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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의 소네트 연작은 소설이 아니므로 뚜렷한 줄거리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다만 이 연작 시편들을 통해 자신이 겪은 일련의 감정적 위기와 안팎으로 느끼는 갈등, 그리고 이루지 못할 사랑에 대한 쓸쓸한 명상을 표현하고 있다. 『아스트로필과 스텔라』 가운데 가장 널리 읽혀지는 시의 하나인 아래의 1번 소네트에서 시의 화자 아스트로필은 스텔라의 매력에 푹 빠져서 그녀의 호감을 사려는 희망을 품고 시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이것이 여의치 않자 다른 시인의 시를 베끼려는 헛된 시도를 해보지만 결국 고통과 수심에 싸여 어쩔 줄 몰라 할 때 시신(Muse)의 충고를 듣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 연작 시편은 시인이 시신의 충고를 받아 들여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시를 쓴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사랑하며 즐겨 그 사랑을 시로 나타내어
사랑하는 그녀가 내 수고에 약간의 즐거움을 느끼고
즐거움에 내 시를 읽고, 읽음으로 나를 알고
앎으로 나를 동정하고, 동정에서 호의를 갖도록,
고뇌에 찬 슬픈 표정을 그리는데 알맞은 말을 찾았네.
그녀의 마음에 들 멋진 어구를 궁리하며
때로 다른 사람의 책을 뒤적이며 열정에 타는
내 머리를 적셔줄 신선한 비를 찾기도 하였네.
그러나 독창성이 지탱하지 못해 말은 자꾸 절룩거리고
자연의 총아인 독창성은 계모인 노력의 매를 피해 달아나고
다른 사람들의 시는 늘 나에게 낯설기만 하였다네.
그래서 생각은 많으면서 고통 가운데 어쩔 줄 몰라
게으른 펜을 물어뜯으며 홧김에 자신을 매질할 때
시신이 말하길, “바보야, 네 마음속을 보고 글을 써야지.”
Loving in truth, and fain in verse my love to show,
That the dear she might take some pleasure of my pain,
Pleasure might cause her read, reading might make her know,
Knowledge might pity win, and pity grace obtain,
I sought fit words to paint the blackest face of woe:
Studying inventions fine, her wits to entertain,
Oft turning others’ leaves, to see if thence would flow
Some fresh and fruitful showers upon my sunburned brain.
But words came halting forth, wanting Invention’s stay;
Invention, Nature’s child, fled step-dame Study’s blows,
And others’ feet still seemed but strangers in my way.
Thus great with child to speak, and helpless in my throes,
Biting my trewand pen, beating myself for spite,
“Fool,” said my Muse to me, “look in thy heart and write.”
▶ 1. fain: wishing, desirous, willing
7. leaves: books
9. stay: crutch, support, prop
11. halting: limping
13. trewand: truant 게으름쟁이
이 시는 한번쯤 연애편지를 써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법한 보편적인 경험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독자들에게 쉽게 와 닫는 작품이다. 약강 6보격(iambic hexameter)에 a b a b a b a b c d c d e e 라는 각운 형식을 밟고 있는 이 소네트는 창작과정의 어려움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랑하는 여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시를 쓰려던 화자는 다른 사람의 책에서 좋은 구절을 베껴보려고 한다. 이전 작가들을 모방함으로써 재치 있고 유능한 시인으로 보이려는 이러한 시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이론(mimetic theory)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시인은 “다른 사람들의 시는 늘 나에게 낯설기만 하였다네”라며 다른 사람의 시와 발을 동시에 의미하는 “feet"에 대한 말장난(wordplay)을 통해 이것이 아스트로필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고 방해만 될 따름이라는 생각을 밝히고 있다.
시가 교훈과 함께 즐거움을 제공해야 한다고 시드니가 『시의 옹호』에 한 주장 역시 이 1번 소네트에 나타나 있다. 즉 아스트로필은 자신의 시를 통해 스텔라가 “내 수고에 약간의 즐거움을 느끼고 / 즐거움에 내 시를 읽고, 읽음으로 나를 알”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밝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시를 읽음으로써 자기를 동정하고 호의를 갖게 되기를 원하며, 이러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적절한 말을 찾아 애쓰는 것도 『시의 옹호』에서 시가 갖는 “감동시키는 효과”(moving effect)를 얻기 위해서인 것이다.
“생각은 많으면서 고통 가운데 어쩔 줄 몰라”라며 시를 쓰는 창작의 고통을 아기를 낳을 때의 진통에 비유하기까지 한 화자는 “게으른 펜을 물어뜯으며” 자신의 무능을 자책하기에 이른다. 그때 그의 어리석음을 꾸짖으며 “네 마음속을 보고 글을 써야지”하고 시신이 충고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경험과 사랑에서 시가 탄생한다는 생각은 그 당시로서는 독창적이고 새로운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대화하듯이 구어체의 문체를 도입한 것이나 평이하고 활기찬 시어를 구사함으로써 살아있는 인간의 생생한 목소리를 창조한 것은 매우 혁신적이라고 하겠다.
이번에 읽을 31번 소네트는 시인이 자신이 앓는 사랑의 열병을 하늘의 달도 같이 겪고 있다고 생각하여, 떠오르는 창백한 달이 외로운 침대로 가기 싫어 억지로 걸음을 옮기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 시작 부분은 워즈워스(Wordsworth)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그가 자신의 소네트에서 이 구절을 사용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아, 달님아, 너 슬픈 발걸음으로 하늘을 오르고 있구나,
말없이 창백한 얼굴을 하고!
그래, 하늘나라에서조차 분주한 궁사가
날카로운 화살을 시험한단 말인가?
물론, 오래 사랑에 익숙한 눈으로
사랑을 판단하건데 너도 사랑을 앓고 있음이 분명하구나.
너의 표정에서 그걸 읽을 수 있어. 수심에 잠긴 너의 고운 모습이
너처럼 사랑을 앓는 나에게 네 신세를 알려준다네.
그러니 같은 처지에, 오 달이여, 내게 말해다오
거기서도 변함없는 사랑을 단지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며,
그곳의 미인들도 여기서만큼 거만한가를?
사랑 받기는 좋아하면서
사랑에 사로잡힌 애인들을 멸시한단 말인가?
거기서도 배은망덕을 미덕이라 부른단 말인가?
With how sad steps. O Moon, thou climb’st the skies,
How silently, and with how wan a face!
What, may it be that even in heavenly place
That busy archer his sharp arrows tries?
Sure, if that long-with-love-acquainted eyes
Can judge of Love, thou feel’st at Lover’s case;
I read it in thy looks: thy languished grace,
To me that feel the like, thy state descries.
Then even of fellowship, O Moon, tell me
Is constant love deemed there but want of wit?
Are beauties there as proud as here they be?
Do they above love to be loved, and yet
Those lovers scorn whom that love doth possess?
Do they call virtue there ungratefulness?
▶ 4. That busy archer : Cupid
5. if that : if
long-with-love-acquainted : 당시 유행한 compound adjective의 예.
9. of Fellowship : 우리가 같은 처지에 있으니. 동병상련(同病相憐).
시인은 전통적인 소네트라는 형식을 통해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여러 번 등장하는 “나”(I)와 “나를”(me)과 같은 호칭은 이러한 시의 개인적인 내용을 강조하고 있는 한편, “달”과 큐피드(“분주한 궁사”)라는 전통적인 이미지는 시인이 불행한 사랑과 아름답지만 사랑에 마음이 없는 여인들에 관한 오래전부터 세워진 시적 전통에서 시를 쓰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Garrett 40).
시인은 자신을 달과 연관시키고 그 자신과 달이 겪고 있는 상황(case) 사이에서 유사성을 이끌어냄으로써 시를 시작하고 있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이 자기를 불쾌하게 여기는 것 때문에 어두운 그늘 속에 있는 것처럼, 달이 “창백한 얼굴”을 한 것도 태양 빛과 따스함을 받지 못해서라고 상상한다. 달도 자기처럼 슬픔으로 말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마지못해 쓸쓸한 침실로 올라가듯이 하늘로 외로운 발걸음을 느리게 옮기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 화자는 여기서 달님 또한 큐피드의 화살을 맞고 인간인 엔디미온(Endymion)을 사랑함으로써 고통을 당한 희생자라는 신화적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서조차” 사랑의 신이 활동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8행 연구의 시작 부분에서 시의 화자가 자신과 달 사이에 설정한 연결고리는 다소 희미하고, 어조 또한 “~하단 말인가?”와 같이 주저하는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다가 5행에 접어들면서 “그래”(Sure)라며 보다 확신에 찬 단언하는 어조로 옮겨가고 있다. 그는 달에게서 고통당하는 한 동료의 모습을 발견한다. 달의 외모로 미루어 달이 처한 실연의 상태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시의 화자는 달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행한 사랑의 사연을 겪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는 처음의 조심스러운 짐작에서 출발하여 점점 자신감을 가지다가, 6행 연구에 접어들면서는 확신에 찬 어조로 용감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화자는 자신을 달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같은 처지”의 동등한 상태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달의 입장에서 보면 지상의 가치는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달의 영역인 하늘에서는 사랑의 불변성은 최고의 미덕으로 간주되고 이 세상에서처럼 어리석게 여겨지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더욱이 하늘의 관점에서는 이 세상 미인들의 거만함은 잔인함으로 여겨질 수 있으며, 배은망덕이 미덕이라고 불려지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받는 사람으로부터 비웃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처럼 시드니는 6행 연구에서 변덕스러운 여인이 행한 불합리한 행동과 자신의 사랑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대해 달과 하늘의 최고 권위를 끌어들이고 초자연적인 무게를 더하여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동원되고 있는 수사적 의문들은 모두 ‘아니오’라는 대답이 나올 것들이다. 앞서 조용한 어투로 슬픔에 잠겨 우울하게 이야기하던 말투도 억눌린 분노 속에 매우 신랄하고 아이러니한 어조로 바뀌고 있다. 시 전체를 통해 볼 때 개인적인 목소리와 전통적인 목소리 사이가 대립되며 나란히 등장함을 알 수 있는데, 시인의 독특한 감정은 “날카로운 화살”을 가진 “분주한 궁사”나 “오래 사랑에 익숙한 눈”과 같은 상투적인 구절들과 병치되고 있다.
달은 지구에서 가장 가까우며 그만큼 불완전한 천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달 아래”(sublunary)라고 말하는 지상에 있지 않고 지구 밖 하늘에 존재하면서 비교적 숭고함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시에서는 가장 높은 위치인 하늘에 위치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달은 천상과 지상의 속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지구와 가까이 있어서 지상의 감정을 같이 느낄 수 있는 한편, 천체에 속해 있으므로 시인의 사랑 문제에 대해 신의 관점에서 정의 내리고 벌을 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달의 이미지를 선택함으로써 인간과 자연계의 결합뿐만 아니라 인간과 초자연적 세계와의 가까운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Garrett 42).
그러면 여기서 시드니 당시의 문화적․정치적 환경 속에서 시를 잠시 분석해보기로 하자. 이 시에는 시인이 말년에 경험한 불안한 정치적 입지와 거기서 느끼는 긴장과 갈등, 불만 등이 드러나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는데, 이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귀족적 이상이 지닌 허구성에 대한 고발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시드니는 아스트로필이 스텔라에게서 느끼는 성애적인 감정의 틀을 빌어 개인적인 욕망과 공적인 의무감 사이에서 느끼는 갈등과 정치적 좌절감 등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31번 소네트」도 엘리자베스 시대 궁정인의 입장을 고려하여 읽을 때는 단순히 남녀 관계에서 느끼는 개인적인 욕망과 갈등, 번민, 자기분열 등을 노래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접근이 가능하다. 시드니는 시 속에 궁정인들이 겪는 유혹과 고뇌, 책략과 기쁨 등을 치밀하고 교묘하게 드러내고 있어서, 독자들이 이러한 맥락을 무시하지 않을 때 텍스트가 지닌 다층적이고 풍요로운 의미의 층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연인들이라면 한 번쯤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써보고 얼굴도 그려보고 했던 적이 있을 것이며, 이러한 장면은 드라마나 노랫말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75번 소네트에는 바로 이러한 아름다운 장면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여 달라는 소망과 그 사랑이 영원히 변치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어느 날 모래사장에 그녀의 이름을 썼더니
파도가 밀려와 지워 버렸네.
또 다시 그녀의 이름을 써 봤지만
파도는 밀려와 내 수고를 삼켜버렸네.
그녀의 말, “부질없는 사람, 덧없이 죽을 나를
불멸케 하려고 헛되이 애쓰다니요.
나도 이 파도처럼 사라지고
내 이름 역시 마찬가지로 씻겨나가고 말텐데요."
내가 대답하길 “그렇지 않아요. 하찮은 자들이야 흙으로 돌아가
죽을지라도 그대 이름은 영원히 살아남으리.
내 시가 그대의 고귀한 미덕을 영원하게 하고
하늘에 당신의 빛나는 이름을 적을 테니까.
죽음이 온 세상을 정복한다 해도
우리 사랑은 살아서 삶이 다시 새로워 질 것이요.”
One day I wrote her name upon the strand,
But came the waves and washèd it away:
Agayne I wrote it with as second hand,
But came the tyde, and made my paynes his pray.
“Vayne man,” sayd she, “that doest in vaine assay,
A mortall thing so to immortalize,
For I my selve shall lyke to this decay,
And eek my name bee wypèd out lykewize.”
“Not so,” quod I, “let baser things devize,
To dy in dust, but you shall live by fame:
My verse your vertues rare shall eternize,
And in the heavens wryte your glorious name.
Where whenas death shall all the world subdew,
Our love shall live, and later life renew.”
▶ 1. strand: beach
4. tyde: try, attempt, effort paynes: pains
5. Vayne: Vain assay: try
8. eek:also
9. quod: said devize: contrive
10. dy: die
시간의 무자비한 파괴를 뛰어넘는 사랑과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위대한 시라는 주제는 셰익스피어가 가장 즐겨 다루던 주제이기도 한데, 스펜서는 이를 풍성하게 울리는 소리의 효과를 이용하여 잘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