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찻길과 함께한 시간들
이성칠
나의 고향은 금오 영봉을 좌로 돌아 효자봉, 황금봉을 흘러내려 노루봉과 직살뫼가 에워싼 소나무가 많은 다송 마을이다.
기찻길을 넘나들며 고불고불하게 난 흙탕길을 따라 1, 6일 구미장 가는 길옆 주막걸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
70여 호나 되는 안 동네와는 떨어져 10여 호가 달동네처럼 함께 했지만, 이웃사촌처럼 지냈다. 기찻길과 바로 접한 집은 기름도 짜고 국수도 뽑고 구멍가게를 했다. 바로 옆에는 하구미에서 유일한 대장간이 있었다. 바로 아버지께서 경영하는 그 당시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는 사기업체인 셈이다. 집은 철길로부터 다섯 번째에 위치하지만 150m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아홉 남매의 가운데에 맏이로 태어났다.
무연탄을 원료로 시꺼먼 연기를 내뿜으며 요란한 기적소리와 함께 묵직한 쇠뭉치가 엔진을 돌리며 힘차게 짐칸들을 달고 지나가는 증기기관차를 보면서 유년 시절을 함께 했다. 우리 동네가 상하행선 양쪽으로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지형인데, 간혹 고삐가 몇 킬로미터나 떨어졌다가 후진해서 다시 연결한 뒤 끌고 가는 재미나기도 하고 신기한 모습들을 보곤 했다.
또한 탱크나 고사포 같은 신형 무기나 고장 난 무기들을 실은 열차가 지나가곤 했다. 무기마다 희고 검은 처음 보는 외국 군인들이 탑승 했다.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천천히 지나가는 기차길옆으로 나란히 난 수리 도랑 옆길을 뛰어가면서 ‘초코레트 기브 미!’라고 외치곤 했다. 가끔 인심 좋은 멋있게 생긴 군인들로부터 버터나 치즈, 초콜릿 등을 던져주면 손을 한없이 흔들었다. 그러나 그냥 지나치면 작은 주먹으로 거창하게 욕 먹이는 모션을 돌려주곤 했다.
그러던 중 점차 기관이 디젤로 바뀌면서 동차, 객차, 완행열차, 급행열차, 대통령 전용열차, 무궁화호, 새마을호를 보았고, 최근엔 KTX가 몇 번 지나가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의 놀이터는 철길 넘어 벼를 베어낸 논바닥이었다.
숨바꼭질할 때면 활짝 핀 흰색과 빨강색의 코스모스에서 풍기는 신 꿀 냄새가 어린 콧구멍을 건드렸다. 수없이 많이 날아든 꿀벌은 사내애들의 검정 고무신에 조리돌림 뒤 땅바닥에 패대기쳐지고 똥구멍 벌침을 뽑아내면 대롱대롱 매달려 빠져나온 0.1 그램의 꿀을 달게 빨곤 했다.
초등학교 등하굣길은 기찻길 아래 토끼굴 같은 굴을 지나야 하는데 운 없으면 기차가 지날 때 기차의 밑바닥을 순간적으로 볼 호기심에 조그만 귓구멍이 터질 듯이 꽉 찬 굉음에 온몸으로 떨곤 했다.
15리 중학교까지 절반은 기찻길이 등하굣길이었다. ··· (감사합니다! 2회는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