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스님 (1872-1965)
[ 구하스님 진영 ]
구하스님은 1872년 5월7일 태어났다.
고향은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 였으며, 부친은 김한술(金漢述) 선생. 본관은
경주였다. 모친은 신씨(申氏)였다. 법명은 천보(天輔), 법호는 구하(九河)이다.
축산(鷲山)이란 자호(自號)를 사용했는데, 통도사의 영축산(靈鷲山)을 상징한
다. 어려서 고향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스님은 양친에게 출가를 고(告)하고 집
을 나섰다. 이때가 1884년 겨울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해였다.
천성산 내원사에서 경월(慶月)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후 예천 용문사 용호해주
(龍湖海株)스님 문하에서 교학을 배웠다. 1896년 구족계를 수지했다. 같은 해
성해남거(聖海南巨)스님의 전법제자가 되었다. 구하라는 법호도 이때 받았다.
수행을 거듭하던 구하스님은 1905년 통도사 옥련암에서 정진하다 깨달음의 경
지를 맛보았다. 1911년 11월부터 1925년 8월까지 통도사 주지를 역임했고,
1917년 1월부터 3년간 삼십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을 지냈다.
불교중앙학림(지금의 동국대) 학장을 맡아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49년에는
중앙불교총무원장을 역임하고, 1963년 10월3일 원적에 들었다. 세수 94세. 법납
82세였다.
제자는 전 종정 월하(月下) 스님 등 30여명의 출가제자가 있다. 문손들은 구하
스님이 남긴 시(詩)와 문(文)을 엮은 <축산문집>과 <금강산관상록>을 발간했다.
통도사 주지 정우스님은 “오로지 국권을 빼앗긴 나라에서 민족을 지키고자 했
던 수행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살아계시는 스승으로 모시고자 한다”고 밝혔다.
한편 통도사는 남현스님이 사적 편찬실장을 맡아 <구하대종사 민족불교운동사료
집>을 펴내는 등 친일명단에서 구하스님이 삭제되도록 적극 노력했다.
구하스님이 남긴 글 /스님은 말년에 보광별당(普光別堂)에 머물며 당신의 삶을
정리했다. 귀가 어두웠던 스님에게 후학들이 인사드리며 “갑갑하지 않으시냐”
고 질문하면 “시시한 세상 안 들어 오히려 편하다”고 했다. 스님은 입적을 예
감하고 직접 만사(輓詞)를 지었다.
<축산문집>에 실린 내용은 이렇다.
自輓(자만)
此身不欲百年生(차신불욕백년생) 了達淸眞脫世情(요달청진탈세정)
心契彌陀三聖願(심계미타삼성원) 神駝兜率一輪明(신타도솔일륜명)
紅爐點雪歸何處(홍로점설귀하처) 白月香風震法城(백월향풍진법성)
無去無來元體性(무거무래원체성) 逍遙自得任縱橫(소요자득임종횡)
“이 몸은 백 년의 삶을 원하지 아니하고 / 세정을 벗어나 청진을 요달코자 했도다 /
마음이 아미타 삼성의 원과 계합하고 / 정신이 도솔천으로 달리니 둥근 달이 밝네 /
화로 속의 눈은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가 / 밝은 달 향기로운 바람 법성에 떨치네 /
원래의 체성은 감도 옴도 없나니 / 종횡으로 소요함을 임의대로 맡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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