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문답에 관한 시
차례
산중문답 / 조용숙
산중문답 / 이원규
산중문답 / 이기철
산중문답 / 강세환
산중문답(山中問答) / 조지훈
산중문답 / 조용숙
아무리 예쁜 보살들 찾아와
온갖 방법으로 유혹해도
눈길 한 번 안 주는 부처님을 애인 삼은
비구니 스님
그 비법이나 한 수 적어볼까 싶어
노트북 들고 찾아간 작은 암자
플러그를 꽂는 순간
암수가 만나면 전기가 통하는
세속 이치 비웃으며
노트북 전원이 확 나가버린다
웬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하는 사이
헐레벌떡 달려온 비구니 스님
가부좌 풀고 달아나는 부처님 봤냐며
밭에서 금방 다온 풋고추에 된장 올린
밥상이나 받으란다
- 조용숙,『모서리를 접다』(詩로여는세상, 2013)
산중문답 / 이원규
으름덩굴 짙푸른 그늘 아래
한 평짜리 대나무 평상
에프킬라를 버리고
구례 장터에서 사온 모기장을 쳤다
닭장에서 암탉이 울고
얼마나 울었는지
토끼장의 토끼는 두 눈이 빨갛다
모기장 속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려다 모기장 밖의 모기와
두 눈이 딱 마주쳤다
배고프냐, 약 오르지?
치사한 놈, 네 피는 너무 탁해!
어쭈구리, 알만 배면 다냐?
넌 가려울 뿐이지만 난 생존의 문제야.
햐아, 이놈 봐라, 빨대도 입이냐?
벼엉신, 모기장 속에 갇힌 건
바로 너, 그게 네 인생이야!
도둑고양이 한 마리
씨익 웃으며 돌담을 넘고 있다
- 이원규,『강물도 목이 마르다』(실천문학사, 2008)
산중문답 / 이기철
산중에는 작위(爵位)보다
엽록이 앞선다
고인 물이 하류로 흐르지 않지만
광목필 같은 물은 어디로 갈 것인가
삼백 년 세월은 이 산의 깃을 흔들며 지나갔지만
기슭의 명아주 잎새 하나도 바꿔놓지 않았다
사천 지나 쌍계 마현
섬진강은 비단 필(匹)로
들 가운데 누워 있다
종일 일없는 너도밤나무를 쳐다보며
문턱에 걸터앉아 계곡물 붓는 것만 구경한다
물살은 서로 싸워도 둑을 넘지 않고
산봉은 손 헤지 않아도 해와 달을 제 등뒤로 넘겨 보낸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수자(修者)가 되는 길만이
유리의 길은 아니다
연꽃 위에 놓인 법구경 한 구절도
누가 공으로 내 마음의 쟁반에 갖다놓겠는가
서릿바람 속에 뼈로 설 수 있어야
마음의 유리를 찾을 수 있다
산은 언제나 나보다 높은 데 있고
물은 언제나 나무보다 낮은 데로 흘러간다
- 이기철,『유리의 나날』(문학과지성사, 1998)
산중문답 / 강세환
이른 봄 산중에서 만났던 물소리 하나가
무덤덤한 저녁 산책길 발걸음 자꾸만 헛딛게 하였다
헛디딜 때마다 짜릿한 이 헛헛한 맛
헛디딜 때마다 온 몸에 톡 쏘는 이런 낯섦!
작은 물소리 하나가 속마음을 후벼 팔 줄이야
우두커니 앉아 물소리 듣다 보면
마음속에 쏙 들던 마음속에 이런 물듦!
(이 헛디딤과 헛헛함과 낯섦과 물듦의 복잡한 유혹)
엊그제 꿈속에서 언뜻 스쳤던
어느 운수납자雲水衲子를 꿈처럼 산중에서 만났다
긴 턱수염을 매달고 있었다
몇 마디 말을 걸어보려고 뒤쫓아 갔다
몇 걸음 뒤에서 그의 보폭만큼 걸었다
좁혀지지 않은 그 거리만큼
물소리 하나가 그 거리만큼 맴돌고 있었다
정녕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덤덤하게 너는 네 길을 가라
길 없는 길 찾아 헤매는 길!
물소리가 그 여백을 드문드문 메우고 있었다
(물소리 듣다 물소리에 물든 마음)
“수행자는 인연을 따를 뿐”
“문학도도 인연을 따를 뿐”
우연한 이 물소리는 우연일까? 인연일까?
적적한 것도 적막한 것도 아닌
생강나무 발목을 적시던 담담한 물소리
- 강세환,『벚꽃의 침묵』(황금알, 2009)
산중문답(山中問答) / 조지훈
'새벽닭 울 때 들에 나가 일하고
달 비친 개울에 호미 씻고 돌아오는
그 맛을 자네 아능가'
'마당가 멍석자리 삽살개도 같이 앉아
저녁을 먹네
아무데나 누워서 드렁드렁 코를 골다가
심심하면 퉁소나 한 가락 부는
그런 멋을 자네가 아능가'
'구름 속에 들어가 아내랑 밭을 매면
늙은 아내도 이뻐 뵈네
비 온 뒤 앞개울 고기
아이들 데리고 낚는 맛을
자네 태고적 살림이라꼬 웃을라능가'
'큰일 한다고 고장 버리고 떠난 사람
잘되어 오는 놈 하나 없데
소원이 뭐가 있는고
해마다 해마다 시절이나 틀림없으라고
비는 것 뿐이제'
'마음 편케 살 수 있도록
그 사람들 나랏일이나 잘 하라꼬 하게
내사 다른 소원 아무것도 없네
자네 이 마음을 아능가'
노인은 눈을 감고 환하게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따뤄 주신다.
'예 이 맛은 알 만합니더'
청산 백운아
할말이 없다
- 조지훈,『여운』(일조각, 1964)
[출처] 시 모음 940. 「산중문답」|작성자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