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성이 참 많다. 성은 기본적으로 '보호'와 '경계'의 의미가 있다.
적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고, 적과 우리를 구분 짓는 기능을 했다.
성도 다 같은 성이 아니다. 종류가 다양하다.
기능에 따라 산성·읍성·도성 등으로 구분되며, 성을 쌓는 기술에 따라 석성·토성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산성은 산이 많은 우리나라 지형의 장점을 가장 잘 활용한 형태다.
침략 전쟁이 활발하던 삼국시대 때 가장 많이 축조됐다. 중부 이남 지역에만 1,200개 이상의 산성 터가 남아 있을 정도라니 과연 우리나라를 ‘산성의 나라’라고 부를만 하다.
읍성은 이름에서 보이는 것처럼 마을 속에 있는 성이다.
지역 군현에서 적으로부터 읍민을 보호하기 의한 목적으로 쌓은 성곽이다.
그래서 마을안에 있거나 마을과 최대한 가까이 있는 평지에 위치해있다. 마을의 관아 등 행정기관들이 읍성안에 위치해 있다.
읍성은 고려시대부터 나타나 조선시대에 대중화가 됐다.
특히 읍성은 조선 중후반기 이후에는 일본 등 외국 침략에 맞서는 중요 전초기지의 역할을 담당했다.
도성도 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쌓아 읍성과 형식이 거의 비슷하지만, 종묘와 사직을 갖추면 도성이고 그렇지 않으면 읍성이라 부른다. 경복궁 일대를 크게 한바퀴 도는 한양도성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산성과 읍성, 도성은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산성은 둘레가 100m도 안되는 아주 작은 곳이 있는 반면 10km가 넘는 거대한 곳도 있다. 산 초입에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산 중턱 이상에 위치해 있다. 적의 동태를 쉽게 파악하기 위함이다.
산성을 오를 때면 장엄하고 거친 파도가 가슴속에 몰아치는 느낌이라면 마을안에 있는 읍성은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이다.
국내 여행에 가서 그 지역의 산성과 읍성을 꼭 찾아가곤 한다. 같은 산성이나 읍성이어도 그 지역 형세에 따라 각각의 모양새와 풍광이 사뭇 달라, 그 성만이 내뿜는 독특한 아우라를 느껴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편하게 성곽길을 걸어볼 수 있는 조선 시대 3대 읍성을 소개한다. 고창 고창읍성, 순천 낙안읍성, 서한 해미읍성이다.
성밟기 놀이가 전해오는 고창읍성
전북 고창에 위치한 고창읍성은 '모양성'이라고도 불린다.
조선 단종 원년인 1453년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축조했다.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호남지역을 방어하는 전초기지가 됐다.
성곽길이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특히 철쭉꽃이 한창인 4월에는 성곽길을 따라 피어나는 붉은 철쭉꽃 행렬을 보기 위한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둘레는 1,684m이며 면적은 16만 5,858㎡로 상당히 넓다. 내부에는 관리들이 업무를 처리하던 동헌, 객사 등 건물들이 남아있다.
성벽길은 보존이 잘 되어 있고 어느 곳에서도 고창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데 그 풍경이 장관이다.
특히 고창읍성에는 성밟기 놀이가 전해온다.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만 극락승천한다고 한다. 이때 주의할 것은 반드시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세 번 돌아야 하며 성입구에 그돌을 쌓아 둬야 한다는 것이다. 성곽길이 아름답다보니 성곽풍경에 취하다보면 아마 어느 순간 세 바퀴 이상을 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성벽길 중간에는 일제 식민지 시절 2백여명의 시민들이 3.1 독립만세운동을 외쳤던 장소도 만날 수 있으니, 이곳에서 잠시 그날의 함성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지금도 주민들이 살고 있는 전통마을, 순천 낙안읍성
낙안읍성은 순천만 습지와 함께 순천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하나다.
낙안읍성이 다른 읍성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도 주민들의 일상 생활이 이어지는 실제 마을이라는 점이다.
읍성 내에는 옛날 관아 모습도 남아 있지만 대부분 주민들이 현재 살고 있는 곳이어서 낙안읍성을 거닐 때에는 최대한 조용히 걷는 게 예의다.
총 길이는 1,420m다. 1397년(태조 6년) 일본군이 침입하자 김빈길이 의병을 일으켜 처음 토성을 쌓았고 1626년(인조 4년) 임경업이 낙안군수로 부임했을 때 현재의 석성 모습으로 다시 축조됐다.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전통마을 답게 남부지방 특유의 주거 양식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9개 가옥이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외 임경업 군수 비각, 객사, 노거수 은행나무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낙안읍성은 그냥 스치듯이 떠나기보다 하룻밤을 머무는 것도 좋다. 조선시대 전통 가옥에서 머물다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 시대로 온 것 같은 특별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서해안 방어기지, 서산 해미읍성
'해미'라는 지명은 바다가 아름답다는 의미로, 조선 시대부터 사용됐다.
해미읍성 또한 전체 둘레가 1,800m로 꽤 웅장한 성이다.
1416년 태종이 서산 도비산에서 군사훈련인 '강무'를 하다가 해미에서 하루를 머물면서 주변 지역을 시찰하게 된다.
당시 해안지방에 왜구가 자주 출몰했던 터라 태종은 이곳이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에 적당한 곳이라 판단하여 성 축조를 지시한다. 이후 충청 지역 병영기지 역할을 담당한다.
또한 천주교 박해 시절에는 해미읍성에서 천여명이상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 3대 성지로 불린다. 읍성에 위치한 옥사에는 호야나무라 부르는 회화나무가 있는데 투옥된 천주교 신자들의 머리를 철사에 묶어 매달았다고 전해진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역대 세 번째로 우리나라를 방문해 해미읍성을 찾기도 했다.
해미읍성은 서산 1경으로 꼽히는 곳인만큼 사람들이 많다.
문화사적지라기 보다는 잘 꾸며진 공원처럼 넓은 잔디밭이 깔려있고 곳곳에 민속놀이 체험 장소가 있고 간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장소가 많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주변에 골목상권 개발로 인해 다채로운 맛집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어 해미읍성을 둘러본 뒤 출출한 배를 달래기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