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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6:9-16절) 하나님의 매 父母가 자기의 자녀(子女)를 불러다가 때리는 것과 깡패가 남의 자녀를 잡아다가 때리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일입니다. 부모가 자기의 자녀를 때리는 것은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중에라도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이 보이면 더 이상 때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깡패가 아이들을 잡아다가 때리는 데에는 아무 목적이 없습니다. 때리는 것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그래서 깡패한테 맞은 후에 잘못을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깡패한테 맞는 것은 몸과 마음만 상하게 할 뿐,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매질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집에 가 보면, 여러 대의 매가 잘 보이는 곳에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집에도 매가 여러 대 있습니다. 그 중에는 기근(飢饉)도 있고, 전쟁(戰爭)도 있고, 병충해(病蟲害)도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잘못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 한 가지 매를 들어 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매를 제대로 맞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매를 맞을 때마다 하나님을 떠날 핑계로 삼아서, 더 이방 신(神)을 쫓아가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어려움을 해결하려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기근(飢饉)의 매를 드시면, 이방인들처럼 풍년제(豊年祭)를 드리거나 다른 나라에서 곡식을 빌려 와서 해결하려 했고, 전쟁(戰爭)의 매를 드시면, 외교관계를 이용해서 피하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웬만한 매로는 유다를 정신 차리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아주 무서운 매를 따로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매였습니다.
Ⅰ.완전한 지혜 예전에 어떤 부모가 아들을 직접 경찰서에 끌고 가 처벌을 부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타일러도 안통하고, 때려도 안 통하니까, 결국 경찰서까지 끌고 간 것입니다. 자녀가 잘못된 길로 나갈 때, 부모는 매질을 해서라도 바로잡으려 합니다. 그런데 자녀가 약삭빠르게 부모를 피해 다니면서 매를 맞지 않는다면, 그것을 과연 지혜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본인은 지혜롭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동태(動態)를 잘 살피다가 부모님이 없을 때에만 살짝 집에 들어가 음식이나, 옷이나, 돈을 가지고 나오면서, 스스로 자기 머리에 감탄(感歎)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동안에도 자신은 점점 더 타락해 가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부모에게 붙들려서 실컷 두들겨 맞고, 다시 출발하는 편이 훨씬 지혜로울 것입니다. 9절)여호와께서 성읍을 향하여 외쳐 부르시나니 지혜는 주의 이름을 경외함이니라. 너희는 매가 예비 되었나니 그것을 정하신 이가 누구인지 들을지니라.”여기서‘성읍(城邑)’이라는 말 앞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그 성읍’이 되는 것입니다.‘그 성읍’은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외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완전한 지혜는 인간적인 수단이나, 방법이나, 꾀를 동원해서 매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순히 매를 맞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돈이 없는데, 물건을 갖고 싶을 때, 카드로 사 버리거나, 돈을 빌려서 사 버리는 식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지혜가 곧 그런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주시면, 그냥 그 어려움을 당해야 하는데,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자꾸 해결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더 이상 도망치지 말고, 겸허하게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라고 하시면서, 그것이 완전한 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의 이름을 경외하라’는 것은 주의 이름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즉 더 이상 인간의 꾀를 의지하지 말고, 순순히 하나님의 매를 맞으라는 뜻입니다.‘너희는 매를 순히 맞고 그것을 정하신 이가 누구인지 들을지니라.”그들이 지금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니, 그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매를 맞으면서도 자신들의 삶을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즉 직장을 빼앗아 가시면, 빼앗아 가신 대로 지출을 줄이고 살아야 하는데, 빚을 끌어다가 여전히 풍족하게 살려고 했습니다. 또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돌아올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반항하면서‘갈 데까지 가 보자’는 식으로 버텼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한번 어려워진 처지를 인정하고 나면, 완전히 그 자리에 눌러앉게 될 것 같고, 다시는 재기(再起)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처지를 인정한다 해서 절대로 비참하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어려움을 순히 받는 것이 오히려 완전한 지혜(智慧)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이 올 때,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여러 가지 궁리를 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꾀입니다. 하나님께서 쓴 약(藥)을 주시면, 눈 딱 감고 마셔 버리는 것, 즉 가난하게 만드시면, 가난한 대로 사는 것입니다. 또 고생하게 하시면 고생해 버리는 것, 욕을 먹게 하시면 욕을 먹어 버리는 것, 그것이 지혜(智慧)입니다. 지금 내 모습이 마음속에 그리고 있던 모습과 다르다 해서 인정하지 않고, 자꾸만 피하려고 들 때, 어려움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Ⅱ.유다 백성들의 삶을 공허하게 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의 삶을 공허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4-15절)네가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고 항상 속이 빌 것이며 네가 감추어도 보존되지 못하겠고 보존된 것은 내가 칼에 붙일 것이며 네가 씨를 뿌려도 추수하지 못할 것이며 감람 열매를 밟아도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를 밟아도 술을 마시지 못하리라”여기‘먹어도 배부르지 항상 속이 빈다’는 것이 무엇일까?
옛날에는 그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뱃속에 회충(蛔蟲)이 많아서 아무리 먹어도 배부른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를 쓰고 돈을 모았는데, 나중에 결산해 보면, 엉뚱한 데로 새 나가서 남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또 씨를 뿌려도 거두지 못하고, 감람 열매를 밟아도 기름을 바르지 못하며, 포도 열매를 밟아도 술을 마시지 못합니다.
이렇게 고생은 실컷 했는데도 나는 하나도 못 누리고, 남들이 다 가져다 버린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이것은 유다 백성들이 농사지은 것이나, 모은 재산들을 하나도 쓰지 못하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갈 일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마치 부인(婦人)들이 시장에 가서 10원, 20원 깎는 것도 모자라 주인이 안 볼 때, 한 줌 더 얹어서 사온 콩나물을 버스 안에 두고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 얼마나 허망(虛妄)합니까? 누가 그거 가져다가 국 끓여 먹을 걸 생각하면, 속이 다 부글부글 끓지 않을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구원(救援)입니다. 결혼이나, 돈이나, 지위나, 차나, 집은 거기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구원(救援)은 저버리고, 부수적(附隨的)인 선물을 더 좋아하며 붙잡을 때,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아무리 쌓아도 남지 않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열매를 거두지 못합니다. 즉‘밑 바진 독에 물 붙기 식’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여자가 왕자(王子)와 결혼했다면, 온갖 좋은 선물이 그 뒤에 다 따라올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물이 너무 좋아서 왕자(王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쫓겨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형통한가에 따라 신앙 상태를 점검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데도 형통(亨通)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욕망이 강해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듣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형통하도록 내버려 두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이들에게 아무리 주의(注意)를 주어도 뜨거운 것을 만지려 할 때,‘어디 한번 만져 봐라. 얼마나 뜨거운지 알게’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방 선지자 발람이 곧 이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는 자리에 가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으로 이미 가기로 결정해 놓고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이처럼 돈에 대한 유혹이 너무나 강해서 이미 말릴 수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가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한번 가서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깨닫기 전에는 절대로 그 욕심을 포기하지 못할 것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발람의 입술을 붙잡아 축복의 말로 바꾸셨습니다. 그러나 발람 자신은 여호수아의 칼날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내 마음대로 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은 절대로 복(福)이 될 수 없습니다. 내 욕심껏 나아가도록 길이 활짝 열리는 것은 당장은 형통(亨通)해 보여도 결국은 망(亡)하는 길입니다. 때로는 기도는 응답이 되었는데, 영혼(靈魂)은 더 파리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응답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매사를 어렵게 만드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가지고 있던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가져가셔서 인생 밑바닥으로 떨어뜨리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형통(亨通)치 않은 삶 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연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무언가 손에 잡히는 것이 있으면, 믿음으로 살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부 가져가셔서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세상 것은 잃어도, 하나님을 얻게 됩니다. 즉 병원에 누워서 성령을 체험하고, 부도난 자리에서 성령을 체험합니다. 이렇게 망하는 것은 오히려 좋은 일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앞으로 경험할 일이 곧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포로로 만들어 그 믿음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연단에는 반드시 끝이 있게 마련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백성들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형통치 못하게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15:2절)...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은 주변에 있는 가지나 꽃망울 같은 것들을 제거해서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세상에서 복잡한 삶을 사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여러 가지 것을 하고 싶어 해도 주님이 가지를 치셔서 중요한 일에만 집중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를 사랑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완전히 포기하셨기 때문에 형통케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에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잔칫집 돼지와 같습니다. 지금은 실컷 먹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일이 항상 뜻대로 잘 풀리는 사람은 택한 백성이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모든 일이 잘 풀릴 수가 없습니다. 찬송가 384장/나의 갈 길 다 가도록 만사형통하라' 는 가사도 있지만, 사실은 만사 불통(不通)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지혜(智慧)요, 복(福)입니다. 그럴 때, 불평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하나님 제 뜻대로 안 되어서 감사합니다.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해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완전히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정말로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십니다.
이처럼 현실적으로 형통한가, 형통하지 못한가만 보고, 하나님의 복(福)이다. 아니다.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도 형통치 못하고 어려움이 온다면, 그것을 꼭 필요해서 주시는 어려움인 줄 알고, 감사해야 하며, 그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즉 병들었으면 병든 대로 링거 꽂고 치료받으면서, 입원실에 같이 있는 사람들 전도하면서 지내는 것이고, 가난하게 하셨으면, 가난한 대로 부족하게 살면서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지내는 이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예수 믿는 게 참 무섭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智慧)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우리의 가능성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싫어서 자꾸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피하려 들면, 마음이 점점 더 강퍅해 지게 되고, 결국에는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잡혀 가게 됩니다. Ⅲ.유다 백성들의 불순종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열거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선(善)한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이미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10-12절)악인의 집에 아직도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느냐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 그 부자들은 강포가 가득하였고 그 주민들은 거짓을 말하니 그 혀가 입에서 거짓되도다.” 10절)악인의 집에 아직도 불의한 재물이 있느냐? 는 말씀은 우리 귀에 자연스럽게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면 악인(惡人)의 집에는 불의(不義)한 재물이 있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변역 성경 히브리 단어를 약간 바꾸어서‘악인의 집에 불의의 재물이 있는 것을 내가 잊겠느냐? 라고 변역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절대로 그것을 용서하지 않고, 기억하시겠다는 의미로 본 것입니다. 여하튼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을 악인(惡人)으로 보고 계시며, 그들의 집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재물을 불의(不義)의 재물로 보고 계십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부정한 저울과 거짓 저울추를 사용해서 물건의 양(量)을 속여 팔았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조금씩만 속여도 이익이 얼마나 늘어나는지를 잘 압니다.
예를 들어서 옛날에는 쌀을 어떤 식으로 깎아서 되어 주느냐 에 따라 이익에 큰 차이가 발생했습니다. 상인들은 중간에서 이익을 남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줄 것은 할 수 있는 한 주지 않으면서, 받을 것은 악착같이 받아내야만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줄 것 다 주고 받을 것 겨우 챙겨 받으면,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또 부자들은 부자들대로 강포(强暴)를 행해서 이자나 빚을 갚지 못한 사람들을 전부 팔아 버렸고, 주민들은 주민들대로 뇌물(賂物)을 받고, 거짓 증거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억지로 부자(富者)가 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저 밥 먹고 살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왜 자꾸만 인간적인 방법으로 무리해서 많은 것을 쌓으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무언가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자기 것은 무섭게 챙긴다면, 그 은혜가 과연 온전한 은혜겠으며, 그 신앙이 과연 참된 신앙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아도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참 믿기 어려운 약속(約束)입니다. 그러나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강한 성령 체험을 했다고 주장하는데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은혜의 국물도 흘러가지 않는, 참으로 이상한 신앙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기본적으로 요구하시는 바는 남의 것을 건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남의 것은 아예 가질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작은 것에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즉 공부 좀 못해도 자기 자식에게 만족해야지, 머리 마구 쥐어박으면서‘야, 저 집 애는 전교 l등 했다는데 넌 누구 닮아서 이 모양이냐? 고 구박하는 것은 죄(罪)입니다. 또‘우리 집 마누라는 밥만 많이 먹고 바가지만 긁는데 저 여자는 정말 상냥하네.’하면서 남의 부인(婦人)을 곁눈질하는 것도 죄(罪)입니다. 남의 것에는 아예 눈길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또 되도록 줄 것은 빨리 주고, 받을 것은 천천히 받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악착같이 제 것을 챙기는 사람들처럼 돈을 많이 벌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중요한 것은 남의 행복을 해쳐 가면서까지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의(義)로운 것과 선(善)한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의(義)로운 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즉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는 것이 의(義)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선(善)한 것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을 복(福)되게 하기 위해 내 것을 손해 보고, 희생하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선(善)한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도 하나님께서 선(善)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이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선(善)한 삶은 고사하고 의(義)로운 삶마저 살지 못할 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는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남들은 얼마든지 불행해져도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3절)그러므로 나도 너를 쳐서 병들게 하였으며, 네 죄로 말미암아 너를 황폐하게 하였나니”하나님께서는 이미 유다에게 중상(重傷)을 입히셨습니다. 유다는 중병(重病)에 걸린 사회(社會)였습니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는 치료할 수 없으며, 대수술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또 황폐하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도 없고,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社會)도 중병(重病)에 걸려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문제들이 잘 해결되지 않습니까? 사실은 중병(重病)에 걸려 있는데도 간단한 정책(政策)하나로 회복될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순간에 돈벼락 맞을 기대를 하거나, 예전에 돈 잘 벌린 시절처럼 전부 누리고 살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지금 처지에 자족(自足)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Ⅳ.왜 매가 필요한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왜 매가 필요할까?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실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意圖的)으로 잘못된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16절)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예법을 지키고 그들의 전통을 따르니 내가 너희를 황폐하게 하며 그의 주민으로 사람의 조소 거리로 만들리라 너희가 내 백성의 수욕을 담당하리라” 그 당시, 세상에는 두 개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북쪽 이스라엘이었고, 하나는 남쪽 유다였습니다. 유다는 그래도 비교적 말씀에 충실한 편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일찍부터 세상적인 방법을 끌어들여 번영(繁榮)을 누렸습니다. 이렇게 세상적인 방식을 끌어들이는데 앞장선 사람들이 곧 오므리와 그 아들 아합니다.
그들과 외교(外交)와 종교 혼합(混合)정책을 통해 이스라엘을 번창(繁昌)케 했습니다. 그 당시 주위 나라들은 전부 바알 신(神)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군사동맹을 맺으려면, 바알과도 계약을 맺어야 했습니다. 오므리와 아합은 이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문제는 유다도 그것을 좋게 여겨서 신앙의 순수성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그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보면, 오므리의 길이 현명했습니다.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작은 나라가 군사동맹(軍事同盟)도 맺지 않은 채, 어떻게 버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원하신 것은 그들이 좀 작아도, 좀 번창하지 못해도, 성경적인 신앙을 지키는 이것이었습니다.
말씀을 저버리고, 세상 적으로 잘되는 것은 절대로 축복(祝福)이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 적으로 부흥하는 것은 절대로 부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내가 언제 너희더러 너희 식대로 부흥하라고 했느냐? 어떤 경우에도 너희가 놓치지 말았어야 할 것이 있지 않느냐? 고 물으십니다. 말씀을 저버리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잘되려 하는 것은 아합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당장은 잘되는 것 같아도 결국 모든 것이 황폐(荒幣)해질 것입니다. 유다가‘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만 가지고 살겠다. 우리가 연약해서 맞게 되면 맞을 것이고, 터지게 되면 터질 것이다. 그러나 말씀만큼은 놓치지 않겠다. 이것이 우리 예루살렘의 신앙이 아니냐? 고 했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 주셨을 것입니다.
16절)...너희가 내 백성의 수욕을 담당하리라”고 하실 때,‘너희’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즉‘너희가 세상을 따라갔기 때문에 겉으로는 잘된 것 같아도 속으로는 비참해지고 말았다. 이제 그 책임을 너희 지도자들이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잘 될 때, 절대로 흔들리지 마십시오. 잘되지 않으면, 좀 어떻습니까? 못하면 좀 어떻고, 무능하면 좀 어떻습니까? 이런 순수한 신앙을 지키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 교회들이 세상적인 방법으로 잘될 때, 부러워하면 안 됩니다.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써서 요란하게 사는 것보다는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 때, 반드시 축복(祝福)받게 되어 있습니다. 유다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더욱 앞장서서 세상을 따라감으로써 예루살렘을 변질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지도자들이 얼마나 무서운 벌(罰)을 받게 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많은 지도자들이‘그래도 나는 교회를 부흥시켰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한 일이 아닙니다. 혹 엄청난 결과가 나타났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 자기가 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내가 이렇게 큰일을 했으니 혹시 잘못이 있어도 용서해 주시겠 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결과와 상관없이 그가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그 백성의 신앙을 어떻게 오염(汚染)시켰는지에 대해 물으실 것입니다. 발람을 보십시오. 그는 엄청난 축복(祝福)과 예언(豫言)을 했습니다. 성령께서 그를 강하게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해서 발람의 죄(罪)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祝福)한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자기 욕심 때문에 여호수아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법(法)을 따르지 않고, 세상적인 방식을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은 마치 부모의 말씀을 듣지 않는 깡패 아들과 같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손에 붙여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하십니다. 그럴 때, 그것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피하려 들면 더 큰 문제가 생기고, 상황이 더욱 복잡해집니다. 어려움을 주시면, 주시는 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론 세상 적으로 볼 때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지만,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智慧)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악(惡)의 세력은 우리를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공연히 우리의 것을 빼앗아 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깡패 아들들을 그들에게 맡겨서 정신을 차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구원(救援)에 따르는 하나님의 선물(膳物)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떠나서 하는 일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세상의 부귀(富貴)와 영화(榮華)는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 허망(虛妄)한 것을 정말 중요한 구원(救援)과 바꾸려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에 삶의 목적을 두지 말고,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에 삶의 목적을 두십시오. 하나님을 알아 가면서 기다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목사는 목사대로 꾸준하게 말씀을 밝혀 나가고, 교인들은 교인대로 말씀을 들으면서 5년,10년 지내다 보면, 상황이 확 달라져 있는 것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전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문제들이 해결되기 시작하는 날이 옵니다.
사랑하는 성도(讀者)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결심을 해야 합니다.‘나는 절대 나 잘되자고 남의 눈에 눈물 흐르게 하지 않겠다. 나에게 주신 작은 것에 만족하면서 살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기본입니다.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가려면, 남을 위해 손해 볼 생각까지 해야 합니다. 은혜는 은혜대로 받았다고 하면서 돈은 돈대로 무섭게 긁어모으는 사람은 바벨론에 잡혀 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렵고 답답한 일이 닥치는 데는 다 뜻이 있습니다. 고생하지 않으려고, 남에게 싫은 소리 듣지 않으려고, 미꾸라지처럼 이리 빼고 저리 빼는 것은 완전한 지혜(智慧)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욕을 먹는 것 두려워하지 말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김으로써 순종하며 기쁨과 감사와 성령의 충만함을 회복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祝願)합니다. 찬송가 204장 *주의 말씀 듣고서 *씨 뿌리는 자* 다음카페 교회갱신 성셩연구원 카톡선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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