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풀어 살리셨으니 Date 2014.4.20
Text Acts 2,22-24
(22)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3)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4)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1. 한 신실한 이슬람 신도가 기독교 선교사에게 나는 내가 믿는 신이 있는데 당신은 왜 예수를 믿으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나도 몰라~’ 창피스럽게 그렇게 답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건 당신 말이 맞어~ 당신은 당신 종교에 충성하고 나는 나대로 믿으면 되는 거야~’ 뭐 그렇게 맞장구를 치신다구요? ‘목사님, 내 안 그래도 궁금해가 목사님한테 물어볼라고 해씀더. 내만 잘 믿으모 되지 왜 자꾸 예수 믿으라고 해야 하는데예?’라고 물어볼 심산이십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잠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되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길을 가다가 갈림길을 만났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시면 사람에게 물어봐야 하겠지요? 그럼 그 때 길을 물을 때, 산사람한테 물어봐야 합니까? 죽은 사람한테 물어봐야 합니까?’
그러자 ‘당연히 산 사람한테 물어봐야죠.’라고 대답하는 그에게, 선교사는 당신이 믿는 마호메트는 죽어서 묻혀 있는 무덤이 있지만 내가 믿는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에 무덤이 없습니다. 그러니 죽은 사람한테 길을 묻지 말고 살아계신 분에게 길을 물으라고 그렇게 믿으라 믿으라 하는 것입니다.‘라고 답을 했답니다.
기독교신앙은 부활신앙이 핵심이요 중심입니다. 만일 기독교신앙에서 부활을 뺀다면 그것은 참다운 의미에서 더 이상 기독교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부활이 있기에 십자가 고난이 의미가 있고 힘이 있습니다. 부활이 있기에 그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갈 수 있는 용기도 생기고 확신도 생깁니다. 부활이 있기에 세상에서 감당할 수 없는 극한의 어려움이 닥쳐도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아니하고, 견뎌내어 마침내 역전승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부활신앙이 없던 분들은 부활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부활신앙이 영 신통찮던 분들은 부활신앙을 확신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고난이 닥쳐와서 부활신앙에 흔들리던 분들은 부활신앙으로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기적의 흔적을 만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2.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구절은 베드로 사도가 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한 설교 중 일부입니다. 부활 40일 후 하늘로 승천하시던 주님께서 내가 약속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기 전에는 절대 어디로 갈 생각도 무엇을 할 생각도 말고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하라고 신신당부 하셨었습니다. 그 당부를 들었던 오백여 명의 사람들 중에 1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한지 열흘 되던 날에, 모인 곳에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면서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의 머리에 머무르더니 모인 무리들이 모두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웠는지 다락방에서 기도하는 소리를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집 주위에 몰려들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일어나 몰려든 그들에게 설교를 했는데, 이것이 2,14-41까지 기록되어 있고 기독교 역사상 행한 첫 설교였습니다.
베드로는 먼저 그들에게 나타난 이상한 현상이 술에 취하여 그런 것이 아니고, 또 어떤 초자연적인 것도 아닌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로 인하여 일어난 영적 현상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미리 약속하셨던 대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냥 예수님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유대민족 사이에 전해내려 오던 바로 그 메시야라고 증거합니다. 베드로의 이 설교를 들은 무리들은 충격에 빠집니다. 그래서 그럼 우린 이제 어찌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회개하고, 몰라서 죽였던 그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면 우리에게 일어난 것과 같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 41절은 보면 그날 세례를 받은 사람이 3천명이나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활 얘기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첫 의문은 진짜? 진짜 다시 살았다고? “A~ 난 믿을 수 없어. 난 안 믿어!”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다는 것 자체를 못 믿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조금만 깊게 생각해 보면 전혀 의심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지 않았는데도 다시 살았다는 거짓말을 퍼뜨렸다면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부활의 첫 증인이었던 제자들 중 그 누구도 그 거짓말의 대가로 돈을 많이 벌었다든지, 높은 권좌에 올랐다든지, 큰 훈장을 받았다든지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되레 죽는 날까지 모진 박해만 받았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제자들이 바보 천치가 아닐진대 죽어 사라진 자기 옛 스승을 위해 그렇게 목숨까지 버렸겠습니까? 처음에는 제자들도 옛 직업으로 돌아갔고 옛 생활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고부터 그들은 180도로 확 바뀌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순교까지 당하면서 예수 부활의 증인이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아멘.
여기 계신 분들은 부활 의심하는 분들은 한 분도 안계시지요? 만일 아직도 의심이 마음 속에 일어나는 분이 계시다면 오직 이 한 가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를 가지고 절대로 단 한 푼의 물질을 얻는데다 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뭐가 아쉽고,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을 한다고, 죽은 사람을 위해 그렇게 인생을 다 바치겠느냐?’ 그 말입니다. 다시 사신 분이기 때문에, 모진 고난을 겪으면서도 주님과 잡은 손을 놓치지 주님은 부활하시어서 살아가는 여러분, 예수님은 정말 육체적으로 온전하게 다시 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다시 살아납니다. 다시 또 세월에 취약하여 노쇠해지는 그런 생명으로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그런데 차라리 다시 살지 말았으면 하고 바랠 그런 사람들도 있으니 바로 다시 살아서 무서운 심판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어떤 부인이 암으로 죽었답니다. 그래서 막 영안실 냉장고에 넣으려고 하는데 낌새가 이상해서 보니깐 살았더랍니다. 하지만 얼마 더 못 살고 진짜로 죽었답니다. 그래서 또 시체 안치실에 넣는데 그 남편이 그랬다지요? ‘흔들리지 않게 조심해 넣으세요. 잘못하면 또 살아납니다.’ 또 이번에는 어떤 남편이 먼저 죽었는데 의사가 사망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 남잔 아직 안 죽었거든요. 그래서 옆에서 손을 잡고 있는 아내의 손에 신호를 보냈더니, 부인이 “슷~ 의사가 죽었다면 죽은 거야. 가만 있어!” 그리고는 그냥 냉장고에 넣어버렸다고.
하여간, “예수님 다시 사신 것처럼 나도 다시 산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아멘.
3. 부활신앙은 그저 단순히 다시 살 수 있느냐 없느냐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 있는 우리들 중 대부분은 부활이 진짠가 가짠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이미 오래 전에 졸업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죠? 주님의 부활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구절 24절에,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부활이 자연적인 법칙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의미와 의도가 있는 부활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무슨 의도, 무슨 의미일까요? 36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아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그냥 한 훌륭한 위인의 죽음이 아니라고 했죠? 예수님의 죽음은 희생제물로서의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인류의 죄와 그 죄 때문에 받을 영벌(永罰)을 대신해서 받아주신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죄(罪)가 뭐라고요? 하나님을 마음속에 섬기기 싫어하는 것, ‘하나님 필요 없어요. 내 인생 내 것이니 내 맘대로 하고 살래요. 간섭하지 마세요. 또, 또, 간섭하신다. 제발 내 맘대로 살게 내버려 두세요. 난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단 말예요.’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앉겠다는 탐욕은 지금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죄에 인생이 물들어 있는 까닭에 온갖 더럽고 추하고 유치하며 한심한 죄의 열매들이 나타나서 결국 자기 인생을 평강이 없는 황무지와 사막처럼 말라붙어 각박하고 척박한, 윤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허무와 실망만 가득한 인생으로 만들고 맙니다. 그 고통을 겪으면서도 사탄의 꾐에 넘어가 타락한 즐거움, 허무한 기쁨, 영원하지 못한 행복에 목을 매고 있습니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수고가 다 허사가 되고 마는데도 여전히 저 죽는 길로 지금도 달려가고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죄와 허물을 몽땅 다 당신 한 몸에 걸머지고 십자가를 지신 것으로 끝나고 만다면 그분은 희생제물은 될 수 있어도 ‘주’와 ‘그리스도’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청소한 빗자루요,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마음의 묵은 때를 씻는 세제라면, 내 심령에 행복의 꽃이 피게 하고 그 향취와 열매를 먹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부활이십니다. 희생 제물이셨던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시오, 선정을 베풀 왕이시며, 허무한 길로 가지 않도록 이끌어주시는 스승이신 분입니다. 주와 및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 씨앗을 밭에다 뿌리면 겉으로 보기에는 떨어진 씨앗이 그냥 거기에서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죽는 밀알이 되어 장차 100배 60배 30배의 열매를 수확할 수 있게 하지 않습니까? 부활은 십자가를 역전시켜 얻은 결과입니다. 주님을 겸손히 내 마음의 왕좌에 모시고 주님의 말씀을 내 삶의 법으로 삼고 가는 것은 절대로 무능하거나, 좌절하는 자리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부활의 은혜와 복이 이 나라와 민족과 벗들에게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이 희망의 씨앗이 되는 것이요, 행복의 씨앗이 되는 것이지요..
4. 그렇습니다. 부활신앙이 기독교신앙입니다. 세상 모든 불가능해 보이는 순간과 자리에서 십자가는 역전하게 합니다. 따라 하실까요? ‘부활은 수치와 모욕을 영광과 자랑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와 광야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아하수에로 왕 때, 하만이라는 권력자 아래에서, 다 끝장나게 될 것 같던 순간을 역전시키셨습니다.
여러분, 부활신앙은 십자가가 그냥 십자가로 끝나지 않으며 언젠가 영광의 부활로 이어진다는 것을 믿는 신앙입니다. 이 해에 여러분 인생길에 제 2, 제 3의 부림절을 만드시고 기념비를 세우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