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정리: 2006. 04. 30
06:00흥부골 자연휴양림-06:35망바위-07:00중근마을 갈림길-07:45인월 갈림길-07:50덕두산-08:00헬기장-08:35바래봉-09:10팔랑치-09:45부운치-10:25옛마을터-조식-11:15부운마을
나는 좀 더 빨리 집을 나서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수많은 역을 지날 때마다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던 나의 모습은 생각하기도 싫다. 허겁지겁 강남터미널 역에서 내린 시간이 밤 11시 56분. 나는 사력을 다하여 터미널까지 내달린 끝에, 12시 발 마지막 전주행 우등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음 날 집 근처에서 강남터미널까지 가는 직행 좌석버스가 있음을 알고 헛웃음을 지었다.
전주 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2시 20분. 40분 정도에 터미널에 도착한다고 L선생에게 전화는 했었다. 그냥 기다리기로 한다. 지나치는 택시들이 등산복 차림의 나를 보고 호객을 하나 묵묵히 무시한다. 하지만 L선생은 3시가 다 되어도 나타나지 않는다. 통화를 십여 차례 하였으나 연결이 되지 않는다. 초저녁부터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시다가 집에 돌아온 후 잠이 들었는데, 나의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한다. 아무튼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대리운전 기사를 동원해 나타난 L선생이 고마웠다. 전주에서 남원까지 핸들을 잡았다. 어둠을 뚫고 힘 좋은 수동 무쏘는 전주-남원 간 도로를 질주한다. 남원의 관문 춘향터널을 지나자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남원시청에서 남원O적을 만나 차량 1대를 부운 마을에 주차하고, 흥부골 자연휴양림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이 6시. 이제 날은 완전히 밝았다. 휴양림의 상쾌한 공기가 폐부속에 깊이 축적된다. 술에 떡이 된 L선생은 결국 산행을 포기하고 차 안에서 깊은 잠의 수렁에 빠져 버렸다. 오후에 대성식당에서 얼큰한 동태탕에 속을 풀기로 위로하고 남원O적과 함께 덕두산을 향한다.
휴양림에는 몇 동의 통나무 오두막이 있는데 곳곳에 주차된 차량이 있어 휴양림의 인기를 알 수 있다. 우리는 마지막 오두막에서 좌측 능선을 직접 치고 오른다. 이 능선은 중근 마을과 흥부골 자연휴양림을 가르는 덕두산의 가지 능선이다. 제법 가파른 된비알을 초반부터 차고 오른다. 새순이 톡톡 돋아나는 마른나무 가지들이 앞을 막고 있지만 산행에 장애가 되지는 못한다. 30여 분쯤 오르니 전망 좋은 망바위가 나타나 배낭을 내려놓고 땀을 식힌다. 북동쪽으로는 준봉의 삼봉산과 법화산 줄기가 보이고 지리의 동부 능선도 점차 보이기 시작한다. 지척에는 포근한 산내 벌판이 가깝다.
아직 등로를 만나지 않았으나 별 어려움은 없다. 아직 신록이 우거지지 않아 잔 잡목은 팔과 스틱으로 치고 나간다. 그동안 지리산행을 하면서 몸은 야생동물처럼 단단히 적응이 된 탓이다. 망바위를 떠난 지 잠시 후 중근 마을에서 올라오는 등로를 만난다. 비포장도로에서 고속도로를 만난 셈이다. 속도가 붙고 편안한 산행이 되었다. 오늘은 4월의 마지막 날. 내일부터 기다리던 지리산이 열리는 날이다. 아마도 노동절 휴일이라 많은 지리산꾼들이 입산할 것이다.
정남 방향으로 뾰족한 모습의 씩씩한 덕두산이 모습을 보인다. 부드러운 흙길을 따라 걸으며 지리산의 정겨움에 빠진다. 지리산 전문가 최화수 선생님은 십여 년 전. 운봉에서 덕두산에 이르는 이 길을 처녀의 속살처럼 깨끗하다고 했는데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은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삼십여 분 후 다시 수많은 표지기가 매달려 있는 구 인월마을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한층 더 가까워져 코앞에 보이는 덕두산을 십여 분 차고 오르니 곧 정상. 휴양림을 출발한 지 2시간도 채 못 된 시간이다. 덕두산 정상에는 바래봉 1시간, 인월 1시간 30분이라는 새로 만든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데 거리가 아닌 시간으로 표기한 것이 의문이다. 덕두산 헬기장에서 곱게 핀 할미꽃을 보았다. 반가웠다. 4년 전에도 비슷한 자리에서 할미꽃을 본 적이 있었다. 이제 지척의 바래봉까지는 지리산의 전경을 즐기며 걷는 즐거움이 있다. 희뿌연 황사의 심술에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좋다. 2개월 만에 찾는 지리산이라 마음은 더없이 기쁘다. 남쪽 능선에는 바래봉 정상과 누런 초지가 성큼 다가왔다. 지리산의 외곽지역인 서북능선. 이곳은 운봉 벌판서 불어오는 바람을 그대로 맞는다. 겨울철에는 눈이 많이 쌓이고 여름철에 비바람을 만나면 고행의 산행을 하게 된다.
오랜만에 바래봉에 올랐다. 강한 바람에 모자가 순식간에 멀리 아래로 날아가 버린다. 모자를 주우러 한참 다리품을 판다. 후드득 재킷을 때리는 바람을 맞으며 바래봉에서 지리산을 한없이 바라본다. 바람의 영향도 있지만 바래봉 주변은 큰나무는 없다. 과거 운봉 목장에서 초지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감시사에 내려서니 오늘도 어김없이 약수가 풍부하다. 바래봉 감시사는 면양 떼가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이 일대에서 자연 방목되는 기간 동안 국립종축원 직원이 기거하기 위해서 과거에 세워진 것이다. 서북 능선에는 물이 귀한데 지리산을 종주하는 산꾼에게 바래봉 샘물은 더할 수 없이 귀중하다. 수통에 가득 채운다.
앞으로 2주 후에는 바래봉 주변이 온통 곱게 핀 철쭉과 전국에서 몰려온 산님들로 붐빌 것이다. 지금은 꽃망울조차 열리지 않았다. 옥수수 알에서 팝콘이 터져 나오듯이 곧 바래봉의 현란한 철쭉은 사람들의 넋을 빼앗을 게 분명하다. 따뜻한 봄 햇살을 맞으며 팔랑치를 향한다. 남쪽으로 만복대와 노고단이 까마득하다. 스쳐 지나가는 젊은 산님과 가볍게 인사를 하고 4년 전에 쉬었던 그 자리에서 오늘도 휴식을 취한다. 팔랑치에서 부운치까지는 조금 고도를 높여야 한다. 산불 예방 기간에는 부운치로 내려서는 관문에는 늘 입산 통제를 알리는 조그만 현수막이 걸려 있었는데 오늘은 없다. 아마 내일부터 지리산이 개방되니까 철거가 되었을 것이다. 뒤를 돌아보니 두고 온 바래봉이 멀찌감치 뒤로 물러나 있다. 오늘 산행 종점인 부운치에서 내려선다.
서북 능선을 타다가 비상시 탈출하는 이곳은 그동안 산님들의 출입이 제법 있었든지 표지기가 많다. 눈에 익은 표기기도 보인다. 인터넷이 보급된 후 지리산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예전 같으면 낯선 길은 함부로 들지 못했었다. 인적 없고 희미한 길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제는 지리산 어디를 가더라도 다녀갔던 산님들의 숨결이 있다. 뚜렷한 길을 따라 내려가니 곧 작은 물줄기를 만난다. 조식은 더 내려가다가 옛 마을 터가 있는 물가에 앉아서 하기로 한다. 봄볕이 따뜻하다. 어디 평탄한 곳에 자리 잡고 누워 단잠을 즐기고 싶다. 컵라면에 김밥을 먹고 남원O적의 차량이 있는 부운 마을에 도착하니 오전 11시가 넘었다. 부운 마을에서 우리가 내려온 서북 능선을 바라보니 운봉에서 바라보는 것과 달리 드높다. 부운 마을은 팔랑 마을보다 아직 커다란 변화가 없었지만 곳곳에서 굉음을 내며 작업하는 굴착기의 모습을 보니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된 것 같다. 차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흥부골 자연휴양림에서 쉬고 있는 L선생을 찾아 떠난다. 오늘은 모처럼 느긋하게 남원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첫댓글 아~ 그리운 지리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