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포 마을 입구 송병준 별장 터
친일 합작 업자 1호, 창씨개명 1호
예로부터 해운대는 산과 바다, 강이 조화를 이루어 천혜의 경관을 지닌 선경지(仙境地)로 알려진 곳이었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와우산(지금의 달맞이언덕) 기슭 미포마을 어귀에는 송병준(1858~1925)을 비롯해 고관대작들의 별장 4곳이 들어섰다.
당시만 해도 해운대는 춘천의 잦은 범람으로 취락지(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로는 적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연제방이 높아지고 1985년 일본인 의사 와다노 시게미즈(和田野茂光)에 의해 온천 자원이 개발되면서 별장이 들어서기에 아주 좋은 입지가 형성되었다.
송병준 별장의 위치는 미포 6거리 교차로에서 미포 마을로 들어가다 오른쪽 중동 1087번지 1~37호(현재 김선장 횟집과 메종꽃대) 일대이다. 이곳은 와우산 자락 남쪽 계곡이었다. 지금은 도로와 높이가 같지만 그때는 남동쪽으로 축대를 높게 쌓아 별장 터를 만들었다. 옛 동해남부선 철로 교차로에서 서쪽으로 가면 그 당시 쌓았던 축대가 남아 별장이 있었던 흔적을 알려주고 있다. 축대는 동서 길이가 100m, 남북 길이가 80m, 높이가 4m로 직사각형이었다. 축대의 돌은 엘시티 신축공사 현장 앞 일대의 차돌을 운반하여 단단하게 쌓았다고 하는데, 대지 면적만 해도 8,000제곱 미터에 4채의 별장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별장 터
1999년 경 모습
송병준은 함경남도 장진에서 하급 관리 송부수와 기생첩 덕산 홍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천한 신분의 부랑아에서 장사꾼으로, 다시 친일 정치가로 변신하면서 부와 권력을 쥔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을사오적과 함께 나라를 팔아먹은 공로로 일제강점기에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친일 합작업자 1호, 창씨개명 1호라는 악명을 가진 자였다.
일본이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하자 송병준은 고등 통역관으로 귀국하여 전쟁 동안 군납상인으로 이권을 챙겼다. 또한 일진회 의장을 맡아 군부의 배경을 업고 일진회를 손아귀에 넣고 주물러댔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토 히로부미는 송병준을 농상공부대신으로 발탁하여 그 공을 높이 인정해 주었다. 이렇게 친일세력으로 출세 길에 오르면서 1905년 와우산 남쪽 자락에 별장을 짓기 시작하였다. 산자락의 지형이 낮아 석축을 높이 쌓아 지은 별장은 우뚝 솟은 위세가 권세가의 권위를 상징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송병준은 헤이그 밀사사건(1907년) 이후 내무대신을 맡았고, 한일병탄(1910년)의 공로로 자작의 지위와 은사금 5만 원을 받았다. 그는 끝까지 한 점의 동요도 없이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면서 그 많은 재산과 직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죽었다
그가 죽고 난 후 1937년 별장 앞으로 동해남부선 철로가 부설되고 동서쪽으로 도로가 개통되면서 별장 주변 지역은 뛰어난 풍광을 서서히 잃어갔다. 이후 1945년 광복이 되기 전에 별장은 사라져 그 규모나 구조를 알 길 없는 것이 아쉽다고 주영택 향토사학자는 말한다.
/ 이광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