고 박사학위를 가진 전문가라는 사람도 넘쳐난다. 그런데 정말 학식과 덕망이 있으며 공과 사의 분별이 분명하고, 정의와 불의를 정확하게 구분할 줄 알며, 지극한 의리로 충성을 다하는 지조 있는 인재는 얼마나 될까? 지난날의 대통령들이 존경받지는 못할망정 불명예스러운 마지막을 장식한 대한민국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군계일학 같은 통치자를 갖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무엇이 문제일까? 그것은 누구의 탓일까? 국민의 탓일까? 통치자의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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