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룡(李相龍) 등이 주동하여 서간도 지역인 퉁화[通化]에서 조직했다. 1911년 큰 흉년으로 경학사(耕學社)가 해산되었으나, 1912년에도 국내에서 망명 이주가 계속 증가하자 그해에 다시 조직한 것이 부민단으로 '부여(扶餘)의 옛 땅에서 부여 유민(遺民)이 부흥결사(復興結社)를 세운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대외적인 사업은 첫째, 한인의 자치를 담당하고 각급 지방조직의 한인사회에서 발생하는 일체의 분쟁을 해결하고, 둘째, 중국인 또는 중국관청과의 분쟁사건을 맡아 처리하며, 셋째, 신흥학교(新興學校) 등 한인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맡아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한편 대내적으로 추진한 최고의 사업은 모든 조직을 효과적으로 운영하여 '독립전쟁론'에 바탕을 둔 각종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퉁화 현 하니 강[哈尼河]에 본부를 두었으며, 단장 허혁(許赫), 부단장 김동삼(金東三), 서무 김형식(金衡植), 유서단총(柳西團總) 방기전(方基甸), 유동단총(柳東團總) 황병문(黃炳文), 통동단총(通東團總) 최명수(崔明洙), 통서단총(通西團總) 최여명(崔汝明), 흥동단총(興東團總) 김진호(金鎭浩)로 중앙부서를 조직했다. 지방 조직의 경우 10호(戶)·100호·1,000호를 기준으로 패(牌)·구(區)·지방으로 나누고 패에는 패장(牌長) 또는 십가장(十家長) 1명을 두고 구에는 백가장(百家長) 1명을 두었으며 지방에는 천가장(千家長) 1명을 두었다. 이와 같이 조직을 정비하고 대표자대회를 개최하여, 부민단을 정부의 기능을 가진 보다 넓은 범위를 의미하는 '부민회'(扶民會)로 개칭하기로 결의했다. 회장 이상룡, 부회장 이탁(李沰), 의사부장(議事部長) 김동삼, 재무부장 안동식(安東植), 학무부장 양규열(梁圭烈), 검무감(檢務監) 최명수, 사판장에 이진산(李震山), 검독(檢督) 성인호(成仁浩), 중앙검찰 김형식·남정섭(南正燮) 등을 선임하고 각 지방에는 총관(總管)을 두어 자치행정을 실시하도록 했다. 유서·유동·흥동 총관은 이전의 단총이 유임되고 통동총관에 최여명, 통서총관에 한규석(韓奎錫), 흥서총관에 이봉규(李鳳奎), 해남총관에 성태영(成泰永)이 선임되었으며, 그밖에 해북총관 등이 있었다. 남만주에서 독립운동의 총본영으로 군정부(軍政府)가 조직되자 1919년 4월 류허 현[柳河縣], 퉁화 현, 싱징 현[興京縣], 환런 현[桓仁縣], 지안 현[輯安縣] 등의 한인주민들은 부민회를 자치기관인 한족회(韓族會)로 개편했다.→
한족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