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예수 그리스도의 삶 (1)
3. 갈릴리의 어부들 (4)
♣ 4단계 여행 : 예수님과의 일치
선문답(禪問答) 중에 영양괘각(羚羊挂角)이라는 화두가 있습니다. 영양은 잠을 잘 때 뿔을 나뭇가지에 걸고 잔답니다. 영양의 뿔이 나뭇가지처럼 구불구불해 걸고 자면 아무도 거기 영양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인데, 사나운 짐승들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보호책이지요. 선(禪)에서는 영양의 이런 모습을 종적이 사라진 경지, 즉 진리의 상징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게도 같은 상징성이 성경 안에서도 발견되는데, 바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에서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아흔 아홉에 하느님의 점지로 아들을 하나 얻습니다.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라 애지중지하며 길렀는데, 어느 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사랑하는 아들 사이에서 번민하지만 결국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아들을 포기하기로 작정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데리고 모리야에 있는 산으로 올라갑니다. 산 정상에 도달한 아브라함이 장작에 불을 지펴놓고 아들을 묶은 다음 막 칼로 치려는 순간, 하느님의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의 손을 잡고 말립니다. 그리고 천사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 아들을 바치라고 하신 것이라며 자초지종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아들 대신 바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해두신 다른 제물을 보여줍니다. 바로 덤불에 걸려 허우적대는 영양을 가리켜 보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영양을 아들 대신 잡아 바칩니다.
영양은 아브라함이 산 위에 올랐을 때 이미 거기 있었지만 아브라함의 눈에 띄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몰종적(沒蹤跡)한 진리의 자태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천사가 눈을 열어주자 그때서야 뿔을 덤불에 걸고 자던 영양이 눈이 들어온 것입니다.
몰종적은 진리의 자태입니다. 선에서는 종적이 사라진 행위를 무공용(無功用)적 행위라고도 하며 최고의 행위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몰종적한 행위는 곧 부처의 행위이며 곧 깨달은 사람의 행적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에피소드가 가리키는 바는 같은 것인데,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몰종적한 진리의 자태를 발견하는 것이고 거기에 인간의 구원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 안에 몰종적하게 계시는 영양입니다. 덤불에 뿔을 걸어 잠을 자고 있는 영양인 것입니다.
예수를 발견하면 아들이 살고 발견하지 못하면 아들을 죽여야 하는 진퇴양난에 처한 아브라함의 처지는 사실 알고 보면 모든 인간의 처지라는 것입니다. 아들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 곧 자기중심적인 것을 의미하며 그것을 바치라는 뜻은 자기중심으로부터 해방되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그러나 자아를 포기하기란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는 아픔에 비유될 만큼 괴로운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덤불이란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온갖 근심 걱정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는 그것과 하나가 되어 모습을 거기 감추고 계신다는 것이지요. 결국 예수를 찾으려면 덤불을 뒤져야 하는 것입니다. 숨은 그림 찾기 하듯 덤불을 새롭게 보는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덤불만 보이지 영양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덤불에 걸려 허우적대는 영양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아무도 영양을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이고 또 그때까지 아브라함의 시련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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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예수를 발견하기까지 밤새 고생하며 그물을 던져야 했습니다. 그는 고기를 많이 잡는 것이 어부인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고기가 잡혔는데도 결국 배를 놔두고 예수를 따라나섭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까? 고생고생 하다가 이제 막 성공했는데 그 성공을 나 몰라라 하니 말입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바로 몰종적 행위입니다. 우리 눈에는 어리석은 행위로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의 행위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 있는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며 예수를 발견하게 되면 나머지는 관심이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바울로의 말처럼 그리스도를 알고 나니 모든 것이 쓰레기로 여겨지게 된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배에 타고 계셨으며 고기잡이가 성공을 거두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셨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베드로는 전혀 몰라봤지요. 그러다가 고기가 무지하게 잡히자 그때서야 눈이 뜨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덤불에 뿔을 걸고 자고 있던 영양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어부인 자신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베드로가 어부라는 자아를 떠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고기가 아닌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변화한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부이기는 마찬가진데 목표가 바뀐 것이지요. 여기에 나를 따르라는 뜻이 있습니다. 삶의 형태는 달라졌지만 본질에서는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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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당신의 삶 안에 뿔을 걸고 자고 있는 영양을 발견해 볼 때입니다.
이번 관상은 앞서 한 관상을 되풀이하는 관상입니다. 되풀이 묵상은 앞선 관상처럼 줄거리를 따라 하나하나 재현하는 관상이 아니라, 앞선 관상을 통해 나에게 좀 더 감명 깊게 와 닿은 부분에만 집중적으로 머물러서 음미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징검다리를 건너듯 건너 뛰며 머물 곳에만 머물기 때문에 이번 관상은 징검다리 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 관상은 한밤중에 한 번, 새벽에 한 번 할 것을 권합니다. 한밤중의 일은 한밤중에, 새벽의 일은 새벽에 관상해보십시오. 관상에서는 관상하는 때가 중요합니다. 때로는 그 때에 맞춰서 관상할 때 관상의 효과가 더 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그리스도를 알고 나니 모든 것이 쓰레기로 여겨지게 된 것.....아멘!
저도 아브라함과 베드로의 믿음과 결단을 본받을 수 있기를, 제 삶 안의 무성한 검불 속에 몰종적으로 계신 주님을 발견하고 그분의 따라나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