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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정원?? 스크랩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본 화해와 용서의 문제*
유수/백재성 추천 0 조회 176 19.01.27 00: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본 화해와 용서의 문제*


윤영돈(인천대)



【주제분류】심리학, 윤리학
【주제어】융의 분석심리학, 화해, 용서, 대극의 합일, 헤라클레이토스, 요셉내러티브
【요약문】화해와 용서의 문제는 종교적 성격이 짙은 논제이다. 인간을 근본적으로 ‘종교적 인간’으로 규정하는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화해와 용서의 문제는 심리학과 종교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해명된다.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본 화해와 용서의 문제를 논구하는 데 있어 먼저, 융의 분석심리학의 구성원리의 근거가 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대극의 합일’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화해란 대립되는 것 간의 적절한 균형을 찾아가는 것인데, 그러한 화해의 양상을 의식과 무의식, 자
아와 그림자, 페르조나와 아니마․아니무스처럼 정신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에서, 더 나아가 동서양의 사유방식 간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끝으로 창세기의 요셉내러티브에 나타난 용서의 원형적 의미를 탐구하고, 고백으로부터 용서에 이르는 상징체계로서 고해성사 모델과 심리상담 모델을 살펴보고, 우리에게 실천적 과제로서 용서의 태도가 요청됨을 제시하고자 한다.


투고일: 7월 26일, 심사완료일: 8월 17일, 게재확정일: 8월 20일
* 이 논문은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제75회 월례발표회(2018년 5월 25일 서강대학교 정하상관 J610)에서 “융 심리학에서 본 화해와 용서의 문제”로 발표한 것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김서영 교수님의 논평과 익명의 심사자들의 지적과 제언이 논문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음을 밝힌다.



I. 서론


화해와 용서는 종교적인 개념이자 도덕적인 개념이며, 더 나아가 죄로 기울기 쉬운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자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그러한 고백을 수용하고 용서하는 인간의 고귀함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융(C. G. Jung, 1875-1961)은 20세기 심층심리학 분야 가운데 분석심리학(analytic psychology)을 개척한 심리학자이며, 인간의 본성과 삶의 궁극 목적 문제를 해명하고자 하는 철학적 인간학자이기도 하다.1)

융은 청년기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이를 테면 피타고라스나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라톤을 좋아했고,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칸트나 생철학자인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관심이 많았다.2) 융의 저작에서 칸트는 가장 많이 인용된 사상가에 속하는데 무려 89회나 된다.3)

칸트에게서 지성의 12개 범주는 융의 12가지 심리 유형(원형)에 상응한다. 칸트에게서 범주가 선험적 원리로서 경험을 가능케 하듯, 원형 역시 선험적 원리로서 경험을 가능케 한다. 사실 융은 자신의 분석심리학의 인식론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칸트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영혼의 의식 부분을 기술하는 데 칸트 철학을 사용할 수 있듯이, 선험적 방법론에 의거하여 영혼의 무의식적 부분을 의식화 하는데 융의 분석심리학의 개념을 활용할 수 있다.4) 융의 학문적 소양은 서양을 넘어서서 동양의 담론에도 깊이 있게 뿌리내리고 있다. 놀랍게도 그는 서구 문명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해소하기 위해 『주역』(I Ching, Classic of Change)이나 요가와 같은 동양사상까지 깊이 있게 탐구했다.5)


이 글에서는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본 화해와 용서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먼저 화해의 문제를 해명하는 데 있어 융의 분석심리학의 구성원리로 연구자는 헤라클레이토스에로까지 그 기원을 추적할 수 있는 ‘대극의 합일’ 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상호 대립하는 것의 역동적 균형과 전일적 관점에서 통합할 수 있는 계기는 의식과 무의식을 총괄하는 중심인 ‘자기(Selbst, Self)’임을 논하고자 한다.

융의 분석심리학에 근거한 화해의 양상은 의식과 무의식, 자아와 그림자, 페르조나와 아니마․아니무스처럼 정신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사유방식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음으로 융의 분석심리학의 맥락에서 창세기의 요셉 내러티브에 나타난 용서의 원형적 의미를 해명하고, 고백으로부터 용서에 이르는 상징체계를 고해성사 모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G. B. Hogenson, “C. G. Jung”, Routledge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 5, ed. E. Craig, New York, 1998, 132; J. J. Clarke, In Search of Jung: Historical and Philosophical Enquiries, London/New York, 1992, preface 참조.
2) A. Jaff?, 『C. G. Jung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이부영 옮김, 집문당, 1990,116, 122~123.
3) V. Balanovskiy, “Whether Jung was a Kantian?”, Con-Textos Kantianos, No. 4,2016, 119.
4) V. Balanovskiy, “Whether Jung was a Kantian?”, 120~125.
5) A. Jaff?, 『C. G. Jung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85~87; 윤영돈, 「융의 인격론」, 『인격』,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303~304.



II. 융의 분석심리학의 구성원리로서 ‘대극의 합일’


1. 융의 분석심리학의 모델로서 헤라클레이토스적 세계관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 544?-484? BC)는 우주와 세계뿐만 아니라 삶과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대립의 경향과 이중성을 강조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무엇보다 존재의 본성을 투쟁과 불화, 대립하는 것 간의 조화에서 찾는다. 그는 세계를 고정된 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상호 대립하는 요소들이 통합된 하나의 세계를 강조한다.6) 대립하는 것은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차가운 것은 뜨거워지고 뜨거운 것은 차가워지며, 젖은 것은 마르고 마른 것은 젖는다. 삶과 죽음, 젊은 것과 늙은 것, 깨어 있는 것과 잠들어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7)

“대립하는 것은 한 곳에 모이고, 불화하는 것으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가능하다. 그리고 모든 것은 투쟁
에서 생겨난다.”8)

대립하는 것들 사이의 조화는 마치 활과 뤼라처럼 “반대로 당기는 조화”9)이다.

이렇게 상호 대립함에도 불구하고 “만물은 하나이다.”10)

여기서 주목할 점은 상호 대립하고 투쟁하지만 대립하는 것 간의 조화를 지향하는 헤라클레이토스적 세계관은 심리학의 관점에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융은 세계뿐만 아니라 인간 내면에도 상호 대립하면서도 조화를 지향하는 심리학적 원리를 제시한 헤라클레이토스를 심층심리학의 비조로 간주한다.11) 낮과 밤, 탄생과 사망, 행복과 불행, 선과 악이라는 냉엄한 대극성(對極性)이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처절한 진실이다.12)

헤라클레이토스는 심리학적 법칙 중에서 가장 영묘한 법칙, 즉 대극에 서로 조절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대립되는 것들 간의 자기조절의 기능에 대해 ‘에낭티오드로미아(enantiodromia)’로 명명했다.13)

그러니까 모든 것들은 결국 반대쪽으로 치닫게 된다는 것이다. 자연현상에도, 심리현상에도, 더 나아가 문화현상에도 적용되는 진리이다. 때문에 합리적인 문화가 팽배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반대쪽인 비합리적인 문화의 황폐화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대극 관계에 대한 심층심리학의 개념은 융뿐만 아니라 니체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가령, 니체는『비극의 탄생』에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서 상호 대립하지만 상호 보완되는 계기를 통해 비극이 탄생했다고 말한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충동들은 그리스적 “의지”의 형이상학적인 기적 행위를 통해 마침내 상호 결합하여 나타나고, 짝짓기를 통해, 즉 대극 관계의 지형에서 결국 디오니소스적이면서도 아폴론적인 아테네 비극을 산출한다.”14)

융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심층심리학의 맥락에서 해명하는데, 아폴론적인 것을 ‘내향성(interoversion)’으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외향성(extraversion)’으로 간주한다.

한편 “그리스적 의지의 형이상학적인 기적 행위”에서 ‘형이상학적 기적(metaphysical miracle)’을 ‘무의식적인 비합리적 사건(unconscious irrational happening)’이라 해석한다.15)


6) H. Diels/W. Kranz, 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 Germany, 1974, ‘Herakleitos,
B. Fragmente’, 150~190.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에 대한 해석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김인곤 외 옮김, 아카넷, 2005, 221~266을 부분적으로 참조.
7) H. Diels/W. Kranz,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김인곤 외 옮김, 아카넷, 2005, 238~249.

8) H. Diels/W. Kranz, 「헤라클레이토스」, B 8. Aristotle, Nicomachean Ethics, 1155b4 에도 유사한 구절이 언급된다.
9) H. Diels/W. Kranz, 「헤라클레이토스」, B 51.
10) H. Diels/W. Kranz, 「헤라클레이토스」, B 50.
11) S. Karcher, “Crossed Paths, Crossed Sticks, Crossed Fingers: Divination and the Classic of Change in the Shadow of the West”, Asian and Jungian View of Ethics, ed. Carl B. Becker, Westport/Connecticut/London, 1999, 31; A. Nehamas,『니체-문학으로서의 삶』, 김종갑 옮김, 책세상, 1994, 218~220.
12) C. G. Jung, 이윤기 옮김, 「무의식에의 접근」, 『인간과 상징』, 열린 책들, 1996,61.
13) C. G. Jung, Two Essays on Analytical Psychology, trans. R. F. C. Hull, New York, 1977, 72. ‘에낭티오드로미아’는 대립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enangtios와 달리기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dromos의 합성어로서, 모든 것은 반대쪽으로 향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14) F. W. Nietzsche,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5, 29 참조.
15) C. G. Jung, “The Apollonian and The Dionysian”, trans. R. F. C. Hull, Psychological Types, New York, 1990, 143~144; 윤영돈, 「융의 양심론」, 『양심』, 서울대학교출판부, 2012, 325.



2. ‘대극의 합일’과 그 계기로서 ‘자기’


융은 인간의 정신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의 대극(Gegensatz, opposite) 관계에 주목한다. 가령 음과 양의 관계처럼 의식과 무의식 또한 대극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음과 양은 대극 관계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상보적인 관계를 지니듯 의식과 무의식 역시 상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본다. 요컨대 음과 양의 관계가 그러하듯 의식과 무의식 또한 대대적(contradictory and complementary, 對待的)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16)

융은 “악을 제거하고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 천국과 지옥을 구분하기 위한 기독교적 신화는 정적(static)이고 화해 불가능한 대극으로 이끌며, 종내에는 쓸모없는 정체 상태 내지 인습적인 종교의 방부처리 된 도그마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선악의 이분법을 지양(止揚)하고자 했다.

융은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보다는 끝이 열려 있는 도(Tao)의 음양을 선호했는데, 그것은 인간이 견뎌내야 하는 빛과 어둠의 영원한 화해를 표현한다.17) 양극 내지 대극간의 지속적인 균형은 보상 과정(compensatory process)에 의해 담보될 수 있고, 남과 여, 삶과 죽음, 빛과 어둠과 같은 양극에서 고정된 고유한 가치가 존재한다기보다 보상적 요구(compensatory demand)에 따라 유동적이다.18)


이른바 대극의 합일(coincidentia oppositorum, union of opposites)에 관한 논의이다. 대극의 합일이 도모되지 않을 경우, 대극이 폭력적으로 분출되어 대극 간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대극 간의 역동적 균형, 즉 합일의 계기는 무엇일까?

융에 의하면 “자기(Selbst, Self)는 정신의 총체성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중심이다. 자기는 중심일 뿐만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을 포괄한다. 자아는 의식의 중심인 데 비해,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총체성의 중심이다.”19)

자기의 총체성은 의식의 세계에 국한하여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다. 즉, 자기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내용은 자아(ego)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적 언어를 잠시 벗어나서 표현하자면 자기는 “불꽃의 중심(Zentrale Feuer)”이고, 신(神)과 분유하고 있는 부분이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작은 불꽃”으로 명명할 수 있다. 기독교적 어법으로 하면 자기(Selbst)는 “네 안에 있는(is within you) 하나님의 왕국”으로 간주될 수 있다.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이상은 우리의 정신 안에서 그리고 정신에 의해서 경험할 수 있는 궁극 목적(the ultimate)이다.20) 자기는 상징을 통하여 스스로의 모습을 나타내는데, 그 한 사례로 만다라(Mandala)를 들 수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원(圓)을 의미하는 ‘만다라’는 동서양에서 나타나는 원형(archetype)이다.

이 만다라의 중심에는 각 종교의 ‘신’이나 최고의 진리가 위치한다.

만다라의 중심에는 부처나 그리스도, 혹은 산신령이나 노현자(老賢者)가 위치한다.

자기원형은 정신의 전일성과 전체성을 상징하며, 내면의 혼란을 겪을 때, 이를 극복할 방향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지남력(指南力)의 원형(archetype of orientation)”으로 기능한다. 그리하여 각자의 만다라는 혼돈으로부터 질서잡힌 우주(cosmos)로의 전환을 가능케 한다.21)

여기서 “우리 안에 있는 신(God within us)”으로서의 자기원형은 내적 치유의 동인이자 정신의 전일성(wholeness)과 대극 요소들의 조화를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된다.


III에서 살펴보겠지만 융에게 있어 정신의 구성요소들 간의 대극 관계는 의식과 무의식 간에, 자아와 그림자 간에, 페르조나와 아니마․아니무스 간에 노정되어 있고, 더 나아가 동서양의 사유방식 간에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러한 대극 관계의 화해(reconciliation)를 이끄는 심층적인 계기는 ‘자기’이.


16) Kyong-Dong Kim, “Resolving the Dilemmas of Human Civilization: The Wisdom of Yin-Yang Dialectics,” East Meets West: A Quest for New Civilizations in the New Millennium. International Conference, Department of Sociology, Seoul National University, March 22, 2002 참조.

17) V. W. Gras, “Myth and the Reconciliation of Opposites: Jung and Levi-Strauss”,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Vol. 42, No. 4, 1981, 476.
18) V. W. Gras, “Myth and the Reconciliation of Opposites: Jung and Levi-Strauss”, 481~482.
19) C. G. Jung, Psychology and Alchemy, trans. R. F. C. Hull, London, 1974b, 41.
20) J. Jacobi, The Psychology of C. G. Jung: an introduction with illustrations, London, 1951, 150~151. 여기서 신(God)은 그리스도보다는 플라톤의 『향연』에서 디오티마 부인에 의해 소개된 ‘권능 있는 다이몬’(mighty daemon)으로서 에로스(Eros)에 가깝다. C. G. Jung, Aion: Researches into the Phenomenology of the Self, trans. R. F. C. Hull, London, 1974a, 27.
21) C. G. Jung, Aion: Researches into the Phenomenology of the Self, 31~32.



III. 융의 분석심리학에 근거한 ‘화해’의 문제 해명


1. 의식과 무의식의 화해


융에게 있어서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을 포함한 정신과정 전체를 의미한다. 정신을 구성하는 의식과 무의식은 대립하면서도 상호 보완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사실 우리는 의식이 무의식에서 극히 최근 분화되어 나온

산물임을 인류학의 도움을 빌어 알 수 있다.22)


의식과 무의식은 대립적이면서도 상호 보완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의식과 무의식이 과연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아보자.23)

융에 의하면 의식의 중요한 작용에는 인식, 분화, 통합이 있다. 의식은 외부 상황을 파악하여, 그 상황에 적응하도록 하고(인식 작용), 또 의식은 인식의 내용을 서로 구별 짓고 분화시키며(분화 작용), 더 나아가 의식은 인식과 분화를 통해서 우리 정신에 주어지는 모든 것들을 통합하여 상황에 더 잘 적응하게 한다(통합 작용). 한편 무의식의 중요한 작용은 투사(Projektion)인데, 의식되지 않은 무의식의 어떤 내용이 우리 안에 은폐되어 있을 때, 그것을 조금이라도 보이는 사람에게 쏟아 붓는 것이다. 가령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식이다. 그런가 하면, 무의식은 자아를 위협하는 내용을 의식에서 몰아내는데, 성욕, 공격욕 같은 감정이 대표적이다. 더 나아가 무의식은 의식이 어느 한 요소에 과도하게 집중할 때, 정신의 전체적인 균형 유지차원에서 그 반대되는 요소를 강화시키는 보상작용을 한다.

끝으로 무의식은 의식에 대해 자율성을 지니고 있어서, 의식과 무관하게 작용할 수 있다.


특히 무의식과 의식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대극(Gegensatz)의 관계이다.
대극(대립)은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법칙”이며, 이것이 없이는 어떠한 균형도 없고, 자기 조절 체계라 할 수 없다. 우리의 정신에는 대극의 원리가 지배하며, 이를 토대로 자기 조절하는 체계로서 기능한다.24)

개인무의식이든 집단무의식이든, 무의식의 요구와 의식의 요구는 대극 관계에 있으며, 상보적인 조화로서 화해가 요구되는 대목이다. 우리의 삶은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하는 역사라는 점에서 무의식의 의식화는 무의식과 의식의 화해를 지향한다.


22) J. Jacobi, The Psychology of C.G. Jung: an introduction with illustrations, 19~21.
23) 김성민, 『분석심리학과 기독교』, 학지사, 2001, 28~29.
24) C. G. Jung, Two Essays on Analytical Psychology, 61.



2. 자아와 그림자의 화해


‘자아’와 ‘그림자’도 대극의 관계에 위치한다. 대체로 자아는 긍정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비해, 한 사람의 정신에 속해 있지만 자아에 담겨지지 못한 내용들은 그림자가 된다.

무의식 속에 있는 그림자는 ‘또 다른 나’ 이자 ‘검은 형제’이다. 때문에 자아와 그림자는 서로 대립하지만 서로 보완되지 않을 경우, 정신건강에 심각한 적신호가 오게 된다.


의식의 중심으로서 자아는 대체로 긍정적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자아 이상(ego-ideal)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의 정신 내용 가운데서 열등하고 부정적인 요소들을 자아에서 몰아낸다. 이렇게 한 사람의 정신을 구성하고 있지만 자아에 포함되지 못한 내용은 “그림자(shadow)”가 된다.

무의식 속에 있는 그림자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고, “또 다른 나(alter ego)”이며, 그 실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검은 형제(dark brother)”이다.25)

다시 말해서 의식수준에서 열등하고 부정적으로 간주된 내용들을 우리 자신의 인격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그 내용들은 개인 무의식 수준에서 그림자가 되고, 그렇게 되면 자아가 그림자를 통제하기가 어려워진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아벨과 가인, 콩쥐와 팥쥐, 흥부와 놀부,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텔레스 등의 예시된 각 쌍에서 후자는 전자의 그림자이다. 그런데 그림자를 그 자체로 열등하고, 부정적인 것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사실 그림자 없는 존재란 죽은 자이다. 오히려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대부분의 그림자는 그에 대한 의식화 및 체험적 수용을 통해 창조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그림자를 미워하고 부정할게 아니라 그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림자의 부정적인 특성은 얇아지고, 우리의 인격(personality)은 그만큼 풍요로워질 수 있다.26)


융의 그림자 개념 및 그림자의 수용 문제는 니체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그림자’)에서 부정하고 싶은 “또 다른 나”인 “그림자”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용서하라.” 그림자가 대답했다.

 “내가 그대의 그림자인 것을. 내가 그대마음에 들지 않아도 좋다.

 [···] 나 바로 그 때문에 그대와 그대의 훌륭한 취향을 찬미하고 있으니. 나는 줄곧 그대의 발꿈치를 쫓아다닌 방랑자다. 나는 목표도 돌아갈 고향도 없이 허구한 날 방랑을 해 왔다.

[···] 나 그대의 최선의 그림자였다.

[···] 내게 어떤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나 금지된 것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리라.27)


같은 책에서 니체는 그리스도교의 ‘이웃 사랑’의 가르침이 범할 수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네 몸을 사랑하라’는 것이 우선한다고 말한다.28) 이에 대한 융 세미나의 논의에 따르면 우리는 흔히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에서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림자로 은폐된 자신을 수용하고 통합하는 것은 이웃 사랑을 위한 출발점이다. 그러니까 자신을 사랑하는 것, “자신 안의 형제(즉, 그림자)”를 사랑하는 것은 생물학적 진실이자 생존의 법칙이다.29)


25) J. Jacobi, The Psychology of C. G. Jung: an introduction with illustrations, 126/128.
26) 이부영, 『분석심리학: C. G. Jung의 인간심성론』, 일조각, 2002, 71~80.

27) F. W. Nietzsche, 정동호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05,449~450.
28) F. W. Nietzsche, 정동호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웃 사랑에 대하여’, 101~103.
29) J. L. Jarrett(ed. & abr.), Jung’s Seminar on Nietzsche’s Zarathustra, Princeton, 1998, 354.



3. 페르조나와 아니마․아니무스의 화해


우리의 정신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 가운데 페르조나와 아니마․아니무스도 대극의 관계에 있다.

페르조나(persona)는 자아가 외부세계와 적응하는 데 필요한 사회규범과 행동양식을 체득함으로써 형성된 ‘외적 태도’이다. 이에 비해 아니마․아니무스는 자아와 내면(무의식)의 세계와 접촉을 중재하는 ‘내적 태도’이다.30) 페르조나는 타인의 역할기대에 충실한 일종의 사회적 자아라고 한다면 아니마․아니무스(anima·animus)는 내면의 소리(소명)를 실어 나르는 영혼의 인도자이다.

우리는 페르조나만으로는 고유한 인격, 즉 개성화(individuation)의 길로 나아갈 수 없다. 때문에 내면의 요구를 매개하는 아니마․아니무스의 인도를 받을 필요가 있다.


페르조나는 본래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한 사람이 사회생활을 할 때, 사회에서 그가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역할기대를 의미한다. 페르조나는 자아와 사회 간의 타협의 소산
이다. 한마디로 사회화의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며, 사회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페르조나는 외부세계와의 자연스러운 관계를 촉진하는 하나의 부드러운 보호막이다. 때문에 건강한 페르조나는 내면세계와 외면세계 사이에서 보호장치(protector)이자 의사소통의 조정자(regulator)로서 기능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화의 과정에서 형성된 페르조나와 그 페르조나를 가진 사람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페르조나는 ‘어떤 사람이 무엇으로 보이게 하는 것’으로서 가상(Shein, 假像)이자 가면(Maske)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일종의 자아의 이상(Ideal) 내지는 원망(願望)의 심상과 친화력이 있다.31)


한편 아니마․아니무스는 우리 정신 안에서 자아를 집단 무의식의 이미지와 매개하여 자아가 의식세계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정신의 전체적이고 전일적인 통합을 지향하도록 하며,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게 한다.

융은 아니마․아니무스를 개성화의 과정에서 무의식의 인격화를 촉진하는 영혼의 인도자(psychopompos)32)이자 매개자(mediator)로 간주한다.33)

아니마(anima)가 남성 안에 존재하는 여성적 심상으로, 아니무스(animus)는 여성 안에 존재하는 남성적 심상으로 드러나는 일종의 원형이다. 아니마·아니무스는 인류가 지금까지 이성과 관계를 맺은 흔적들이 누적되어 기본 틀이 형성되었고, 이 토대 위에 개인이 성장하면서 이성 부모 및 사회에서 접촉하는 이성에 관계된 내용들을 통해서 기능하게 된다.


남성의 아니마는 기분, 반응, 충동 등의 선험적 요소이고, 여성의 아니무스는 행위, 신앙, 열망의 요소이다. “아니마가 삶 자체의 원형인 것과 마찬가지로, 아니무스 뒤에는 의미의 원형이 놓여있다”고 융은 단언하였다.34)


아니마와 아니무스 모두 낮은 단계에서는 생물학적, 육체적, 본능적 특성이 우세하지만 높은 단계에서는 고귀한 “지혜”를 상징하거나 혹은 “의미”의 화신으로 부각된다.35) 아니마․아니무스는 영혼의 인도자로서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개자이고, 무의식을 인격화하는 역할을 한다. 소크라테스가 귀 기울였던 내면의 다이몬의 소리는 높은 단계의 아니마로서 지고지순한 지혜로 간주될 수 있다.


30) 이부영, 『분석심리학: C. G. Jung의 인간심성론』, 82~83.
31) J. Jacobi, The Psychology of C. G. Jung: an introduction with illustrations, London, 1951, 33~36; 진교훈/윤영돈, 「융 심리학의 인간학적 함의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사대논총』, 제66집, 2003, 85.
32) 그리스어 psychopompos는 영혼을 의미하는 psych?와 전달자․나르는 자를 의미하는 pompos의 합성어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헤르메스나 무속신앙에서의 샤만(shaman)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저승에 갖다 오거나 죽은 이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자이다.

33) C. G. Jung, Aion: Researches into the Phenomenology of the Self, 16.
34) A. Samuels/B. Shorter/F. Plaut, 『융 분석 비평 사전』, 민혜숙 옮김, 동문선, 2000, 41. 아니마․아니무스의 분화와 통합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윤영돈/최순옥, 「융의 개성화 과정에서 사랑의 문제」, 한국윤리학회, 『윤리연구』, 제117호, 2017, 58~62 참조.
35) M. L. von Franz, 「개성화의 과정」, 『인간과 상징』, 이윤기 옮김, 열린 책들,1996, 185/194.



4. 동서양 사유방식 간의 화해36


대극의 합일은 정신을 구성하는 요소들 간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사유방식 사이에도 적용될 수 있다. 현대 서구인들은 기능주의와 합리주의에 과도하게 경도되어 있어 직관적이고 전일적인 사유능력이 결핍될 경
우, 서구 문명의 그림자를 해소할 수 없다는 점에서 동서양의 사유방식 또한 화해가 요구되는 대극 관계라 할 수 있다.


융은 현대인이 심리적으로 아파하는 이유를 현대 사회의 토대가 되는 사상에서 찾고 있다. 특히 과거 원시인들에게는 발생하지 않았던 신경증이 현대인들에게 만연하는 요인을 기능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태도, 인과론적 사고 및 이분법적 태도 등에서 찾았다.37)


부연하자면, 첫째, 현대인들의 기능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태도가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신비나 마력을 제거해 버렸다는 것이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현대인의 사유에는 탈신성화가 급격하게 감행되었다.

이는 니체의 절규처럼, 과학정신에 근거한 “신화의 상실”은 다름 아닌 “고향의 상실이자 영혼의 굶주림”을 유발한다.38) 중세까지는 자연과 신성함(누미노제)이 결합되었으나 근대 이후 이성의 여신을 힘입어 자연을 정복했다. 융은 이것이야 말로 현대사회의 비극으로 보았다.39)

융은 합리주의적이고 기능주의적 태도가 인간의 전모를 규명할 수 없다고 보았다. 과학정신만을 충족시키는 심리학은 인간의 심연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은 그 마음의 총체적인 본성을 드러내고자 하므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마음의 전체상을 해명할 수 있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보았다.40)


둘째, 현대인에게 발생하는 신경증의 또 다른 요인으로 이분법적 태도 및 인과론적 사고가 있다. 근대 이후의 세계상은 데카르트의 이원론 및 뉴턴 물리학에 의해 규정되었는데, 이러한 영향으로 현대인은 이분법적 태도 및 인과론적 사고에 익숙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분법적 태도 및 인과론적 사고는 ‘인간 정신의 목적과 의미 추구’라는 지향성(志向性)을 위축시키고 왜곡시켜 왔다.41)

융에 따르면 현대인은 선악의 철저한 구분 및 흑백논리의 대립 구도에서 중간 지대 없이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는 내면을 억압하는 강요와 압박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사회적 관계 및 역할에 따라 조형된 사회적 자아로서의 페르조나와 모순되는 자기 내면의 그림자를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고, 그 그림자를 은폐하려 한다는 것이다.42)

사실 인간은 선과 악을 동시에 말하는 자이며, 이러한 선악의 대극성에 대한 인식 가운데 선에 대한 지향성과 악에 대한 극복이 온전하게 구현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융은 서구적 관점과 사고방식에서 초래된 현대인의 신경증을 해소하고, 서구 문명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해소하는 데 요청되는 전일적 관점(holistic world-view)을 지향한다.

융은 전일적 관점에서 정신과 물질, 의식과 무의식, 사고와 감정, 선과 악, 동양적인 사유(직관적이고 종합적인 사유)와 서양적인 사유(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사유) 간의 화해를 시도한다.

이처럼 동서양의 사유방식 간의 대극의 쌍은 대립하면서도 상보적인 것으로 합일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된다.43)


36) 윤영돈/최순옥, 「융의 개성화 과정에서 사랑의 문제」, 53~55를 재구성함.

37) 진교훈/윤영돈, 「융 심리학의 인간학적 함의에 관한 연구」, 77~78.
38) F. W. Nietzsche, Die Geburt der Trag?die aus dem Geiste der Musik(1886), 9.
39) C. G. Jung, 이윤기 옮김, 「무의식에의 접근」, 93~94, 101.
40) C. G. Jung, Two Essays on Analytical Psychology, 119.
41) J. J. Clarke, In Search of Jung: Historical and Philosophical Enquiries, 119.

42) C. G. Jung, Two Essays on Analytical Psychology, 83.
43) J. J. Clarke, In Search of Jung: Historical and Philosophical Enquiries, 170~180.



Ⅳ. 융의 분석심리학에 근거한 ‘용서’의 문제


앞서 우리는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상반되는 것의 화해의 문제를 자신의 영혼을 구성하는 의식과 무의식, 자아와 그림자, 페르소나와 아니마·아니무스 간의 올바른 관계 정립에서 해소하고자 했다. 그런가 하면 동양과 서양의 사유방식 간에 있어서도 상반되는 관점이 노정되어 있는데, 반대의 합일(incidentia oppositorum, union of opposites)을 위한 ‘화해’의 문제를 중심으로 다루었다.


한편 신과 인간, 혹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는 이른바 고백으로부터 시작하여 용서로 귀결된다. 특히 용서의 문제는 심리학과 종교학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1. 무의식의 상징으로서 성서와 용서의 사례


용서의 문제는 무엇보다 신과 인간의 관계에 놓여 있고, 신과 인간 혹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를 통해 해명될 수 있으며, 최종적으로는 인간간에 해소되어야할 실천적 과제이다. 물론 신과 인간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
의 관계와 등가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향한 신의 용서가 무한하다면, 인간을 향한 인간의 용서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융은 성서를 무의식을 드러내는 수많은 상징들로 가득 찬 영혼의 책으로 간주한다. 때문에 무의식을 표출하고 있는 상징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때, 치유와 삶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보았다.44)

 ‘상징’을 의미하는 독일어(“Sinnbild”)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로서의 “의미(Sinn)”와 비논리적이고 상징적인 “심상(Bild)”이 혼합되어 있다. 때문에 성서를 지나치게 합리적 관점에서 바라볼 경우, 상징적 의미를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45)


성서는 이 세상을 살아왔던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욕망과 삶이 담겨진 기록이며, 우리가 매일 씨름하며 살아가는 삶의 기록이기도 하다. 인간의 무의식적인 욕망과 삶을 표현하는 성서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은 1970년대 말
부터 시작되었다.

롤린스(W. G. Rollins)에 따르면 성서를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연구할 경우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첫째, 종교적인 진술이 인간 무의식의 심층에서 나오는 무의식적인 진술과 깊이 관련되어 있으므로 심리학적 접근은 매우 적합한 방법론이 될 수 있고,

둘째, 이와 연장선상에서 인간 정신의 심층을 다루는 심리학은 영혼의 책인 성서연구에 적합하며,

셋째, 성서 기자의 개인적 무의식은 물론이고, 그가 살던 시대의 상황적인 특성에서 파생된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들을 파악할 수 있으며,

넷째,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게 하는 문서이므로 상징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게 할 수 있다.46)


융은 성서를 무의식을 드러내는 수많은 상징들로 가득 찬 영혼의 책으로 간주한다. 때문에 무의식을 표출하고 있는 상징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때, 치유와 삶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보았다.47) 꿈은 무의식의 대
표적인 상징이다.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무의식의 세계는 주로 꿈으로 표현된다. 창세기에 나타난 한 족장으로서 요셉은 형제들에 의해 붙여진 별명처럼 “꿈꾸는 자”48)였다. 무의식을 드러내는 상징으로서 ‘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창세기 37장에는 꿈꾸는 자 요셉의 내러티브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17세 소년이었던 요셉은 두 가지 꿈을 꾸고 그 꿈을 형들에게 자랑함으로써 형제들의 미움과 시기를 받았다.

꿈 하나는 요셉의 곡식 단은 일어서고 형제들의 곡식 단은 요셉의 단을 둘러서서 절하는 것이었고, 다른 꿈은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것이었다. 결국 형제들의 미움과 시기를 받고 요셉은 애굽(이집트)에 팔려갔다.


청소년기의 요셉이 ‘꿈을 꾸는 자’였다면 청년기에 들어서 요셉은 ‘꿈을 해석하는 자’였다. 감옥에 갇힌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의 꿈을 해석했고, 이를 계기로 바로(파라오) 왕의 꿈까지 해석하기에 이른다.

요셉은 꿈 때문에 형제들의 시기를 받아 애굽에 팔려갔고, 애매하게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갔으나 꿈을 해석하여 감옥에서 나갈 수 있었고, 바로왕의 꿈을 해석하여 7년간 풍년과 그 후 7년간의 흉년을 효과적으로 대처하게 함으로써 애굽의 총리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유다의 내러티브를 표현하고 있는 창세기 38장을 제외하고, 창세기 37장으로부터 50장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꿈”을 매개로 한 요셉의 내러티브가 전개되고 있다.


아니마‧아니무스는 자아를 무의식의 내면세계로 이끄는 영혼의 인도자(spirit guide)로서 무의식의 의미를 추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궁극적으로 영혼의 인도자인 아니마‧아니무스는 정신의 중심인 ‘자기’에게로 인도하는 내적 인격이다. 요셉의 아니마와 관련된 사건들을 살펴보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으나 요셉은 자신의 아니마를 그 여인에게 투사하지는 않았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자신의 아니마를 구별해 간 것으로 보인다.49)

요셉은 애매하게 감옥에 갇혔지만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고, 사람들로부터 은혜를 입었다. 특히 요셉의 아니마는 꿈이 지닌 의미를 해석하는 데 활성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남성의 무의식 가운데 아니마는 남성성(합리성, 논리성, 개별성)을 보완해 주는 여성성(직관성, 수용성, 관계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 부르심을 듣고, 꿈을 해석하는 정신의 활동은 ‘지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는 아니마의 중요한 특성으로 볼 수 있다.


‘자기’는 기독교적 의미에서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God within us)”이 드러나는 곳으로서 일종의 지성소에 비견할 만하다. 한 마디로 자기는 우리 삶의 궁극적인 방향과 목적을 규정하는 형상이자 원형이다.

우리는 요셉의 자기 인식의 깊이를 그의 형들이 자신을 애굽의 노예로 팔았던 사건에 대한 새로운 통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형들에 의해 애굽에 팔린 것이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이스라엘(과 더 나아가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시고자 먼저 자신을 애굽으로 보낸 것이다. 요셉은 자신을 애굽으로 보낸 것은 바로 하나님이라 고백한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50)"


요셉은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신적 소명과 부르심에 순종했고, 자신을 애굽에 팔았던 형들의 악을 하나님의 선으로 용서할 수 있었다. 창세기 요셉 내러티브에 따르면 가해자인 형제들을 피해자인 요셉이 일방적으로 용
서한 것은 아니다. 요셉은 오랜 기다림의 과정에 있었고, 애굽으로 곡식을 찾아 떠나온 형제들이 동생 요셉에게 범죄했던 것을 상기할 수 있는 세밀한 계획을 세워서 실행했으며, 고백하고 용서를 선포하고, 화해와 연합의 길로 나아갔다.51) 요컨대 창세기 요셉 내러티브에 나타난 용서의 문제는 무엇보다 이스라엘을 향한 신의 섭리를 요셉이 자각하는 데서 출발하고, 요셉이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데서 해명되며,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는 실천적 태도 속에서 해소됨을 알 수 있다.


44) W. G. Rollins, Jung and the Bible, Atlanta, 1983, 94~97; 김성민(2001), 238.
45) J. Jacobi, The Psychology of C. G. Jung: an introduction with illustrations, 114.
46) W. G. Rollins, Jung and the Bible, 57. F. Dolto, M. Balmary, L. Basset, G. Theissen 등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바탕으로, G. W. Rollins, W.Wink, A. Kille, E. Edinger 등은 융의 분석심리학을 바탕으로 성서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W. G. Rollins, “Psychology, Hermeneutics, and the Bible”, D. L. Miller, Jung and the Interpretation of the Bible, NY, 1995, 13; 김성민, 『분석심리학과 기독교』, 236에서 재인용

47) W. G. Rollins, Jung and the Bible, 94~97; 김성민, 『분석심리학과 기독교』, 238.
48) 창세기 37: 19.

49) 창세기 39: 9.
50) 창세기 45: 5~8.

51) 요셉 내러티브에 나타난 용서와 화해의 길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김재구, 「용서와 화해의 목회적 모델로서의 요셉 이야기」, 『한국기독교신학논총』, 제73집, 2011, 38~46 참조.



2. 고백으로부터 용서에 이르는 상징체계: 고해성사 모델과 심리상담 모델


근본적인 치유와 회복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발견된다. 왜냐 하면 삶은 궁극적으로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성스러움(누미노제)에 대한 접근이 본래적인 치료법이며, 누미노제를 체험할 때 질병의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52)


용서 역시 종교적인 관점에서 해소될 수 있다. 용서의 문제는 무엇보다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일차적으로 해명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면서 탈신성화의 과정이 가속화되었고, 용서의 문제는 신과의
관계로부터 삶의 영역의 합리화에 입각하여 인간 간의 관계영역으로 전환되었다.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성직자와 신자의 관계에서, 더 나아가 상담가와 내담자의 관계에서 대화는 “치료의 요소일 뿐만 아니라 구원의 요소” 이며, 인간의 실존을 드러내 주는 매개이다.53)

여기서 연구자는 대화 중에서도 용서를 구하기 위한 고백 내지 억압된 내면의 고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용서(forgiveness)의 문제는 고백(confession, 고해)으로부터 비롯된다. 죄를 범한 사람은 죄책감에 시달리기 마련이고 이로 인한 불편함과 자신 및 타인으로부터의 소외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때문에 ‘범죄 → 죄책감 → 고백→ 용서’는 인류의 삶 가운데 누적된 원형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연구자는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고백과 용서의 문제와 관련하여 토드(Elizabeth Todd)의 논문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54) 고백과 용서는 인간 삶의 근본적인 관계를 구성한다. 특히 융에게 있어 고백과 용서의 개념
은 심리학과 종교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다.55) 먼저 고백이라는 말은 신 혹은 인간에게 범한 죄에 대한 시인을 의미한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1장 8-9절에는 고백이 신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으로 제시되고 있다.56) 고백은 상당한 안도감과 함께 인간 공동체 안으로 길 잃은 양이 다시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57)


고백과 용서의 원형은 신과 인간 사이에 있다. 그런데 가톨릭의 고해성사에서 엿볼 수 있듯이, 교회에 의해 권위가 부여된 고해신부(father confessor)와 고백자(patient) 간에 형성된 도덕적 결속은 신과 인간 사이의 원형에 대한 “전이 관계(transference relationship)”이다.58)


공적인 것이든 사적인 것이든, 무의식적인 비밀이나 은폐된 것은 언제나 심리적 독소로 작용하고, 공동체로부터 행위자를 소외시킨다. 그것은 일종의 “그림자”인 셈이다.

 “우리(자아)와 그림자 사이의 심연에 다리를 놓는 것은 다름 아닌 “고백”이다. 그러니까 고백이란 은밀한 자아, 즉 우리 자신의그림자를 직면하고, 그것을 의식화하고, 올바르게 한다.59)


가톨릭은 신 앞에서 범죄한 인간의 고백과 신의 용서에 비견될만한 고해성사라는 상징체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고백과 용서가 가져다주는 심리적 안도와 정서적 평화의 효과가 개신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현저하다. 물론 개신교의 경우, 교회가 용서를 선포하기보다 신 앞에 홀로 나아가 죄의 문제를 고백해야 하지만 쉽지 않은 과정이다. 오히려 개인이 회중 앞에서 고백(간증)을 하고, 회중은 마치 고해신부처럼 그 고백을 듣고 수용하고 용서하며, 그 고백한 개인을 공동체의 온전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60)


토드에 따르면 고백과 용서의 상징체계는 상담가(심리치료사)와 내담자간의 관계에서도 반영된다. 영혼의 의사로서 상담가는 내담자로부터 자발적으로 고백을 이끌어냄으로써 억압된 무의식적 요소를 의식화하도록 촉진한다는 점에서 상담가는 사제와 공동체를 대신할 수 있다.61)

사실 고백과 용서의 상징체계는 고해신부와 고백자의 관계는 물론이고, 상담가와 내담자의 관계에도 반영되어 있다.62) 그런데 상담가의 역할은 전문적 상담가 이외에도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는 점에서 영혼에 대한 돌봄과 염려라는 실천적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이렇게 보면 고백과 용서의 문제는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실천적 과제인 것이다.


52) C. G. Jung, Psychology and Religion, trans. R. F. C. Hull, New York, 1989, 334.
53) 진교훈, 『의학적 인간학: 의학철학의 기초』,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45.

54) E. Todd, “The Value of Confession and Forgiveness According to Jung”, Journal of Religion and Health, Vol. 24, No.1, 1985, 39.
55) E. Todd, “The Value of Confession and Forgiveness According to Jung”, 39.
56) “If we say that we have no sin, we deceive ourselves, and the truth is not in us.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to forgive us our sins, and to cleanse us from all unrighteousness.”(1John1:8-9, KJV)
57) E. Todd, “The Value of Confession and Forgiveness According to Jung”, 42.
58) E. Todd, “The Value of Confession and Forgiveness According to Jung”, 42.
59) 융은, ‘영혼에 대한 돌봄과 염려’를 철학함의 과제로 삼았던 소크라테스처럼 자신을 ‘영혼의 의사’로 자처하면서 ‘아파하는 인간’을 위한 정신요법을 탐구하였다. 융이 설정한 삶의 목적은 내담자의 존엄성과 가능성을 신뢰하고, 내담자가 자신의 삶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었다. E. Todd, “The Value of Confession and Forgiveness According to Jung”, 44.
60) E. Todd, “The Value of Confession and Forgiveness According to Jung”, 46; J. L. Jarrett(ed. & abr.), Jung’s Seminar on Nietzsche’s Zarathustra, 186.
61) E. Todd, “The Value of Confession and Forgiveness According to Jung”, 46.
62) 융은 이론적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내담자를 무려 10년 동안 돌본 적이 있다. 내담자를 향한 무한한 신뢰를 기반으로 시행한 치료과정에서 그 내담자는 자신의 신경증을 해결하였다. C. G. Jung, 이윤기 옮김, 「무의식에의 접근」,65.



Ⅴ. 결론


화해와 용서의 문제는 종교적 성격이 짙은 논제이다. 인간을 근본적으로 ‘종교적 인간’으로 규정하는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화해와 용서의 문제는 심리학과 종교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해명된다.


헤라클레이토스적 세계관은 융의 분석심리학의 모델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헤라클레이토스가 제시한 대립되는 것 간의 자기조절 기능으로서 ‘에낭티오드로미아’는 심층심리학의 근본원리이다.

화해란 대립되는 것 간의 적절한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할 때, 대극의 합일은 화해의 원리이며, 무엇보다 대극의 합일은 ‘자기’에서 비롯된다.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화해의 문제는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에서, 자아와 그림자의 관계에서, 페르조나와 아니마․아니무스의 관계에서, 더 나아가 동서양 사유방식 간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용서의 문제는 고백으로부터 용서에 이르는 상징체계로 고해성사 모델과 심리상담 모델을 통해 논의하였
다.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는다는 것은 정서적․사회적 건강에 긴요하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차원의 폭력이 노정되어 있다. 학교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언어폭력, 사이버폭력, 집단따돌림, 구조적․제도적 폭력 등이 만연해 있다. 어른뿐만 아니라 청소년도 어린이도 폭력의 피해자가 될 뿐만
아니라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폭력의 가해자라는 불편한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인간은 선과 악을 동시에 말하는 자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그림자를 자신의 빛과 동시에 볼 수 있는 사람은 양극단의 중도로 나아갈 수 있다.”63)

그러니까 자기 내면에 드리워진 그림자, 어두움, 악의 요소에 민감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폭력에 가담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기가 속한 그룹 혹은 이해관계로 맺어진 집단의 분위기(문화)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어떤 피해자에게 집단적으로 폭력을 가하는 행위에 대해 그 집단에 속한 누군가가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아!’라고 문제제기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대체로 인습에 속한 규범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인습으로부터 벗어나 우리 내면의 요구를 따르는 것은 모험이고, 용기가 필요하다.원적인 ‘자기’로부터 들려오는 내면의 소리(vocation)는 “인습으로부터의 해방(deliverance from convention)”을 촉구한다.64)  자기(Selbst)로부터 기인하는 조건 없는 화해와 용서는 ‘불가능한 가능성’이지만 우리가 수행해야 할 실천적 과제가 아닐까.


63) C. G. Jung, “Good and Evil in Analytical Psychology”, trans. R. F. C. Hull, Civilization in Transition, Princeton, 1978, 463.

64) C. G. Jung, The Development of Personality, trans. R. F. C. Hull, New York, 1981, 174~175.



참고문헌


김성민, 『분석심리학과 기독교』, 학지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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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Reconciliation and Forgiveness in the Perspective of Jung’s Analytic Psychology


Yoon Young-Don

(Incheon National Univ.)


The issues of reconciliation and forgiveness are related with a religious theme. In Jung’s analytic psychology which considers human as homo religiosus, the problems of reconciliation and forgiveness are explained to the point of the intersection of psychology and religion. With a view to discussing the problems of reconciliation and forgiveness, First, I will delve into the concept of Heraclitus’ union of opposites which is the basis of the principles of Jung’s psychology. Next, I will deal with reconciliation as appropriate balance between the opposites such as consciousness and the unconscious, ego and shadow, persona and anima․animus, and Eastern & Western thoughts as well. Finally, I will scrutinize the implications of the archetypical forgiveness which is shown in Joseph Narrative of Genesis, and explore the model of confession and psychological counseling as a kind of symbol system from confession to forgiveness, and request forgiveness as a practical task.


Key words: Jung’s Analytic Psychology, Reconciliation, Union of Opposites, Heraclitus, Joseph’s Narr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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