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신앙고백서 서론
요절 : 마 10:16-20
1. 개혁신학 4대 교리
2. 명칭
오늘부터 벨기에 신앙고백서를 배워보겠습니다. 보통 ‘벨직 신앙고백서’라고 말하는데, 손재익 목사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벨기에 신앙고백서’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어 ‘belgic’은 ‘벨기에(belgium)’의 형용사인데, 한글로 번역될 때는 명사로 번역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korean people을 한글로 번역할 때 ‘한국사람’이라고 번역하지 ‘한국의 사람’이라고 번역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리고 ‘belgic’이 형용사라 할지라도 그냥 영어발음 그대로 읽는다는 의견이 있을 수가 있는데, 그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belgic’이라는 단어의 한글 번역어가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belgic confession’ 중 ‘belgic’은 발음 그대로 읽고 ‘confession’은 번역하고... 하는 것은 마치 korean people을 코리안 사람이라고 번역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벨직 컨페션(Belgic Confession)’이라고 말하든가 ‘벨기에 신앙고백서’라고 해야지, ‘벨직 신앙고백서’ 라고 한다든지 ‘벨기에 컨페션’이라고 하면 굉장히 이상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어떤 신앙고백서입니까?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바로 ‘벨기에’ 지역에서 작성된 신앙고백서를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신앙고백서의 명칭은 그 교리가 작성된 지역명을 따서 붙여집니다. 예를 들어서 “Westminster Confession”은 영국 런던에 위치한 웨스트민스터에서 작성되었고, “Heidelberg Catechism”은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지역에서 작성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벨기에 신앙고백서도 벨기에 지역에서 작성되었습니다.
그런데 벨기에 신앙고백서가 작성된 당시에 ‘벨기에’라는 지역은 사실 네덜란드를 의미합니다. 지금이야 벨기에라는 나라와 네덜란드라는 나라가 별도로 있어서 서로 다른 나라이지만, 종교개혁 당시 벨기에는 남부네덜란드 지역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벨기에 신앙고백서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네덜란드 신앙고백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리를 배우면 ‘신앙고백서’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요리문답’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일단 ‘요리문답’은 교육을 위한 목적으로 문답의 형식을 띤 교리를 의미하고, ‘신앙고백서’라는 말은 문답의 형식이 아닌 우리의 믿는 바를 그대로 죽 서술해 나가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교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신조이기 때문에 문답형식이 아니라, 제1조, 제2조... 식으로 주제별로 그리고 항목별로 우리의 믿는 바를 요약하여 진술합니다.
명칭에 대해서는 이정도로 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이 신앙고백서가 작성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3. 신앙고백서가 작성된 역사적 배경
가. 정치적 배경 / 전체 유럽 상황과 네덜란드의 상황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1561년에 귀도 더브레(Guido de Brès, Guy de Bray, 1522-1567)에 의해서 작성되었는데, 그 당시 유럽 전체 상황과 네덜란드 상황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전 유럽을 통일하고 있었던 신성로마제국은 842년 베르덩 협약을 통해 3개국으로 분열되었습니다.
프랑스의 모체인 샤를왕국과 독일의 모체인 루이왕국, 그리고 이탈리아의 모체인 로타르 왕국으로 분할되었습니다. 그리고 세 나라의 왕들 중 한 명은 황제가 되어서 나머지 두 나라와 전 유럽을 진두지휘했습니다. 맨 처음 황제는 샤를 왕국에서 나왔지만, 독일의 오토대제가 전 유럽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독일을 중심으로 황제가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500년대가 되어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가 황제 자리에 도전하게 됩니다. 선제후들, 그리고 교황을 돈으로 매수하고 열심히 로비하여 거의 황제가 될 뻔 했지만, 결국에는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찰스 5세가 황제가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당시 교황인 레오 10세가 프랑수와 1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찰스 5세가 황제의 실권을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1519년부터 1530년까지 황제 후보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1530년에 교황 클레멘스 7세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어 1556년까지 신성로마제국(독일)을 다스렸습니다.
특히 찰스 5세는 네덜란드 지역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인물로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인물입니다. 찰스 5세의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는 영토 확장을 위해서 네덜란드와 부르고뉴 출신의 여인과 결혼했고, 그래서 아내가 사망한 후에 네덜란드 지역을 접수하였습니다. 찰스 5세는 바로 네덜란드의 겐트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1516년에 스페인을 통치하다가 1519년에 황제후보가 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 찰스 5세가 온 세상의 황제로 있을 때 바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찰스 5세는 황제후보로 임명된 이후부터 곧바로 루터의 종교개혁을 직면합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에 있는 교회 문에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의 첫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동시적으로 쯔빙글리가 스위스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찰스 5세는 자신을 반대하는 로마교황 레오10세 때문에 처음에는 루터 편에 섰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가장 로마가톨릭적인 지역인 스페인에서 자랐기 때문에 로마가톨릭을 반대하는 루터에 대한 지지를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를 반대하였고, 그 과정에서 루터를 두둔했던 작센의 선제후 현명한 프레더릭과 갈등을 빚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수와 1세와의 계속된 경쟁과 전쟁, 터키인들의 공격, 독일에서 일어난 농민전쟁(1524-1525) 등으로 사면초가에 몰리기도 했는데, 어쨌든 찰스 5세는 유럽의 격동의 시기의 황제로서 매우 혼란스러운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시절을 보냈습니다.
더욱이 교황 권한과 더불어 황제권한도 점차 약해져 가고 있었으며, 과거 로마와 같이 전유럽을 통합하려는 움직임보다 각 지역들이 독립하려는 움직임들이 강하게 나타났고, 그러면서 각 나라들은 자국의 독립과 이익을 위하여 적절한 종교를 선택하는 그런 구조로 유럽의 상황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황제 찰스5세는 중세시대처럼 유럽 여러 국가들을 통합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여러 의회들과 종교회의들을 개최하여 신교와 구교의 화해를 도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않자, 종교개혁자들을 박멸하는 쪽으로 전향했고 그렇게 무력으로 신교를 박멸하려고 하다가 결국 마틴루터가 죽기 직전(1546년) 독일에서 신구교간의 종교전쟁이 발발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1552년에는 그 종교전쟁에서 패하였습니다. 그래서 찰스 5세는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독일을 떠나게 되었고(파사우 협정),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의 강화조약 체결을 통해 모든 독일 군주들은 자신의 영지에서의 종교를 본인들이 결정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미 독일사회는 다른 유럽과는 달리 왕권제도 또는 황제제도의 권위가 상실된 상태였고, 실질적으로는 군주가 거의 모든 실권을 지고 그 지역을 다스리는 상황이었습니다. 파사우 협정 이후 찰스 5세는 독일에서의 자신의 권한들을 자신의 남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주고,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자신의 아들 필립 2세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필립 2세는 아마도 프로테스탄트들 때문에 고생한 아버지 찰스 5세의 인생을 보면서 그리고 로마가톨릭을 철저히 신봉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는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왕으로 있는 동안 프로테스탄트들을 완전히 박멸하는 것을 인생의 사명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당장 그의 앞에는 터키의 지중해진출이라는 문제와 영국과 프랑스와의 외교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종교문제에 전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네덜란드에서 통치하다가 1559년에 자신의 이복누이인 파르마의 마가레트(Margaretha van Parma)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스페인으로 건너갔던 것입니다. 어쨌든 마가레트도 동생의 지도하에 네덜란드의 종교개혁자들을 무력으로 강압하면서 통치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필립 2세와 마가레트에 의한 극심한 핍박과 박해의 상황 속에서 1561년 귀도 더브레가 벨기에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던 것입니다.
나. 네덜란드 종교개혁 운동 진행과정과 박해
그러면 황제 찰스 5세와 필립 2세의 통치 하에서의 네덜란드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찰스 5세가 황제가 되기 전부터 네덜란드 지역의 교회는 이미 데보티오 모데르나 운동의 영향과 더불어 북유럽의 인문주의적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520년 이후부터 계속적으로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였습니다. 특히 네덜란드는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무역도시로서 주변국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나라여서 여기저기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이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망명을 왔습니다. 그래서 어느덧 화란에는 아주 유능한 개혁파 신학자들이 많이 있게 되었고, 따라서 네덜란드 시민들의 신앙적인 실력들도 많이 향상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루터, 칼빈, 쯔빙글리, 재세례파 등의 영향을 복합적으로 받으면서 네덜란드 사회 전체가 종교개혁에 대한 강력한 열망으로 똘똘 뭉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찰스 5세, 필립 2세, 마가레트의 계속적인 강압통치와 과세정책, 그리고 극심한 경제 불황과 빈부격차심화로 인해서 민중들은 외국인에 의한 네덜란드 통치에 점차로 반감을 가지면서 종교개혁에 대한 열망과 더불어 독립에 대한 열망도 함께 커져갔습니다. 그래서 네덜란드 교회사를 보면, 처음에는 종교개혁을 위해 전쟁을 하다가, 나중에는 이것이 종교개혁을 위한 전쟁인지 독립을 위한 전쟁인지 헷갈리는 그런 양상으로 바뀌었던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나중에는 개혁파와 더불어 로마가톨릭 주민들도 힘을 합세하여 필립2세의 스페인 군대와 싸웠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찰스 5세의 강압통치 아래에서 몇몇 종교개혁자들이 처형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523년에 네덜란드에서 루터파 한 사람이 화형에 처해짐으로써 최초의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수천 명의 재세례파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뮌스터를 점령했다가 결국 찰스 5세의 무력에 의해 처참하게 진압 당했습니다. 그리고 1548년에도 두 명의 칼빈주의 목회자 부부가 비참하게 처형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 루터파, 쯔빙글리파, 재세례파 등의 종교개혁적인 움직임이 계속되자 찰스 5세는 1550년 ‘피의 칙령’을 통해 이들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사형에 처할 것을 선언하면서 처형 방법까지 상세하게 규정하여 그 잔혹함을 더해갔고, 1559년에는 종래의 주교구가 재편성되어서, 이단 단속이 보다 엄격하게 시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네덜란드 개혁파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망명을 가거나 또는 비밀스럽게 모임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더브레는 당국의 핍박을 피해 여기저기로 망명하여 목회자로 준비하다가 1559년에 네덜란드로 돌아와서 투르네(도르니크, Doornik)라고 불리는 도시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3년간 목사로 사역하였습니다. 당국이 개신교도들을 핍박하고 공식적인 모임을 갖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북한이나 중국처럼 비밀스럽게 모임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브레는 어둠을 틈타 이 집 저 집을 옮겨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때로는 4-5시간을 걸어야 하기도 했습니다. 더브레는 성경을 펴서 설명하고 청중들을 격려하고 나서 다시 자기 길을 갔습니다. 그러다보니 회중들은 심지어 그의 진짜 이름도 몰랐습니다. 그는 종종 ‘몽스의 어거스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고, ‘제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더브레를 비롯한 많은 순회목회자들이 전국적으로 비밀스럽게 모임을 가지면서 보다 조직적으로 종교개혁을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네덜란드 지역의 많은 귀족들과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많이 개종하게 되면서, 네덜란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수가 상당하다는 것을 적절하게 나타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필립 2세와 마가레트의 강압통치에 반발하면서 1561년 9월 14일에 반기를 들고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도로로 나와 시위하며 시편가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더브레와 그의 동역자인 라노이(Jean de Lannoy)를 비롯한 몇몇 지도자들은 이러한 시위를 반대했습니다. 그러면서 시위가 아닌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교회 회원들과 네덜란드에 있는 로마가톨릭 주민들에게 배포하여서 칼빈주의 반혁명적 성격을 이해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이러한 시위에 대해 필립2세와 마가레트는 중대한 도전으로 여기고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귀도 더브레의 동역자 라노이가 잡혀 처형됩니다. 그리고 아주 살벌한 분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같은 해 11월 1일 만성절에 투르네 관저 성안으로 돌 뭉치가 던져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돌 뭉치 안에는 벨기에 신앙고백서와 필립 2세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관헌에 대한 변명서가 들어있었습니다. 바로 귀도 더브레가 신앙고백서와 편지를 써서 관헌을 설득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득작업은 끝내 무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필립 2세가 1565년에 몰타 해전에서 터키를 대파한 뒤 비로소 불안정의 기미를 보이고 있던 네덜란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마가레트에게 서신을 써서 이단들을 보다 강경하게 처형할 것을 주문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 귀족들은 반발하였고, 1566년에 시민들도 보다 강경하게 반발하면서 아예 대담하게 광장에서 수만 명이 모여 설교를 듣는 설교운동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 1566년 8월에 무력으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마가레트는 네덜란드 시민들을 이기지 못하고 진압을 포기하고 알바 공에게 자리를 내주고 네덜란드를 떠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에 잠시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러나 기쁨도 잠시 필립 2세는 1567년에 알바 공(Fernando Alvarez de Toledo, 1508-1582, 1567-1573까지 네덜란드 통치)을 10,000명의 스페인 군대와 더불어 네덜란드에 파견함으로써 본격적인 프로테스탄트 박멸작전에 들어갔습니다.
마가레트도 강압정치를 펼쳤지만 알바 공에 비하면 그래도 양반이었습니다. 알바 공은 네덜란드 지역에 입성하자마자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고 비로소 유혈통치를 시작하였습니다. 알바 공은 네덜란드 내에 있는 개신교도들을 색출하고 체포하고 고문하고 처형하는데 모든 사력을 다하였습니다. 귀도 더브레도 그해 1567년에 체포되어 처형당했습니다. 그리고 6년 동안 약 18,000명가량이 고문당한 후에 처형당했습니다. 이러한 끔찍한 유혈통치로 인해서 민심이 나빠진 상황에서 알바공은 과세정책까지 펼치며 네덜란드를 강압 통치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도리어 화를 자초한 것이 되었습니다. 결국 알바공의 강압통치와 과세정책에 네덜란드에 있는 로마가톨릭주민들도 스페인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오렌지 군주 윌리엄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상황이 어려워지자 필립 2세는 알바 공을 소환하고 돈 루이 드 레구엔센을 보내 유화정책을 펴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스페인의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 네덜란드에 있는 스페인 군대를 유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유화정책이 더 이상 통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스페인의 내부사정 때문에 군인들에게 월급도 못주고 또 귀가될 그런 것도 불투명해지고, 그냥 네덜란드에 버려진 상태가 되어버리자,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안트베르프에 있는 시민들 곧 개신교도들뿐만 아니라 로마가톨릭 주민들까지 가리지 않고 8000명가량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이제 네덜란드 시민들은 개신교도들뿐만 아니라 가톨릭 주민들도 합세해서 독립운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을 전쟁 하여 끝내는 스페인 군대를 몰아내는데 성공하고 12년 휴전을 맺게 되었습니다(1609-1621). 그 12년의 휴전 기간 동안, 알미니우스와 칼빈주의자들의 논쟁에 대한 종교회의가 1619년 돌트에서 개최되었고, 그 돌트 회의에서 1561년에 작성된 벨기에 신앙고백서가 정식 신앙고백서로 채택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휴전 12년이 끝나고 나서 스페인이 다시 공격해왔지만, 그 공격을 파하고 마침내 1648년 베스트팔랜조약으로 네덜란드가 독립에 성공합니다.
다. 귀도 드 브레의 일생과 벨기에 신앙고백서의 의의
그러면 이어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귀도 더브레의 생애와 그의 사상, 그리고 벨기에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의도와 목적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귀도 더브레는 1522년 벨기에(나중에 남부 네덜란드로 알려짐) 베르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고 따라서 더브레는 독실한 로마 가톨릭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막 시작되었을 때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루터와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의 영향은 벨기에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아마도 귀도 더브레는 24살이 되기 전에 이런 종교개혁적 신앙을 수긍하고 베르헌에서 종교개혁에 연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1548년에 베르헌을 방문했던 두 개혁파 목회자 부부가 처형되는 사건을 계기로 더브레는 베르헌을 떠나 망명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브레는 자기 고향 도시를 떠나서 1548년에 런던으로 가서 1552년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런던에 있는 동안 더브레는 여러 탁월한 종교개혁자들(아아르떤 미크론, 요한네스 아 라스코, 요한네스 위턴호퍼) 밑에서 복음설교자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552년에 더브레는 런던을 떠나 다시 네덜란드 베르헌에 가까운 도시인 레잇설(Rijssel)로 갔습니다. 그 당시 박해는 여전히 매우 엄청난 현실이었습니다. 레잇설에서 그의 선임자 피에르 브룰리 목사는 화형 당했습니다. 확실히 이런 환경 가운데서 목사가 되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더브레는 레잇설에서 목사가 되어 4년 동안 목숨을 걸고 비밀리에 사역했습니다.
그러나 1555년에 또 다시 여러 가지 박해로 인해 더브레는 네덜란드를 떠나 독일의 프랑크푸르크로 도피하였다가, 스위스의 제네바와 로잔 등에서 공부했습니다. 프랑크푸르크는 당시 존 낙스가 영국 피난민 교회를 목회한 곳이었고, 제네바에서는 아마도 칼빈을 만나 지도를 받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로잔에서는 칼빈의 제자인 데오도르 베자의 지도 아래 헬라어를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더브레가 앞으로의 사역을 위하여 필요한 훈련을 끝마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1559년에 더브레는 케서린 라몬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1559년에 네덜란드 투르네에 돌아와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시위와 봉기에 대해 반대하면서 그는 1561년에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여 관헌 건물 안으로 던져 넣었습니다. 그 신앙고백서는 귀도 더브레가 직접 프랑스어로 작성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필립2세에게 보낸 서신도 포함되었는데, 서신과 신앙고백서를 통해 더브레는 두 가지를 기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필립 2세가 이 내용을 읽고 자신들이 광신적인 이단집단이 아니라, 단지 성경에 기록된 것을 믿는 자들임을 알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필립 2세가 “아... 이들이 가진 신앙이 그렇게 잘못된 신앙이 아니구나... 우리가 오해했구나... 아니 오히려 우리보다 더 성경적이구나... 그러므로 이들에 대해서 이렇게 잔인하게 박해해서는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하고 관용정책을 펼칠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꿈같은 이야기지만 그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더브레 외에도 많은 종교개혁자들은 늘 이러한 부분에 힘썼습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기독교 강요입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의 서문에서 자신의 책을 프랑수와 1세에게 헌정한다고 밝히면서 프랑수와 1세가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해서 관용정책을 펼쳐줄 것에 대해 호소합니다.
더욱이 이렇게 신앙고백 내용을 서신과 더불어서 관헌에 보냈던 데에는 열광주의자들과 재세례파의 난동이 한 몫을 했습니다. 재세례파들이 세속적인 정부를 부정하고 세금도 안 내고 자기들을 위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 과격한 시위와 약탈, 봉기를 일삼았기 때문에 개혁교회도 그렇게 오해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재세례파 때문에 로마가톨릭 진영이 더욱더 프로테스탄트들을 향해 강경노선을 취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던 것이죠. 그래서 모든 개혁교회는 재세례파를 혐오했고 그들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언제든지 그들의 신앙고백서에서 “우리는 그들 아닙니다.”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더브레도 자신의 신앙고백서에서 “우리는 모든 합법적인 면에서 정부에 순복할 것을 선언합니다.”라고 강조하면서 자신들이 결코 재세례파가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더브레는 자신들의 신앙고백이 성경적이며, 그리고 정부에 위협적인 정치적인 세력도 아니기 때문에, 필립 2세가 신앙의 자유와 종교적인 관용을 베풀어줄 것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런 요청이 받아들여질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더브레도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신앙고백과 더불어 서신을 써서 필립 2세에게 제시한 것은 자신들의 요청이 거절될 지라도, 순교를 각오하고서라도 자신들의 신앙이 성경적이며 옳다는 것과 로마가톨릭이 오히려 심각한 오류 가운데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벨기에 신앙고백서 끝에 보면 다음과 같은 청원자들의 선언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신앙 고백의 표현된 바에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부인하기보다는 차라리 등에 채찍을 받고, 혀를 잘리며, 입에 재갈 물리며, 온 몸이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편이 더 낫다.”
보통 일반사람들은 억압에 눌리면 폭동을 일으키고, 창검을 들고 덤벼들면서 반기를 들지만, 그러나 기독신앙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고 우리의 믿는 바를 제시하고 원수들의 죄를 지적하는 선포를 하면서 그들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 다시 말해 무력이나 폭력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드러냄으로써 저항합니다. 사도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칼을 꺼내들고 로마군병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칼로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말고의 귀를 치료해주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무력으로 이루어가는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원수들의 손에 의해 순교당하는 것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순교당할 때 그냥 말없이 순교당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은 최후의 변론을 할 때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원수들의 죄를 지적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방금 읽었던 예수님의 말씀에 잘 나타납니다.
“(16)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17)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18)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19)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20)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16-20)
죽을 때 성령의 감동함을 따라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장렬히 순교하는 것이 바로 영적전쟁에서 교회가 승리하는 방식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순교당하기 전에 하는 말은 단순한 유언이 아니라, 성령께서 감동하셔서 모든 듣는 회중들에게 성경의 진리와 복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스데반 순교사건입니다.
스데반이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논쟁할 때, 스데반이 성령충만하여 사람들이 그의 말을 도무지 당해내지 못하자, 거짓증인을 내세워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하여 그를 법정에 세웠습니다. 그렇게 순교를 눈앞에 두고 스데반은 오히려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복음의 진리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해갔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옛언약을 성취하시는 약속된 메시아임을 증거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예수를 죽인 그들의 죄가 과거 선지자들을 죽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다를 바 없다고 함으로써 그들의 죄를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장렬하게 순교 당했죠.
많은 면에서 이 스데반의 순교 사건은 귀도 더브레의 상황과 유사합니다. 스데반 당시도 기독교를 박해한 자들이 이교도 사람들이 아니라, 구약성경을 믿고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하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귀도 더브레 당시도 그들을 박해한 사람들이 이교도들이 아니라 성경을 믿는다고 하고 예수를 가장 잘 섬긴다고 하는 로마가톨릭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귀도 더브레는 순교를 각오하고 자신의 신앙을 성경에 기초하여 자세히 고백하고 그들의 오류와 죄를 지적하였으며, 그리고 몇 년 후에 장렬히 순교 당했던 것입니다. 귀도 더브레는 1566년에 마지막으로 청빙 받아서 목회했던 발렌치네(Valenciennes)에서 체포되어 1567년 5월 31일 교수대에 매달려 처형당하였습니다.
귀도 더브레의 담대하고 뜨거운 신앙은 특별히 1567년 4월 12일, 곧 순교하기 한 달 전에 그가 자기 아내에게 쓴 편지에서 잘 나타납니다.
“나의 가장 사랑하는 케서린 라몬이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귀하고 가장 사랑스러운 아내와 자매여- 그대가 나와 결혼했을 때, 그대는 단 한 순간도 생명을 확신할 수 없는 필멸의 사람과 결혼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오. 그러나 우리에게 약 7년을 함께 하게 하시고 다섯 자녀들을 주신 것은 우리 선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오. 주님께서 우리가 더 오래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면, 주님은 그 삶을 행복하게 해 주실 방법이 있을 것이오. 그러나 그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고 그것은 그대에게 충분할 것이오. 또한 내가 나의 원수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의 섭리를 통한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오 - ‘나의 하나님이여, 당신께서 당신이 결정하신 때와 시간에 나를 태어나게 하셨나이다. 그리고 나의 전 생애를 통해서 당신께서 상상할 수 없는 위험 가운데서 나를 보존하시고 보호하셨나이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나를 완전히 해방시켜 주셨나이다. 그리고 이제, 내가 당신께로 가기 위해서 이 생명을 떠나야만 할 때가 이르렀나이다 ...’ 특별히 하나님의 아들의 사역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중히 여기시고 특권을 부여하사 순교의 면류관으로 영화롭게 하신 한 사람을 그대에게 주심으로 그대에게 보여주신 그 영광을 잊지 마시오. 나는 즐겁고 나의 마음은 기쁘오. 나는 나의 모든 환란 가운데서도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소. 나는 나의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부요함으로 가득차 있소 - ... 안녕, 나의 소중한 친구 캐서린에게....”
스데반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회중들의 죄를 지적한 후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을 보고 천사의 얼굴과 같이 되었던 것처럼 더브레도 순교하기 전에 천사와 같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이 귀도 더브레의 신앙고백서에 대해서 단순한 교리공부 차원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건 신앙고백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귀도 더브레의 치열한 삶과 그의 신앙을 보면서 교리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교리하면 “딱딱하고 재미없고 지루하고 그냥 성경말씀 잘 읽고 주님과의 실질적인 교제와 체험이 중요하지... 차가운 교리를 왜 배우냐...” 하는 생각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러나 교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리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서 목숨 내어놓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하나님과 세상을 향한 자신의 신앙고백적 반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더브레 같이 세상 법정에 서서 순교를 직면하게 될 때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면서 성경 66권을 그대로 줄줄 읽어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복음을 짧고 요약된 진술로 서술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은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성경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성경에 대해 그렇게 반응했던 것처럼, 그 주어진 내용에 대해서 우리도 또한 그렇게 고백함으로써 성경에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사도신경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라는 진술이나 “나는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라고 하는 진술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나의 반응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증거하는 모든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인성, 구원론, 신앙과 경건에 관한 모든 교훈들에 대해서 우리는 전적으로 수납하는 자세를 가지면서 그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교리적 고백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물론 교리가 신학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교리는 신학 논문이 아닙니다. 신경은 신앙에 대한 개인적인 진술입니다. 신경들은 성경에 대한 정확한 요약이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그 신경들을 신앙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진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바뀌지 않고, 성경의 의미도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전에 신앙의 선배들이 성경이 말하는 바를 그의 신경에서 정확하게 요약하였다면, 우리가 오늘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데 그들의 말을 사용하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의 선배들이 잘못 해석한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점에 대해서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를 비롯한 우리가 인정하는 개혁교리들은 단순히 몇몇 개개인들의 성경해석을 반영한 교리가 아니라, 성경을 원어로 수백 번 읽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논의하고 토론을 하여 작성한 것이고, 또 철저히 신자들로부터 재가를 받고, 또 당대뿐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참된 신자들로부터 그것이 성경적 진술이라고 재가를 받은 것들입니다. 그런 교리들에 대해서 우리가 그것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하거나, 그것은 하나의 해석일 뿐이라고 일축하는 것은 교회의 역사적 유산을 무시하는 매우 교만한 태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결코 귀도 더브레 한 개인의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사실은 칼빈주의자들의 신앙고백서입니다. 칼빈주의란 사실 개혁주의를 의미하는데, 개혁신학은 칼빈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칼빈의 성경해석이야말로 가장 사도들의 가르침에 가깝다고 믿고 그러한 성경적 해석들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칼빈주의입니다. 왜냐하면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사실상 프랑스 신앙고백의 개정판이라고 불리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과 형식, 순서, 용어들을 프랑스 신앙고백에서 그대로 가져옵니다. 그런데 프랑스 신앙고백은 칼빈의 제자에 의해 쓰여졌고 또 칼빈 그 자신에 의해 최종 개정된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이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결국 칼빈의 개혁신학의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안트베르펜 교회에서 최초 승인되고, 나중에 여러 교회에서 받아들여졌으며, 그리고 약간의 수정과 보완 후에 칼빈이 목회했던 제네바 교회에서도 재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돌트 종교회의때 개혁파 교회의 공식 신조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의 모든 목회자와 장로와 집사는 바로 이 신앙고백에 서명해야만 직분자로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벨기에 신앙고백서를 다른 개혁교리들과 더불어서 교회의 소중한 유산으로 생각하고 성경과 더불어서 함께 읽고 배우고 그 고백대로 우리가 또한 하나님과 세상 앞에서 고백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마땅한 의무인 것입니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피가 발린 이 교리를 가볍게 대하지 말고, 엄숙하고 무겁게 받아들이고, 우리가 이 교리에 대해서 그들처럼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모순을 배격해야 합니다. 신학과 교리에 대해 무관심하면서 그냥 성경 열심히 읽고 성령체험하면 된다고 하는 오류를 배격해야 합니다. 또한 반대로 신학과 교리에 관심이 많고 열심히 배우는데, 머리로만 배우는 오류도 배격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로서,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 없이 그저 변론을 좋아하고 율법의 선생이 되려하나 자기의 확증하는 바도 깨닫지 못하는 그런 비참한 상태에 있는 자들입니다. 개혁신학을 추구하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는데, 정말 여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희망이 없습니다.
교리는 학교에서 국어 영어 수학 배우듯이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는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피 발린 이 벨기에 신앙고백서를 바르게 배우고 익혀서 그것을 또한 자신의 고백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의 선조들과 더불어서 나도 그 고백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교리를 부정하느니 차라리 등에 채찍을 받고, 혀를 잘리며, 입에 재갈 물리며, 온 몸이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편이 더 낫다고 우리도 고백해야 합니다.
4. 교리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의를 가지는가?
그리고 우리가 벨기에 신앙고백서를 배워야 하는 또 다른 목적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단을 분별하는 것과 신앙교육과 교회의 일치라고 목적입니다.
사실 교회사를 보면 교리는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의의와 목적을 가지고 작성되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초대교회나 종교개혁 때처럼 이단으로 정죄 받아 극심한 핍박을 받을 때에 교리는 바로 자신들의 교회가 광신적인 이단집단이 아니라 성경적임을 변증하는 주된 목적을 가지고 작성되었습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나 벨기에 신앙고백서가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때때로 핍박이나 박해가 그치고 평안하고 안전할 때 교회가 이단들을 대처하면서 교리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종교회의를 거쳐 만들어진 교리가 다 여기에 해당됩니다.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신조, 칼케돈 신조, 돌트 신조 등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때때로 교회 가운데 보다 효과적으로 성경적 가르침을 교육하기 위해, 다시 말해 교육적인 필요를 위해서 교리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이 경우는 대부분 문답의 구조로 만들어졌는데, 대표적으로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있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교회의 일치를 표현하기 위해 교리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의 성경해석이 비록 전적으로 일치하지 않고 다 다를지라도 가장 핵심적인 부분과 관련된 공통된 신앙고백서를 만듦으로서 이것을 믿는 바로 고백하면 다른 부분에서는 서로 틀려도 얼마든지 서로 용납하며 교제 나눌 수 있다는 생각으로 교리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신경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상황마다 각기 다른 의도와 목적으로 만들어졌을지라도 그것을 후대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배울 때는 이런 4가지 목적 모두를 의도와 목적으로 삼아 배우고 익혀야 할 것입니다.
5. 벨기에 신앙고백서의 특징
벨기에 신앙고백의 전체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필립 왕에게 쓴 서한
2) 신앙고백서 제37개조
3) 관헌에 대한 변명서
우리는 오직 신앙고백서 제37개조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동일하게 1인칭 주어로 서술됨으로써 자신의 신앙으로 고백하도록 의도되었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조항이 “나는 믿습니다.”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각 장은 어떤 한 주제에 대한 교리를 신앙고백형식으로 서술하면서 그 논거를 논리적으로 제시합니다. 기록 목적이 자기들의 신앙이 성경적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기 때문에 매우 변증적인 성격이 강한 것입니다. 더브레는 당시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변증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서문에 나와 있듯이 자신들이 로마 가톨릭에 의해 박해 받고 있는 상황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거절하다”(reject), “동의하지 않다”(do not agree), “깨닫고 구별하다”(recognize and distinguish) 등의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이 어떤 점에서는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서의 차이입니다. 사도신경처럼 단순히 믿는 바를 요약적으로 진술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믿는바 의미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하고, 때로는 성경을 인용하여 그것이 진리임을 증거하며 잘못된 교리에 대한 지적과 그 오류를 들추어내고 그 결론으로서 그 당시에 유행하는 그릇된 교리를 정죄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이단과 우리의 신앙고백을 철저하게 구별하여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신앙고백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래서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별도의 설명이 거의 필요가 없습니다. 한 조항 한 조항이 한편의 설교요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읽는 그 자체로 이해가 되고 은혜가 됩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총 37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신론>
제 1 조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만이 계시다
<성경>
제 2 조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방법
제 3 조 하나님의 말씀
제 4 조 정경
제 5 조 성경의 권위
제 6 조 정경과 외경의 차이점
제 7 조 성경의 충족성
<삼위일체>
제 8 조 하나님은 본질상 한분이시나, 세 위격으로 구별되신다
제 9 조 이 교리의 성경적 증거
제 10 조 예수 그리스도는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제 11 조 성령님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창조와 섭리>
제 12 조 모든 것, 특히 천사의 창조
제 13 조 하나님의 섭리
<아담의 범죄와 타락>
제 14 조 사람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사람이 참으로 선한 일을 행할 수 없음
제 15 조 원죄
<구원과 구속자 예수>
제 16 조 하나님의 선택
제 17 조 타락한 인간의 회복
제 18 조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제 19 조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있는 두 본성
제 20 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제 21 조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속죄
<칭의>
제 22 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우리의 칭의
제 23 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
<성화>
제 24 조 우리의 성화와 선행
제 25 조 그리스도, 율법의 완성
제 26 조 그리스도의 중보
<교회>
제 27 조 보편적 기독교회
제 28 조 교회에 가입해야 할 모든 사람의 의무
제 29 조 참 교회와 거짓 교회의 표지
제 30 조 교회의 정치
제 31 조 교회의 직분자들
제 32 조 교회의 질서와 권징
<성례>
제 33 조 성례
제 34 조 세례의 성례
제 35 조 주의 만찬의 성례
<국가와 교회의 관계>
제 36 조 시민 정부
<재림과 심판>
제 37 조 최후 심판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다른 교리에서처럼 십계명이나 주기도문, 사도신경에 대한 해설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교회에 대한 언급이나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부분이 있는 것은 독특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나중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도 동일하게 언급됩니다. 우리가 이 벨기에 신앙고백서를 충실하게 배우고 익혀서 복음진리를 더 깊이 깨달아서, 더브레와 같이 복음의 진리를 목숨 바쳐 견지해 나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hangyulcmi.org/word_c/18906
창원한결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