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어릿광대(B)
장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을 찬찬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마 그럴 겁니다! 나도 그건 알고 있어요, 미우소프씨. 게다가 말을 시작하자마자 내가 또 그 짓을 하고 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제일 먼저 그런 참견을 해주리라는 것까지 미리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장로님, 저는 제 농담이 제대로 들어맞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면, 그 순간 양쪽 볼이 아랫잇몸에 들러붙기 시작해서 거의 경련 같은 걸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제가 젊어서 귀족 집의 식객 노릇을 하며 밥을 얻어먹고 있을때부터의 버릇입니다.
저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본성이 어릿광대였단 말입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바보와 다를게 없지요. 틀림없이 저의 내부에는 악마란 놈이 들어앉아 살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다지 대단한 놈은 아니지요. 좀더 대단한 놈이라면 딴 집을 택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미우소프씨, 당신의 집만은 아닙니다. 당신은 그럴 만한 좋은 집이 못 되니까요. 그러나 그 대신 저는 믿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단 말입니다. 최근에 다소 의문을 느낀 적도 없지는 않았습니다만, 그 대신 지금은 이렇게 앉아서 위대한 말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말입니다, 장로님, 마치 철학자 디드로[1723-84년,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학가] 같은 놈입니다.
장로님, 당신은 예카테리나 여왕 시대에 그 철학자 디드로가 플라톤 대주교를 만나러 왔던 일을 알고 계시겠죠? 그는 들어오자마자 '신은 없소'라고 딱 잘라서 말했지요. 그러자 위대하신 대주교께서는 손가락을 들고 '미친 자가 자기 마음에 신이 없다고 말하도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디드로는 당장 대주교의 발밑에 엎드려 '믿습니다, 세례도 받겠습니다.' 하고 외쳤다는 겁니다. 그리하여 당장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았지요. 다쉬코바 공작 부인이 교모(敎母)가 되고 포촘킨이 교부(敎父)가 된 겁니다."
"표도르 파블로비치,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어요! 당신 자신도 자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돼먹지 않은 일화가 사실이 아님을 잘 알고 있지 않소. 그런데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겁니까?" 미우소프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떨리는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나도 거짓말이라는 건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겁니다!" 하고 표도르는 열띤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여러분, 그 대신에 이번엔 진짜 사실을 말씀드리죠. 위대하신 장로님!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끝머리에 말씀드린 디드로의 세례 이야기는 방금 생각해 낸 창작입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동안에 순간적으로 꾸며 낸 소립니다. 전엔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던 얘기지요. 흥미를 돋우기 위해 꾸며 낸 창작입니다. 미우소프씨, 내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것은 좀더 유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예요. 하지만 이따금 나 자신도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지 영문을 모를 때도 있지요. 그런데 그 디드로의 얘기,즉 '미친 자가 마음에.......' 하는 이야기로 말하면, 내가 젊어서 식객 노릇을 하고 다닐 때 이 고장 지주들 한테서 스무 번 가량은 들었을 겁니다.
미우소프씨, 난 당신의 고모 마브라 포미니쉬나한테서도 여러번 그 얘기를 들었어요. 그 사람은 무신론자 디드로가 하느님에 대해 논쟁하려고 플라톤 대주교를 찾아갔다고 아직까지 믿고 있으니까요............. ."
미우소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격분해 있었으면서도, 그런 짓을 하면 자기가 우스워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이 암자에서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 암자에는 이미 4,50년 동안 몇 대(代) 전의 장로 시대부터 많은 방문객들이 몰려들었지만 모두가 예외 없이 깊은 존경심을 품은 사람 뿐이었다.
암자에 들어오도록 허락을 받은 사람은 거의 모두가 위대한 은총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방에 있는 동안 무릎을 끓은 채 일어서려고도 하지 않았다. '상류계급'의 인사들이나 일류 학자들까지도, 아니 그뿐만 아니라 호기심에서나 또는 그 밖의 동기로 찾아오는 몇몇의 자유 사상가들까지도 여럿이서 함께 장로를 만나든지 간에 이 암자에 발을 들여놓으면 모두가 하나같이 회견을 하는 동안 계속 깊은 존경심을 표하고 예의를 지키는 것이 자기의 첫째 가는 의무로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여기서는 돈 같은 게 문제가 아니라 이쪽에서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저쪽에서는 참회와 소망, 즉 어떤 정신적인 어려운 문제나 삶에 있어서의 곤란한 순간을 해결하려는 소망, 이런 것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뜻하지 않게 표도르 파블로비치가 저지른 바와 같은 무례한 어릿광대짓은 함께 있던 사람들, 적어도 그 중 몇 사람에게는 의혹과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두 수사 신부는 조금도 얼굴색을 바꾸지 않고 장로가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주시하고 있었으나, 역시 미우소프와 마찬가지로 지금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만 같았다.
알료샤는 금세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그는 자기 형 이반의 태도가 무엇보다도 이상하게 여겨졌다. 이반은 아버지에 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으므로, 알료샤는 그가 아버지의 언동을 제지해 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반은 눈을 내리깐 채 꼼짝 않고 자기 의자에 앉아서, 마치 자기는 완전한 방관자처럼 일종의 독특한 호기심까지 띠면서 사건의 결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알료샤는 자기와 꽤 친밀한 사이인 라키친(신학생)마저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알료샤는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이 수도원 전체에서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알료샤 뿐이었다).
"용서해 주십시요" 하고 미우소프는 장로를 향하여 입을 열었다. "장로님께선 이 어리석은 웃음거리에 저도 한 몫 끼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표도르 파블로비치와 같은 인간이라도 장로님처럼 존귀한 분을 방문할 때는 적어도 자기의 의무를 지키려고 노력하리라 믿었던 것이 제 잘못이었습니다. 이런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으로 용서를 빌어야 할 줄은 전혀 생각치도 못했습니다."
미우소프는 미처 말끝을 맺기도 전에 완전히 당황해 가지고 그대로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
"제발 그런 걱정은 마십시오." 장로는 갑자기 그의 허약한 다리로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미우소프의 양손을 잡아 다시 그를 의자에 앉혔다.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나는 당신에게 특히 내 손님이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소이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한 번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려 자기 자리에 앉았다.
"위대하신 장로님,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너무 떠벌렸기 때문에 혹시 기분이 상하신 건 아닙니까?" 표도르는 의자 양쪽 손잡이를 움켜쥐며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거기서 벌떡 뛰어오르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으로 별안간 이렇게 소리쳤다.
"제발 당신도 마음을 놓으시고 어려워하지 마십시오." 장로는 설득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어려워할 건 없습니다. 자기 집과 다름없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수치심을 버리는 겁니다. 모든 근원이 바로 거기에 있으니까요."
"자기 집과 같이 생각하라고요? 즉 본연의 모습 그대로 돌아가란 말씀이군요? 오, 그건 너무나, 너무나 과분하신 말씀입니다. 하나 기쁘게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거룩하신 장로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라고 저를 유혹하지는 마십시오. 그건 위험한 모험입니다......... . 본연의 모습까지는 저 자신도 도달할 용기가 없습니다. 이건 장로님을 보호해 드리기 위해서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러나 그 밖의 것은 아직도 미지의 어둠속에 묻혀 있습니다.
비록 개중에는 나를 우스꽝스런 존재로 만들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이건 미우소프씨, 바로 당신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거룩하신 장로님, 당신께는 환희의 정을 토로하겠다고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그는 엉거주춤 일어서서 두 손을 높이 쳐들며 말했다.
"'그대를 밴 모태는 복이 있도다, 그대에게 젖을 먹인 유방(乳房) 또한 복이 있도다, 특히 그 유두에는 복이 있도다!' 장로님께서는 방금 '자기 자신에 대한 수치심을 버려야 한다, 모든 근원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주의시켜 주셨지만, 그 말씀이야말로 저의 뱃속을 환히 꿰뚫어 보신 말씀입니다. 사실 저는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게 되면 저 자신을 누구보다도 비열한 놈이라 느끼게 되고, 또 모두들 저를 어릿광대로 취급하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 그럼 정말 어릿광대가 되어 보이겠다. 네까짓 것들이 무슨 말을 하든 두려울 게 뭐냐. 네놈들은 모두 나보다 비열한 놈들인데!' 라는 생각에서 어릿광대가 된겁니다. 저는 수치심 때문에 위대하신 장로님, 저는 수치심 때문에 그렇게 된 놈입니다. 저는 시기심 때문에 미쳐 날뛰는 겁니다. 만일 사람들 앞에 나섰을 때,모두가 곧 저를 가장 친절하고 가장 영리한 사람으로 받아 주리라는 자신만 있다면 ㅡ 아아, 저도 얼마나 선량한 인간이 될까요! 스승님!"
그는 느닷없이 무릎을 꿇었다.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 겁니까?" 그가 과연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러한 감동을 느낀 것인지 이제는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첫댓글 ^^ 참 재미 있어요.
저도 재밌게 따라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