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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율곡의 석담일기
지은이; 이율곡
석담일기는 율곡 선생님께서 벼슬에 있으신 동안 우리나라의 중요한 사항, 왕께 진언한 내용, 그에 대한 답 등을 적어 놓으신 것이다. 그 당시의 중요 사항은 배경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어야 이해 가능하며, 축약시켜 뽑아놓으면 의미가 통하지 않는 것이 많으며, 왕께 진언한 내용도 철저히 살피지 않으면 그 가치를 알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내가 뽑아 놓은 부분들은 주로 이율곡 선생님이 우리가 잘 아는 화담 서경덕(徐敬德 1489~1546, 성종 20~명종 1; 송도 3 절(節), 황진이와의 관계를 생각할 것), 퇴계 이황(李滉 1501∼1570, 연산군 7∼선조 3), 남명 조식(曺植, 1501∼1572, 연산군 7∼선조5; "구름낀 볕뉘도 쬔 적이 없건마난, 서산에 해 지다하니 그를 설워하노라"), 토정 이지함 (1517∼1578, 중종 12∼선조 11; 토정 비결),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중종 22∼선조 5; 젊었을 때 퇴계와의 학문적 논쟁으로 유명함), 성혼(成渾 1535∼1598, 중종 30∼선조 31), 송강 정철(鄭澈 1536∼1593, 중종 31∼선조 26), 이산해(李山海 1539∼1609, 중종 34∼광해군 1), 서애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중종 37∼선조 40), 이발(李潑 1544∼1589, 중종 39∼선조 22) 등 여러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모은 것이다. 과거에 9 번 장원하시고, 여러 학문적인 업적을 남기신 율곡 선생님께서 거의 같은 시대에 사신 여러 뛰어난 분에 대해 평가하신 내용, 평가하는 논리, 그리고 방법을 살펴보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의 우리나라에는 뛰어난 인물이 많았었다. 본문에서 율곡 선생은 자신을 '이이'라고 3 인칭으로 표시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표현하고 싶으신 것이 주된 이유일 것이며, 또한 본인에게 칭찬이 되는 내용도 과감히 적을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에서는 시저(Caedar)가 '갈리아 전기'에서 동일한 어법(語法)을 사용하였다.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이이(李珥:1536~84)가 1565년(명종 20)부터 1581년(선조 14) 11월까지의 중요한 시사를 일기체로 기록한 책. 3권 1책. 필사본. 〈경연일기〉라고도 한다. 같은 내용의 4책 필사본 〈석담유사〉가 단행본으로 전하며, 〈율곡전서〉 권28~30에 〈경연일기〉라는 제명으로 전량(全量)이 들어 있고 〈대동야승 大東野乘〉 권14·15에는 〈석담일기〉로 표제되어 있다. 〈경연일기〉라고 하지만 경연에서의 강연보다는 당시의 주요쟁점과 정계 동향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여러 곳에 '근안'(謹按)이란 말로 평론을 붙였다. 사료적 가치로 볼 때 수록내용은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예제(禮制) 문제로 문정왕후(文定王后)·명종(明宗)·인성왕후(仁聖王后)의 상(喪) 등 여러 차례의 국상 기록에서 상의 과정과 조선 초기의 예제와 달라지는 부분에 대한 서술과 율곡의 평이 있다. 둘째, 소위 사림정권(士林政權)의 성립과 동서분당(東西分黨)까지의 정치사이다. 이 책은 문정왕후의 죽음과 윤원형(尹元衡)의 제거로부터 시작하는데, 율곡 자신이 이를 당시 정치사의 중요한 시점으로 파악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곧이어 명종의 죽음과 선조의 즉위, 훈구파와 궁정세력의 몰락, 조광조(趙光祖)의 추증(追贈)과 을사사화(乙巳士禍) 희생자들의 복권, 이후 선조대의 정국동향과 영남사림의 정계진출, 동·서인의 대립, 나중의 북인계열과 동인계열의 대립상, 사회문제에 대한 각 집단과 인물의 반응 등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밖에 이 기간 동안의 의정부(議政府) 구성과 대간직을 중심으로 한 중요 인사기록과 인물의 진퇴가 기록되어 있다. 또 이황(李滉)·이언적(李彦迪)·조식(趙植)을 비롯하여 백인걸(白仁傑)· 노수신(盧守愼) 등 당시 정계의 중요 인물에 대한 일화와 저자의 인물평이 상당수 들어 있다. 이상의 기사들은 다른 기록에서 찾아보기 힘든 내용들로, 여기에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다. 특히 서인이었던 율곡은 외척 세력과 함께 이황·이준경(李浚慶)·유희춘(柳希春)· 허엽(許曄) 등 동인계나 친 동인계 인사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폄하하는 평을 남기고 있다. 이는 당시의 정국동향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셋째로 16세기 각종 제도운영의 실제와 사회상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기록이 있다. 일례로 1577년(선조 10) 양전(量田)을 위해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려 했으나, 전직관원들이 모두 불응해 할 수 없이 충찬위(忠贊衛)와 녹사(錄事)로 충당했으며, 지방의 생원·진사들도 모두 도주·회피하여 결국 중지했다든가, 당시 영진군(營鎭軍)들이 지휘관의 폭정에 항의하여 성 밖에 진을 치는 일이 흔했다는 등 단편적이지만 다양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16세기 사회정치사 이해에 필수적인 책이다.
[李珥 1536∼1584(중종 31∼선조 17) 백과사전에서 조선 중기 학자·정치가.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 본관은 덕수(德水). 강원도 강릉(江陵) 출생. 아버지는 이원수(李元秀),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고 1548년(명종 3) 13세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51년 어머니가 죽자 파주(坡州) 자운산(紫雲山)에서 시묘한 뒤54년 성혼(成渾)과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고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한 뒤 55년 하산하여 유학(儒學)에 전념하였다.58년 이황(李滉)을 방문하였고,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하였으며, 전후 9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임성삼의 주; 장원급제하게 된 답안지 <천도책>은 남아있다. 조선시대의 장원한 답안지 중에 가장 깊은 내용이라고 한다. 읽어 보았으나 크게 감명받지는 못하였다.] 64년 호조좌랑이 된 뒤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거쳐 68년(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69년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올리고, 74년 우부승지가 되었으며 재해로 인하여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렸다. 75년 《성학집요(聖學輯要)》, 77년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지었으며, 80년 《기자실기(箕子實記)》를 편찬하였다. 82년 이조판서가 되어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김시습전(金時習傳)》 《학교모범(學校模範)》을 지었으며, 83년 《시무육조(時務六條)》를 계진하고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84년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죽어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임성삼의 주; 48 세]이황과 더불어 조선시대 유학의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연원을 열었다. 정통 성리학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단순히 성리학만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불교와 노장철학(老莊哲學)을 비롯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과 양명학(陽明學) 등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또한 이(理)는 무형무위(無形無爲)한 존재이고, 기(氣)는 유형유위(有形有爲)한 존재로서 이는 기의 주재자이고, 기는 이의 기재(器材)라는 이기론(理氣論)의 입장을 체계화하여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 및 기발이승론(氣發理乘論)을 주장하였다. 또한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하여는 이황의 사단이발설(四端理發說)을 비판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기발이승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철학에만 조예가 깊었던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교육·국방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과 탁월한 방책을 제시하였다. 동서붕당의 조정을 위한 노력, 보국안민(保國安民)을 위한 양병론(養兵論), 폐법(弊法)의 개혁을 위한 상소, 노예의 속량(贖良)과 서얼들의 통허(通許), 향약(鄕約)· 사창(社倉)의 장려, 교육의 쇄신, 경제사(經濟司) 설치의 제안 등은 모두 국리민복을 위한 그의 포부와 국량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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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고맙습니다.....재밌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