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다. 어차피 약육강식의 승자가 모든 것을 독차지하게 됨으로써 패자는 곧 죽음을 의미하였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육체적 노동으로 살아야만 하는 질곡(桎梏)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고전의 별미라고 하는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을 무대로 벌어진 약 40여 일 간의 기록이다. 주인공인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하여 연민으로 끝나는데 이는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널리 상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후에도 전쟁으로 인한 각종의 인과관계를 그린 작품은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오랫동안 전쟁문학의 금자탑으로 꼽히는 소설은 아무래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이다.
작가가 5년간(1863∼1867년)에 썼던 작품으로 전 4편과 에필로그 2편으로 되어 있다. 전반에는 중심인물인 귀족들의 생활과 프랑스와의 국외에서의 전투, 후반에서는 「나폴레옹」의 침공에 따른 국내에서의 전투와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사상적 문제가 다루어져 있다.
1805년 전쟁, 1812년 전쟁 등 러시아의 운명을 바꾼 굵직굵직한 서사의 역사를 묘사한 솜씨는 분명 『일리아스』에 견줄만하다. 또한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인간들의 삶과 죽음을 냉엄하게 굽어보는 시선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대를 관통하는 한 편의 서사시를 보는 듯하다. 전쟁을 치루는 동안 다양한 사람들이 절망과 고난을 딛고 일어서는 과정에서 「톨스토이」는 러시아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 영웅이 아닌 보통의 인간임을 강조하면서 현대판 『일리아스』를 완성했다.
이 소설은 단순한 역사소설을 넘어 일반 문학소설의 특징이 잘 조화된 작품이다. 주인공은 지독한 허무주의자 「안드레이」 공작과 부유하고 방탕한 상속자 「베즈호프(피에르)」, 그리고 원초적이고 아름다운 「나타샤」이다.
「안드레이」는 전형적인 귀족으로 명예욕이 강하고 현실적이며 「나폴레옹」을 열렬히 숭배한다. 그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부상당한 뒤 삶의 허무감에 사로잡혀 현실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인간의 가치는 사랑과 희생에 있음을 깨닫는다.
「피에르」는 「나폴레옹」을 영웅시 하지만 농민병사 「플라톤 카라타예프」를 만난 뒤에는 신(神)의 의지를 믿게 된다. 그리하여 자기가 찾고 있던 지고지선(至高至善)의 길을 발견하게 되며, 많은 고난과 도전 끝에 인생의 목적은 살아남는 데 있다는 점을 깨닫고 주어진 삶을 충실하고 발랄하게 살아가는 「나타샤」와 함께 새 생활의 길을 찾아 떠난다. 처참한 전쟁 상황이 이 소설의 배경이지만, 의외로 밝은 청춘의 빛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이른바 이 작품에서 이러한 「피에르」와 「나타샤」의 긍정적인 삶의 철학 때문이다.
그러면서 작가는 이들 주인공이 속한 「볼콘스키」가와 「베주호프」가 및 「로스토프」 가문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개인의 슬픔, 기쁨, 고민 같은 가정적인 요소를 짜 넣어 이 소설이 전쟁과 사회정의 문제를 다룬 역사소설의 영역을 넘어 문학성도 지닌 세계 최고의 고전이 되게 하고 있다.
특히, 작가는 소설 속에 고난에 굴하지 않고 살아가는 많은 민중들을 등장시킴으로써, 그들이야말로 러시아 정신의 구심점이자 역사를 움직이는 주인공들임을 보여주고 있다. 즉, 역사를 주도하는 원동력이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의 자유의지에 있지 않고, 다수의 이름 없는 일반 민중의 인과 관계의 교차와 총체 된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위대한 작가 자신도 말년에는 아내와의 불화로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고 집을 나와 작은 간이역에서 죽었다. 그의 단편 소설인 『사람에게 많은 땅이 필요 한가』의 주인공인 「파홈」처럼 두, 세 평 남짓한 고향 땅인 야스나야 폴랴나(Yasnaya Polyana)숲 속에서 영면하고 있다.
바바라 터크만의 교훈
역사적으로 수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가장 인류에게 큰 손실을 준 전쟁은 1차 세계대전 이었다. 그 때까지 사상 최고 수준으로 발전한 인류 문명이 한 순간에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도저히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요인들이 작용하여 상상을 초월하는 대재앙을 불러온 것이다. 잠깐이면 끝내리라 생각하고 시작했던 전쟁은 무려 4년 넘게 지속되면서 세계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당시 옥스퍼드 및 캠브리지 출신의 젊은 지성들이 1천명 넘게 전사했으니 그 문명의 후퇴는 가늠할 수 없다.
그런데 미국의 바바라 터크만(Barbara Tuchman : 1912~1989)여사는 그러한 전쟁에 이르는 배경인 유럽의 정치 상황과 전쟁의 발발, 각 국의 작전계획, 일련의 주요 전투와 이어 처참한 소모전의 시초가 되는 참호전이란 수렁으로 빠져드는 『마른』 전투에 이르는 숨 막히는 한 달간의 과정을 기록한 『8월의 포성』을 썼다. 더구나 마치 드라마를 보는 듯 생동감이 넘치는 표현으로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한다. 철저한 고증과 분석으로 객관적인 시각이 돋보이는 보기 드문 수작이다.
그녀는 이 외에도 『짐머만의 전보 : 세계역사를 바꾼 전보에 대한 심층 분석을 기술한 책이다. 1차 대전 막판까지 중립노선을 고수하던 미국이 1917년 4월 참전을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독일 외무장관 「짐머만」이 미국의 자국 대사에게 보낸 전보에서 미국의 중립을 유도하되 성공하지 못할 경우 멕시코 및 일본과 동맹을 맺고 미군이 본토를 떠나지 못하게 한다는 내용이 공개되자 미국 여론이 참전으로 선회』와 『바보들의 행진 : 트로이전쟁부터 베트남 전쟁에 이르기까지 3000년 동안 이어진 오만한 통치자들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케네디」를 비롯한 역대 대통령에 의한 베트남 전쟁 개입의 오류와 위선을 지적하였다.』을 저술하는 등 두 차례나 퓰리처상을 수상한 역사학자이다.
여하튼 『8월의 포성』이 1962년에 출간이 되자마자 흥행에 성공하였다. 「케네디」대통령도 각료들에게 일독을 권했으며 영국의 「맥밀란」수상에게 이 책을 증정하면서 오늘날의 정치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1914년 8월과 같은 전쟁의 시발이 된 함정은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책의 영향을 받은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 10월에 발생한 미사일 위기 발생 시 군부 강경론자의 쿠바 미사일기지 선제타격 주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협상을 통해 일촉즉발의 위기를 해결하였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는 단초를 주어 수많은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대외정책은 이후 막대한 비용과 인명 손실을 초래한 아쉬움이 있다.
저자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박진감 넘치는 문체로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당시의 사실관계를 복원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서 이 책을 통해 어리석은 군주들과 외교관들 및 장군들이 잘못하여 아무도 원치 않았던 전쟁을 일으킨 과정을 생생하게 재구성하였다.
결국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위치에 있는 지도자들이 현명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대처해야하는 중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지 못하면 그 지도자가 속한 국가뿐만 아니라 온 인류도 전대미문의 대재앙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도 조선왕조 시 세상의 정세에 어두운 왕을 만나 주변국의 침탈에 시달리고 국권을 빼앗긴 기억이 생생하다. 더구나 아직도 국민 간 화합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실은 답답한 일이다. 우리는 전쟁억제가 가능한 최소한의 자위력을 기반으로 미국을 비롯한 주변의 이해 당사국들과 유연한 외교력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특히, 국가 지도자일수록 세계정세에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고도의 외교력을 발휘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의 직접적인 희생자는 바로 일반 국민이다. 그야말로 영문도 모르고 전쟁터의 희생자가 되면서 가정은 깨지고 삶은 피폐해 지며 인간의 존엄성마저 말살된다.
그런 과정을 잘 알고 있는 지도자라면 누구보다 평화를 사랑하는 애민정신을 구비해야 한다. 따라서 전쟁 예방을 하고 평화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사명감이 투철해야 한다.
함부로 전쟁 불사를 운운하며 미국의 용인 없이는 불가능한 핵무장까지 주장하는 견해에 동조해서는 곤란하다. 이는 자칫 평화로운 삶을 파괴하고 국가와 국민의 생존을 해치는 미망(迷妄)일 뿐이다. 자신의 삶이 안전하다고 해서 일반 민초들의 생명과 재산을 경솔하게 생각하는 잘못을 태연하게 범한다면 이는 역사를 거스르는 우둔한 필부의 만용일 뿐이다.
(2023.4.20.작성/4.24.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