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며칠 전에 김유정(金裕貞), 이상(李箱) 두 고우(故友)를 위해 추도회(追悼會)를 열었다. 세속적인 모든 것을 비웃던 그들이라 그런 의식을 갖기 도리어 미안스러웠으나 스노비즘을 벗지 못한 이 남은 친구들은 하루 저녁의 그런 형식이나마 밟지 않고는 너무 섭섭해서였다.
생각하면 우리 문단이 있어온 후 가장 슬픈 의식이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을 잃는 것도 아픈 일인데 한 번에 두 사람씩, 두 사람이라도 다 같이 그 존재가 귀중하던 사람들, 그들이 한 번에 떠나버림은 우리 문단이 빨리 가실 수 없는 상처라 하겠다. 최초의 작품부터 자약(自若)한 일가풍(一家風)을 가졌고 소설을 쓰는 것이 운명인 것처럼 만난(萬難)과 싸우며 독실일로(篤實一路)이던 유정, 재기며 패기며 산(山) 매와 같이 표일(飄逸)하던 이상, 그들은 가지런히 선두를 뛰던 가장 빛나는 선수들이었다.
이제 그들을 보내고 그들이 남긴 작품만을 음미할 때 같은 길을 걷는 이 벗의 가슴에 적이 자극(刺戟)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최근 수삼 년 내에 우리 문학은 괄목할 만치 자랐다 하겠다. 내가 읽은 범위 내에서도 유정(裕貞)의 <봄 봄>, 이상(李箱)의 <날개>와 <권태倦怠)>, 최명익(崔明翊)의 <비 오는 길>, 김동리(金東里)의 <무녀도(巫女圖)>, 이선희(李善熙)의 <계산서(計算書)>, 정비석(鄭飛石)의 <성황당(城隍堂)>이다. 그 전에 보지 못하던 찬연(燦然)한 작품들이다. 군데군데 거친 데가 있으면서도 대체로는 과거의 다른 신인들이나 또 어느 기성작가(旣成作家)들의 초년작에서는 찾을 수 없는 쾌작(快作)들이었다. 신인들이 이만한 작품을 내어던지면 기성들은 신문소설(小說)에서는 별문제거니와 아직 전통예술의 무대인 단편계(短篇界)에서는 섣불리 붓을 잡을 용기가 없을 것이다. 통쾌한 일이다.
문단의 자리는 임자가 없다. 좋은 작품을 쓰는 이의 자리다. 흔히 지방에 있는 신진들은 자기의 지반(地盤)이 중앙에 없음을 탄(歎)한다. 약자의 비명(悲鳴)이다. 김동리는 경주, 최명익은 평양, 정비석은 평북에 있되 빛난다. 예술가는 별과 같아서 나타나는 그 자리가 곧 성좌(星座)의 일부분이다. 중앙의 우선권은 잡문(雜文)에 밖에 없는 것이다. 잡문을 많이 써야 되는 것은 중앙인들의 차라리 불행이다. 잡문에 묻혀 썩는 사람들이 중앙이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지 멀리서 바라보라.
내가 여기서 쓰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은 아니다. 유정과 이상(李箱)을 바라보며 또 이상(以上)의 신인들을 생각하며 공통적으로 내가 느껴진 바는 그들의 자신(自信)이다. 사회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대중은? 물론 이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상과 같은 사람은 전혀 이런 것은 불문에 부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얼른 그러했으리라고 단정하는 것은 경솔이다. 이 점을 이상처럼 고민한 사람도 적을 줄 안다. 다만 대중의 노예가 안 된 것뿐이다. 만일 이상이 자신에게서 사회의식성(社會意識性)이 그 아닌 것보다 더 승(勝)할 수 있는 성격을 진단했다면 그는 누구보다도 불꽃이 튀는 의식작품(意識作品)을 써냈을는지 모른다.
먼저 자신을 알면 모든 일에 있어 현명한 일이다. 작품은 개인의 뿌리에서 피는 꽃이다. 평론가는 여론에 무서움을 탈 경우가 많으리라. 그러나 작가에겐 여론이 어쩌지 못할 것이다. 자기를 한번 정확하게 진단한 이상은 자기의 것을 자기의 투로 써서 천하에 떳떳이 내어놓을 것이다. 이상의 작가들에게서 그 떳떳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나는 무엇보다 즐거운 일이다. 목전에는 독자가 적어도 좋다. 아니 한 사람도 없어도
슬플 것이 없다. 그 고독은 그 작가의 운명이요 또 사명이다. 고독하되, 불리하되, 자연(自然)이 준 자기만을 완성해나가는 것은 정치가나 실업가(實業家)는 가져 보지 못하는 예술가만의 영광인 것이다.
모파상의 시대에도 여론의 침해가 작가들에게 심했던 모양으로 모파상은 그의 어느 단편 서문에 이런 뜻의 말을 써놓았다.
독자는 여러 가지 사람들이다. 따라서 가지가지로 요구한다.
나를 즐겁게 해 달라
나를 슬프게 해 달라
나를 감동시켜 달라
나에게 공상을 일으켜 달라
나를 포복절도(抱腹絶倒)케 하여 달라
나를 전율케 하여 달라
나를 사색하게 하여 달라
나를 위로해 달라
그리고 소수의 독자만이 당신 자신의 기질에 맞는 최선의 형식으로 무엇이든지 아름다운 것을 지어 달라 할 것이다.
우리 예술가는 최후의 요구, 이 독자의 요구를 들어 시험하기에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비평가는 이 시험을 분석하고 그 결과를 평가해야 한다. 사상적 경향에 관해서는 용훼(容喙)할 권리가 없다. 혹은 시적 작품을, 혹은 사실적 작품을 이렇게 자기의 기질에 맞는 대로 씀에 간섭을 못 할 것이다. 간섭을 한다면 그것은 작가의 기질을 무리로 변조시키는 짓이요 그의 독창을 막는 짓이요 자연이 그에게만 준 그의 눈과 그의 재질의 사용을 금하는 짓이 된다.
모파상의 이 말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독본적(讀本的)인 어구이다. 무릇 소수의 그 독자, '당신 자신의 기질에 맞는 최선의 형식으로 무엇이든지 아름다운 것을 지어달라'는 그 독자를 향하여 우리는 붓을 들 것이다. 그 외의 독자는 천이든 만이든 우리에겐 우상일 것뿐이다. 얼른 생각하면 대중을 무시하는 것도 같다. 그러나 무시가 아니요 우대도 아니다. 정당일 뿐이다. '민족을 위해서 합네' '대중을 위해서 합네'란 말처럼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말은 없다. 대다수가 지지할 수 있는 표제(表題)라 절대의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가장 관작(官爵)과 같은 말이다. 소수를 위해서 쓴다는 말은 얼마나 내세우기 불리한가 그래서 겁내는 작가가 많은 것이다. 대중을 향해서도 문학이면 문학이 아닐 리가 없다. 그쪽에 소질 없는 사람이 사조라 해서 문예를 철학처럼 쓰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결국 문학의 본질의 한 귀퉁이를 촉각할 때 전변하고 만다. 같은 달음질이라도 백미(百米)와 천미(千米)와 또 마라톤이 다를 것이다. 마라톤이 인기 있다 하여 백미에 적당한 자기의 체질을 무시하고 마라톤에 나서면 거기에 남는 것은 무엇일 것인가? 유정이나 이상은 다 자기 체질에 맞는 종목을 뛴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 작품에는 자신이 있다.
기질에 맞는 것을 쓴 작가에게는 상식 혹은 개념이 상의 창조가 있다. 그러나 기질에 맞지 않는 것을 쓴 작가에게는 기껏해야 상식이요 개념 정도다. 종교는 윤리학이기보다는 차라리 미신이기를 주장한다. 문학은 사상이기보다는 차라리 감정이기를 주장해야 할 것이 철학이 아니라 예술인 소이(所以)다. 감정이란 사상 이전의 사상이다. 이미 상식화된, 학문화된 사상은 철학의 것이요, 문학의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