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정신의 못자리, 영주 부석사와 순흥 소수서원
김 정 숙 명예교수 (인문대학 역사학과)
태백산맥으로 잇는 경북 영주와 충북 제천의 신선 세계
대학시절 우리 과는 전체가 참여하는 봄 정기답사가 있고, 가을에는 그룹답사를 했
다. 그리고 두 답사의 결과를 종강 직전에 ‘사진 및 탁본 전시회’로 정리했다. 1975년
2학년 때 우리 그룹은 영주 일대를 답사했다. 여대생 여덟 명이 서울에서 기차, 버스
를 갈아타고 굽이굽이 돌아 부석사 앞마을에 다다르니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예약
도 하지 못한 우리는 한 집을 두드리며 숙박을 청했다. 주인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
니, 우리보고 방을 청소하고 불을 때면 그 사이에 저녁을 지어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감지덕지, 나누어서 방청소와 아궁이불 팀으로 나누었다.
불 땐다는 일은 그냥 장작에 불붙이면 되는 게 아니었다. 연기가 얼마나 나던지 번
갈아 울면서 뛰쳐 나왔다. 그 난리를 치르며 저녁을 먹고서야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
다. 한없이 긴 흙길에 코스모스가 양옆에 가득 피어 있었다. 달빛에 가지각색의 코스
모스가 흔들리고 절은 어디있는지도 모르겠고 끝없이 걸었다. 그리고 밤에 들어와서
도 수다는 계속되었다. 지친 친구들은 왜 자지도 않냐며, “여우가 물어가라”고 소리치
기도 했다. 그래, 여우가 나올 것 같은 시골이었다.
아침이 왔다. 아침에 밖에 나가서 더 놀랐다. 나는 사과가 나무에 달린 것을 그때
처음 보았다. 당시 사과 저금통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꼭 그만한 크기의 사과가 나뭇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다닥다닥 달려 있었다. 과수원 주인을 찾아서 사과를 한 소쿠
리 흥정했다. 우리는 사과를 먹고 싶은 것 이상으로 우리가 사과를 직접 따고 싶었다.
그러나 주인은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따다가 잘못하여 눈을 건드리면 다음 해에 사
과가 열리지 않는단다. 사과 한 바구니를 들고와서 아침 밥상을 받았다. 그 밥과 그
사과. 식사 후 걸어서 오른 부석사는 시간을 이고 있었다.
그때 부석사는 코스모스 분위기였다. 오늘의 일주문이나 사천왕문은 모두 1980년대 공사한 것이다. 또 아주 많이걸어서 소수서원에 닿았다. 영주를 떠나면서 시외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이 조용한 시골을 시끌벅적한 소리로 채워놓고 떠났는데, 지금 그 버스가 어느 방향이고 어디서기다렸는지 흔적도 모르겠다.
내가 오던 때보다 더 어렸을 때를 이 고장에서 지낸 이도 있고, 오래 전에 친구들
과 이곳을 온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곳에 동행했던 친구 중에 그 이후에 못본 사람
들도 있을 수 있다. 오래된 유적은 이렇게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고 자신의 시간을 이
고 있고, 우리의 시간도 이고 있다.
유적은 추억과 현재 시선을 연결하여 풍요를 창조해 간다. 게다가 영주의 대표적 유적인 부석사와 소수서원은 바로 한국인의 가장 기저에 흐르는 불교와 유교의 깊은 샘이다. 이들은 이후에 탄생한 다른 사찰이나 서원과는 양식도 다르다. 전형적 형식에서 벗어난 건축들이다. 무엇보다도 아름답고, ‘녹색의 장원’에 발디딘 것과 같은 세계이다.
2023년 5월 3일, 명예교수회는 태백산맥의 푸르름 속에 빠지기로 했다. 태백산맥
은 이 지역에서 각화산, 청량산 등으로 충청북도와 경상북도를 가르는 천연성벽이다.
그 사이로 죽령이 뜷려 있다. 죽령은 군사요충지로서 고구려군과 신라군이 영토전쟁
을 했던 곳이었다. 그래서 방어용 산성, 고구려 고분, 사찰 등 유적들이 다수 있다. 죽
령을 넘으면 풍기읍에 닿는다. 여기서 소백산 쪽인 동북 방향으로 접어 들어가면 영
주 땅이다. 중앙고속도로를 내기 전까지만 해도 다른 곳에서 오가기에는 쉽지 않은
고장이었다. 순수한 사람살이의 환경이 많이 보존되어있는 곳이다.
그래서 눈을 가리는 현대적 고층 건물이라곤 없는 곳을 누비는 하루이다. 충청도와
경상도의 도 경계를 숲으로 넘으며, 마치 발을 산 위에 올려놓은 것같이 지내는 코스
다. 사찰로서는 드물게 사랑이야기를 창건설화로 가지고 있는 부석사, 사찰 터에 세워진 소수서원이 주된 답사지이다. 그리고 오후에는 자연의 호사를 한껏 고조시킬 내륙
안의 바다 청풍호에서 지낸다.
이미 세 번째인 우리 답사대는 출발하면서 우선 새로 온 부부에게 상을 주었다. 이
석순, 최순돈, 하정상, 이병근, 김진삼 교수님 부부가 오셨다. 또한 새로 온 용사들 박
철홍, 이준하, 정시련 교수님에게도 상을 주었다. 상은 우리밀로 만든 유기농 건빵이
었다. ‘건빵’은 우리의 추억을 건드리는 과자임에 틀림없다. 그리고도 여분의 있어서
잘 생긴 분, 건강 관리를 잘하는 분 등 온갖 명분을 찾아 나누었다. 물론 늘 참석하시
는 열성분자들은 우리의 기둥이다. 김봉식, 김상태, 김종근, 남두현, 오창혁, 윤대식,
이용기, 이철희, 조무환, 조윤래 교수님 부부와 짝을 집에 모셔놓고 온 강용호, 곽태
천, 김정숙, 김한곤, 박종갑, 홍우흠 교수님 하여 39명이 출발했다. 숫자 많은 건빵은
상을 받지 못한 옆 사람과 나누기에 충분하다. 물론, 우리는 차에 타면서 바로 물과
아침식사용 떡과 다과 주머니를 받았다. 또한 이석순 교수님 사모님이 초콜릿을 담은
봉지를 준비해 배분했다. 또한 이병근 교수님과 정시련 교수님이 풍부한 물질적 지원
도 하셨다. “이젠 부자다!”
이렇게 추억을 건드리면 우리에게 선후배, 성별 등의 차이는 있을 여유가 없다. 게다가 5월 3일이었다. 우리는 어린이날 노래, 어버이날 노래를 부르면서 출발했다. 이어 평생 가장 많이 불렀고 또 불렸던 단어인 ‘스승’을 소환하여, ‘스승의 은혜’를 불렀다. 스승도 생각하고, 제자도 생각하고. 그렇지만, 현재 가장 목소리 높여 불러야 할 노래는 ‘아빠의 청춘’이었다. “나에게도 아직까지 청춘은 있다.....” 그런데 교수님들은 공부만 하시는지, 이 흔한 유행가는 잘 모르시는 것 같다. 이렇게 종일 흥얼거릴 수 있는 몇 구절씩을 기억하게 되었다. 이 경쾌함으로 한국정신 문화의 터전을 누비고, 오후에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력을 느끼는 하루를 만들었다.
1) 버스에서는 기본적인 내용만 설명하고, 유적은 현장에서 본다. 30분의 설명.- 한국
인 의식의 주된 바탕은 성리학의 세계이다. 또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유교정신이
살아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15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불교는 한국의
건축, 미술, 과학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종교이다. 부석사와 소수서원은 이 두 사
유의 대표적 역사유적이다.
부석사는 자연을 그대로 활용하여 마치 태백산맥의 전망대를 지었다고 할만큼 가람
배치가 독특하다. 그래서 불교사찰의 전형적 구조를 떠올리면서 보는 것이 좋다. 일반
적으로 사찰에는 일주문, 연못이나 개천을 넘는 극락교, 사천왕문과 강당용 누각을 차
례로 지나서 정면 중심 법당에 이른다. 이외 탑이나 작은 법당, 요사채들이 조화롭게
양쪽 좌우, 후면에 있다. 물론, 법당에 모시는 불상의 이름과 역할에 대한 기본지식이
있으면 사찰을 더 잘 볼 수 있다.
불교는 도입되면서 왕실을 보조하고 백성의 정신을 통합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국
토 곳곳에 산재하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외국의 침략을 막는 데도 공헌했다. 사찰은
여행객이나 병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등 사회사업도 했다. 그리고 국제적 종교인
불교는 외국과 인적·물적자원을 교류하는 데 공헌했으며, 사찰은 당대 수준 높은 학문
적 지식과 힘을 지닌 곳이었다.
한편, 소수서원은 성리학을 교육하는 첫 사립교육기관이다. 그것도 처음으로 성리학
을 도입한 안향의 고향 땅에 세워진 오묘한 인연이 있다. 게다가 해당 지역인 순흥도
호부가 행정 소재에서 역도(逆徒)의 땅으로 판단받고 피폐화되었던 때였다. 서원은 교
육과 서적출간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시간이 가면서는 관립기관의 교육기능을 대치
했을 뿐 아니라 조선사회에서 학맥과 정치여론을 형성하는 중심이 되었다.
유교는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었다. 유가는 훈고학, 성릭학, 양명학과
고증학 순으로 발전해 왔다. 남송에서 완성된 성리학은 고려말에 도입되는데, 안향,
정몽주, 길재 등으로 이어졌다. 이후 100여 년만에 이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왕
조가 섰다. 정도전이 중심이 되어 조선을 세우면서 정몽주는 죽임을 당하고 길재는
1) 우리는 아침 7시에 대구어린이회관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저녁 10시 귀가까지 15시간 한솥밥을 먹고 같은 공간에서 한국인의 정신문화의 기틀을 생각했다. 오전에 부석사를 방문하고, 사찰 입구인 ‘부석사 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거의 다른 이들의 점심시간에 소수서원을 방문했다. 그리고 청풍호반으로 출발해서 2시에 도착했다. 오후 간식시간에는 Papas Brot 카페에서 차를 즐겼다. 그곳으로부터 풍기로 돌아와 ‘영주축협 한우프라자 풍기점’에서 인삼한우불고기로 저녁을 먹고 귀가했다.
선산 지역으로 숨어들었다. 왕조를 세운 정도전 계열을 훈구파, 지방으로 은둔한 정몽
주 계열을 사림파라고 부른다.
왕조가 선 뒤 왕실과 훈구파가 세력을 다투고 있는 사이, 과거를 통해 지방에서 글
만 읽던 사림파가 점점 조정에 들게 되었다. 성종 때 이들 세력이 비등해졌고, 그래서
일어난 두 계열간의 싸움이 사대사화이다. 사대사화의 끝에 세력을 잡은 이들은 사림
이다. 이 무렵 유학의 사립교육기관인 서원이 이곳에서 세워졌다. 그리고 임진왜란 전
후 무렵부터 사림들 사이의 당쟁이 치열할 때 서원건립은 극성(極盛)했다. 사림들이
싸움에 몰두하는 동안 왕비 세력들이 세력을 잡게 된 것이 세도정치이다. 세도정치
끝에 나타난 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나는 차 안에서 이같은 대강만 설명
했고, 강용호 교수님께 청풍호 설명을 부탁했다.
이제, 현장에서 보면서 느끼도록 한 유적의 설명을, 답사에 참여하지 않으신 분들께
서도 느끼실 수 있도록 이 원고에 자세히 담으려고 한다. 섣달그믐에서야 자리잡고
앉아보니, 연례행사같이 되어버린 답사기 쓰기가 마치 동료 교수님들께 쓰는 긴 편지
같다. 이 또한 색다른 행복이다.
옛 추억을 되새기는, 가람배치를 따라가다 보면 극락으로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완성하던 676년에 지어졌다. 의상은 현재의 조사당 위치에 작은 건물을 짓고 시작했고, 오늘 같은 거대한 가람배치는 9세기에 이루어졌다. 부석사는 30여 년 전에 건축가 2백여 명이 모여 가장 잘 지은 고건축 1위로 뽑았던 사찰이다. 이 절집은 그 위치부터 독특하다. 태백산맥이 태백산과 소백산으로 나뉘는 양백지간의 봉황산 중턱에서 자연을 모두 품으로 안아들이도록 지어졌다.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져서 마치 큰
새가 날개를 활짝 펼친 듯한 현상이다. 산자락 경사를 최대한 이용했기 때문에 절의
배치는 절대로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나씩 발견해내는 기쁨을 안고 한 계단씩
딛다가 문득 무량수전 안양루에 오르면, 산봉우리들을 발아래 깔고 하늘과 마주하게
된다.
이 배치 자체가 불교사상을 설명하는 데 완벽하고, 짜임새가 충실한 극한(極限)
의 종교심이며, 극한의 예술이다. 그것은 극한의 과학을 업고 있다. 옛 기록에는 일주
문에서 1리쯤 아래에 영지(靈池)가 있어서 절의 누각이 모두 그 연못 위에 거꾸로 비
친다고 했다. 하늘을 인 부석사가 물에 비친다면 상상하는 자체로도 가슴이 뛴다.
지금은 주차장 작은 연못을 지나 휘어 돌아서면 일주문을 향하는 길에 들어선다.
여기 매표소에서 역사적(?) 기록이 세워졌다.
우리 ‘명예(은퇴)교수’들은 절에 그냥 입장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찰은 70세부터 무료입장이었단다. 결국, 우리 중 몇몇 젊은이(?)들은 입장표를 사야했다. 더욱이 문화재보호법 개정에 따라 다음날인 5월 4일부터 사찰이 무료개방 되기 때문에 이 젊은(?) 분들은 사찰 입장표를 산 마지막 사람들이 되었다. 반대로 청풍호에서 케이블카를 탑승할 때는 전체가 할인받은 그룹이었다. 우리는 나이의 오묘함을 즐긴다.
일주문을 바라보는 길은 박석을 깔아놓았고, 양옆엔 은행나무, 그 너머엔 사과밭이
다. 은행나무는 물들지 않았고, 사과 꽃은 이미 졌으니 우리의 시선을 잡아끌지는 못
한다. 천왕문까지 1km 넘는 길에는 사적인 이야기들이 피어난다. 물론 옛 추억도 담
긴다.
<일주문과 당간지주>
1980년대 사찰 영역을 정비할 때 세웠다는 화려한 일주문은
내 대학시절 기억에는 없다. 일주문 앞에는 ‘태백산부석사’, 뒤에는 ‘해동화엄종찰’이라
는 현판이 걸려있다. 일주문을 들어서서 천왕문까지의 도중에 왼편으로 통일신라 시
대의 당간지주(보물 제255호)가 있다. 높이 4.3m인 돌기둥이 위로 올라갈수록 약간
씩 좁혀져 끝마무리를 꽃잎처럼 둥글게 공글려 두었다. 곧 방문할 동 시기의 소수서
원 내의 당간지주와 비교해볼 만하다. 천왕문도 1980년대 새로 마련한 것으로 사천
왕은 조선후기의 모습을 본뜬 것이다.
<석축과 9품 만다라>
천왕문에서 봉황산 중턱 무량수전에 이르기까지 9단의 석축과
많은 계단을 올라야 한다. 석축은 소백산맥의 봉우리들을 절 마당으로 연결하는 역할
을 하는데, 그 자체도 작품이다. 석축은 제멋대로 생긴 자연석을 절묘하게 엇물려 놓
았다. 막돌을 거침없이 쌓은 듯하면서도 크고 작고 모나고 둥근 것들이 조화를 이루
고 있어 옛 사람들이 돌의 암, 수를 구별했다던 말이 실감난다. 자연스럽다. 전체 높
이 4.3m, 길이 75m나 된다.
부석사 석축을 사람에 따라서는 천왕문에 이르렀을 때까지가 하품, 천왕문에서 범
종루까지가 중품, 범종루에서 안양루 누각 아래까지가 상품 영역이고, 안양루를 거쳐
무량수전 영역에 이르면 극락에 이른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혹자는 천왕문에서부터
세 개의 세계로 나눈다. 또 석축이 가르는 큰 경계를 셋으로 다시 가르면서 그것을
극락세계에 이르는 ‘구품만다라’로 풀이한다.
수많은 계단 사이에는 천왕문, 범종루, 극락으로 들어가는 안양문이 있다. 범종루와
안양문 아래 누각으로 몸을 숙여서 겸손하게 들어가 극락세계로 이르는 형상이다. 문
을 넘어가면 다른 높이에서 본 여러 사바세계의 모습들을 볼 수 있다. 극락이 되는
무량수전 영역에 오르면, 겹겹이 펼쳐지는 산자락들이 발아래에 놓인다. 각 축대의 측
면에도 다른 법당들이 있지만, 처음에는 바로 오르는 것이 좋다.
<안양루와 범종각>
안양루와 범종각은 모두 2층 누각으로 경사가 급한 자리에 누각
과 문의 기둥을 겸하여 지은 절묘한 건축물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아랫단의 앞쪽 기
둥은 아래 석축에 놓이고, 뒤쪽의 기둥은 윗단에 짧게 놓이게 된다. 또 누각의 밑을
지나느라 머리를 조아리게 되므로 행동거지를 자연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범종루는 사찰의 중문(中門)에 해당하는데, 위로 올라가는 입구 쪽에서는 팔작지붕
을 하고 반대 방향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어 양면 지붕이 보이는 위치에 따라 다르도
록 지어졌다. 그 안에는 법어와 모어, 운판만 있고, 정작 범종은 서쪽에 있는 진짜 종
각 안에 따로 있다.
범종루 아래에서 정면을 보면 안양문이 보인다. 밑을 지날 때에는 안양문이지만, 누
각에 오르면 안양루라고 쓰여 있다. 안양루는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대석단과 어우러
져 밑에서 올려다보면 매우 위세가 있다. 반면,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보면 소박하고
작은 건물이며 허공 중에 떠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법전 쪽에서 누각을 보면 마치
하늘을 나누어놓는 창틀 같다. 당연히 안양루에서 발아래의 봉우리들을 보면서 감탄한 시와 문장들이 현판으로 새겨져 덕지덕지(?) 누각에 걸려 있다. 김삿갓의 글도 눈에 띈다.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백발이 다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팔 벌려 있고, 천지는 부평같이 밤낮으로 떠 있구나. 기나
긴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오듯 우주 간의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인간 백세
에 몇 번이나 이런 경관 보겠는가? 세월이 무정하네. 나는 벌써 늙어있네.”
안양루는 산봉우리를 우리 눈앞에 깔아줄 뿐만 아니라, 무량수전으로 인도하는 예
술길을 만든다. 안양루 밑을 지나면서 누각 천장과 기둥이 마치 네모진 액자를 이루
고, 오를수록 그 액자의 구도 안에 석등의 지붕돌인 화사석이 차차 드러나 보인다. 그
런데 걸을수록 석등은 점점 비껴 앉으면서 무량수전이 드러나게 하는데, 가만히 서
있으면서도 움직이는 것 같은 시각 체험을 준다. 이는 석등이 무량수전 정면 측에서
조금 서쪽으로 비껴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귀한 경험을 놓치는 경우가 대
부분이다. 무량수전을 보러 허겁지겁하기 때문이다. 끝에 이르면 무량수전이 전 모습
을 드러낸다. ‘안양’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니 안양루를 지나 극락에 이른 셈이다.
<석등과 무량수전>
마지막 돌계단을 오르면서 우선 정교한 조각 솜씨를 보여주는 석
등(국보 17호, 9세기)과 마주하게 된다. 석등은 높이가 2.9m인데 점등하는 부분인 화
사석(火舍石)은 팔각으로 네 면은 불꽃을 밝히기 위해 뚫려 있고, 네 면은 각기 다른
모습의 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석등 뒤로 부석사의 절정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이 있다. 한때 이 건물은 우리나
라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이라고 했다. 무량수전은 1143년 원융국사가 중창했는데,
공민왕 7년(1358)에 화재로 소실됐다. 현 무량수전은 1376년(우왕 2년)에 원응국사
(圓應國師)가 다시 지은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한 바 있다. 그런데 1972년 안동
의 봉정사 극락전(국보 15호)을 해체, 복원하면서 1363년 지붕을 대폭 고쳤다는 상량
문을 찾았다. 긴 역사로 보면 거의 동시기라 하겠지만, 혹시 시험지 답안을 쓰는 경우
에는 기억해야 할 사항이다. 그렇지만, 무량수전은 팔작지붕 건물 중에서는 가장 오래
된 건축임이 틀림없다.
무량수전은 팔작지붕을 24개의 기둥이 지탱하고 있다. 그리고 기둥 위에만 포작이
있는 주심포집으로 주심포 방식의 교과서로 손꼽힌다. 기둥의 배흘림과 안쏠림, 귀솟
음과 평면의 안허리곡 등이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는 기법들이다. 배흘
림기둥(서양의 엔타시스 공법)이란 기둥의 아래쪽 3분의 1쯤이 가장 불룩하게 한 것
이다. 무량수전의 기둥은 머리 지름 34cm, 기둥 밑 44cm, 가운데 배흘린 부분은
49cm이니 그 곡선을 가늠할 수 있다. 이는 규모에 비해 훤칠한 느낌을 준다. 최순우
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자문
자답했다고 한다.
귀솟음은 건물 모서리 기둥을 중앙보다 좀 더 높인 것이고, 안쏠림은 기둥 위쪽을
건물 안쪽으로 경사지게 세우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기둥과 처마선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벽면의 가운데가 은근히 휘어져 있다. 사람의 착시(錯視)에 의한 왜곡
현상을 막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시도된 기법들이다. 건축을 밀가루 반죽처럼 주무
르는 기술이다.
무량수전 앞면 세 칸에는 분합문과 광창이 있는데, 창들은 모두 위쪽으로도 올려
고정시키는 열개 형식으로 되어있다. 큰 재를 올릴 때에는 활짝 열어 개방할 수 있다.
무량수전 바닥에는 20세기 초까지도 법당에 녹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현재는 마루
이다. 녹유전은 아미타경에서 극락세계의 바닥이 유리로 되어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녹유전은 사격(寺格)이 높거나 또는 최상의 건축물에만 사용되었다. 출
입문은 건물 오른쪽 옆에 있다.
무량수전 안에는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모셨다. 이는 흙으로 빚고 도금
을 한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인데, 높이 2.78m로 고려시대까지 현존하는 소조불
가운데 가장 크다. 협시보살이나 다른 부처 없이 아미타불만 혼자 모셔져 있다. 보통
불상은 정남향인데 비해, 이 여래는 동쪽을 바라보고 서방 극락세계에 있다.
불상은 닫집 안에 앉아있고, 불단은 3중 구조로 되어있다. 건물 안에서 천장을 막지
않고, 기둥, 들보, 서까래 등 모든 부재들을 노출시킴으로써 공간이 확대되어 상당히
장대해 보인다. 부처는 딱 벌어진 어깨에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 편단 방식으로
옷을 입었다. 수인(손모양)은 마귀를 물리친다는 ‘항마촉지인’이다. 또 높이 3.8m인 나
무 광배의 조각은 매우 섬세하나 불꽃이 치솟아 오르는 듯한 힘도 느낄 수 있다. 불
상과 함께 금단청을 입혀놓았다.
<오묘한 사랑이 따르는 사찰 창건 설화, 의상과 선묘낭자>
학생으로부터 우리나라에도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들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연애편지를 쓰는 사람들은 서양의 시나 소설에서 문구를 찾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 우리 사회에서, 그것도 사찰 창건설화에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 부석사이다. 세상의 연을 끊고 출가하여 진리를 깨달으려는
남자를 사랑한 드문 이야기이다.
무량수전 왼쪽 뒤편에 ‘浮石’이라고 새겨진 돌이 있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1723년 이곳에서 불전 뒤에 큰 돌이 있고 그 위에 또 하나의 큰돌이 내리덮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두 돌 사이에 노끈을 넣어 돌이 떠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 바위가
선묘용이 변화한 바위이다. 부석사를 고려시대에는 선달사라고도 했는데, 선달이란 선
돌의 음역으로 부석의 향음이란다. 의상(義湘, 625-702)은 부석존자라고 불리기도 한
다.
해동화엄초조(海東華嚴初祖)인 의상은 진골 김한신의 아들로 신라 경주에서 출생하
였다. 19살에 경주 황복사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한동안 8살 연상인 원효(元
曉)와 함께 공부했다. 그리고 650년 원효와 육로를 통한 1차 유학을 시도했으나, 요
동에서 첩자로 오해한 고구려군에 잡혀 되돌아왔다. 둘은 661년에 재차 유학길에 올
랐는데, 도중에 원효는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포기했다. 의상은 불법
을 알고자 하는 뜻을 굽히지 않고, 바다를 통해 홀로 당으로 건너갔다. 37살 때였다.
의상이 등주에 이르렀을 때 묵은 신도 집에 선묘라는 딸이 있었다. 그는 의상의 마
음을 얻지 못하자, 의상의 제자가 되겠다는 원을 세웠다. 의상은 종남산에 있는 지엄
(智儼)을 찾아가서 화엄학을 공부했다. 의상이 46세가 되던 670년, 당 고종이 신라를
치려하자 이를 전하려 급히 귀국했다.
귀국하는 길에 의상은 다시 선묘의 집을 찾아 그동안 베풀어준 편의에 감사하고 곧
바로 배에 올랐다. 선묘는 의상에게 전하고자 준비해 두었던 법복(法服)과 집기(什器)
등을 넣은 상자를 전하기도 전에 의상이 떠나버렸으므로, 급히 상자를 가지고 선창으
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떠나가고 있었다. 선묘는 배를 향해 기물상자를 던져 의상
에게 공양하고는, 다시 스스로 몸을 바다에 던져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는 용이 되었
다.
용으로 변한 선묘는 의상이 신라에 도착한 뒤에도 줄곧 옹호하고 다녔다. 의상이
화엄의 대교(大敎)를 펼 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을 때, 도둑의 무리 500
명이 계곡을 점령하고 있었다. 용은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도둑의 무리
를 몰아내고 절을 창건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때문에 절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 했
다. 이후 선묘용은 무량수전 불상 밑에 머리를 두고 석등에 꼬리를 드리우고 묻혀있다
고 전해내려왔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무량수전을 수리할 때 마당에 묻혀있던 석룡이
임진왜란 때 칼에 맞아 허리가 끊어진 채로 드러났다고 한다.
또한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드렸던 선묘정(善妙井)도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오랜 세월 선묘낭자를 마음으로 의지해 왔던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무량수전 뒤편에 선묘각을 세웠다. 그런데 12세기에 일본에서는 선묘사를 세우고, 선묘의 조각을 만들었다. 당시 내전으로 생긴 전쟁미망인들을 위해서 그들이 불교에 공헌할 수 있는 한 범본으로 선묘를
기렸다고 한다.
<조사당>
무량수전 북동쪽에 통일신라 삼층석탑(보물 제249호)이 있다. 법당과 비교
해보면, 석탑의 위치가 뜬금없다. 하지만, 무량수전 안의 부처가 동쪽을 향해 있으니
석탑을 이 자리에 앉혔나 보다. 1960년 탑 안에서 사리공, 철제탑, 불상, 조각, 구슬
등을 찾았다. 이 석탑 뒤로 휘어져 고려시대에 지어진 조사당(국보 제19호)이 있다.
양옆이 산죽으로 가려진 오솔길로 올라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는 갈림길에서
오른쪽에 조사당이 있는데, 의상을 모신 곳이다. 단칸 맞배지붕 주심포집인데,
안에는 벽화가 있다. 이곳의 원래 벽화는 일제시대 따로 떼어 보호각에 두었다가
지금은 유물 전시각에 진열해 놓았다.
조사당 자리가 바로 의상이 부석사를 세우고 수도하던 자리로 여겨진다. 의상은 문
무왕의 대역사를 멈추도록 충고할 정도로 큰 규모의 공사를 일으킬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문무왕이 전답과 노비를 보냈으나 모두 거절하고 청빈하게 살았다. 많은 사람이
모일 때면 내려와 초가를 짓고 강론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의상이 거처하던 곳은 조사
당을 중심으로 있던 초막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부석사의 지금과 같은 규모와 배치
는 9세기에 이루어졌다.
한편, 조사당 동쪽 창 밑에 조그마한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으면서 지팡이에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학명으로는 골담초라고 하는데, 아이를 못 낳는 부인들이 이 잎의 물을 마시면 아들
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다. 철창을 쳐 나무를 보호하고 있다.
의상 문하에서 3천명이 넘는 제자가 배출되었는데, 특히 표훈, 진정 등 10제자가
유명하다. 그러나 화엄종의 교종 종찰인 부석사를 거친 스님들은 하대의 새로운 기운
인 선종의 산문을 연 점이 특이하다. 봉암사의 지정대사, 태안사의 혜철, 성주사의 무
염, 회양산파의 개조 등은 부석사 출신으로 나중에 구산선문의 개창조가 된 스님들이
다. 군사요충지에 세워져 신라의 국경을 담당했던 호국사찰이 새 시대 사조를 배태했
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조사당 건너편에는 응진전과 자인당이 있는데, 자인당에는 인근 절터에서 옮겨온
석불상들이 있다(보물 제22호, 220호). 이 외, 삼성각에는 칠성과 산신, 단군까지 모
셔져 있으며, 고려시대 원융국사의 비각부터 동부도밭 등 안쪽으로도 넓게 유적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우리 팀에게는 이 동탑뒤로 올라갈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물론, 부석사에는 유물전시각 안의 고려대장경 각판을 비롯하여 각종 전시물이나 인근 골짜기에서 옮겨온 석물과 석불 등 보아야 할 것이 허다하다.
아울러 인근에는 의상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절들이 여럿 있다. 흔히 오부석(五浮石)이라 이름하는 이 작은 절들은 지리산 화엄사 등의 전국 화엄십찰과는 규모나 명성에서 다르지만, 하나같이 절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빼어나다. 좀 더 시간을 가지면 그 변모를 더 누릴 것이다. 부석사는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의 7개 사찰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반역으로 몰린 땅에 조선 최초 사립교육기관 시작
소수서원(사적 55호)은 영주시 순흥면에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며,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서원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종가 연구를 하면서 실감했다. 대원군 때 훼
철된 서원을 다시 세운 곳도 많고, 나아가 아직도 훼철된 서원의 재건을 목표로 하는
문중을 보았다. 당시 대원군이 무모할 만큼 용감했구나를 절감했다.
소수서원에 들어가려면 먼저 이 시대, 이 지역을 이해해야 한다. 영주는 현재 인구
10만의 도시이다. 우리가 방문하는 순흥, 풍기, 부석면 등은 소속 행정이 다를 뿐 인
접지역으로서 모두 영주시에 속한다. 전통시대에는 순흥이 중심이었다.
<순흥 벽화고분과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운동>
순흥은 역사가 깊은 곳이어서 세월의 흔적이 많다. 부석사로 접어드는 입구에 있는
고구려의 영향을 보이는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이 있다. 길 가에 모형관이 있고,
그곳에서 500m쯤 올라간 비봉산 등성이에 진짜 고분이 있다.
연대는 539년으로 추정되며 내부에는 다양한 그림과 명문이 있다.
주변에 4-6세기 고분이 14기가 있다. 이외에도 비봉산 중턱에
사적 238호인 어숙묘라는 벽화고분이 한 기 더 있다.
삼국시대에는 죽령 고개를 넘으면 고구려의 영토였고
순흥은 한때 고구려의 영토였다. 순흥은 고려 때는 흥주라고 불렸는데,
고려 충렬왕과 충숙왕, 충목왕의 태를 연이어 묻으면서 순흥부로 승격되었다.
1413년에는 도호부가 되었다.
한편, 소백산 비로봉으로부터 죽계천가, 풍광 수려한 곳에 통일신라
사찰인 ‘숙수사(宿水寺)’가 있었다. 고려말 최초로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珦)과 그의 아들, 손자가 이곳에서 공부했다.
이 절은 고려시대까지 존속되어오다 언젠가 법통이 끊겼다.
조선 세종비인 소헌왕후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은 사육신의 단종복위 사건에 연
루되어 유배처를 떠돌다가 마침내 이곳에 귀향 오게 되었다. 당시 단종은 바로 태백
산 건너편 북쪽 오지인 영월 청령포로 위리안치되어 있었다. 이에 금성대군은 순흥부
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였다. 이 시도는 1457년(세조 3년) 관노의 밀고로
발각되어 순흥 사람 수백 명이 죽고 순흥부 또한 역도(逆徒)의 고장이라 하여 혁파되
어 풍기, 영주 등에 속하게 되었다. 관청은 헐렸으며 터는 파헤쳐졌다. 이때 숙수사도
불타버렸다.
단종복위운동으로 순흥이 고초를 겪고 나서 90여 년 뒤,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이 이곳에 소수서원을 세웠다.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지역 인사인
안향을 모시는 서원을 세웠는데, 이로써 첫 서원이 성리학을 도입한 학자의 고향에
서게 된 것이다.
순흥은 소수서원이 세워진 뒤 약 100년쯤 지난 후인 숙종 9년
1683년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다시 도읍으로 승격되었으나2) 옛날과 같은 영향력은 찾
지 못했다. 이에 반해, 소수서원은 전국에 막강한 영향을 미쳤다. 오랜 내력을 지닌
순흥이 소수서원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순흥은 1991년에 문화마을로 지정받았다.
<조선 성리학의 판액을 걸다>
주세붕은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했다. 그는 어릴 때 부터 효성과 우애가 지극했다.
그가 네 살 때 형(주세곤)이 다리에 침을 맞는 것을 보고 울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형이 고통스러워하는데, 동생이 어찌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는 1522년 사마시와 문과 별시에 연달아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주세붕이 홍문관에 있을 때 당시 직제학(直提學)이 바르지 못한 말을 하자,
주세붕이 “공은 직제학이 아니라 곡제학(曲提學)이로군.”이라며 비판했다.
이러한 굳은 심성을 바탕으로 그는 엘리트 관원의 길을 걸었다.
주세붕은 풍기에 오자 당시 피폐되어 향촌민 교육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향교
를 관아 근처로 이건, 복구했다. 이듬해에는 숙수사 옛터에 고려 말에 성리학을 도입
했던 순흥인 안향(安珦)의 사우(祠宇)를 세웠다.
안향은 순흥 죽계 상평리에서 태어났다. 1543년에는 사우 앞에 향교 건물을 옮겨다 재실(齋室)을 마련하고 선비들의 배움터로 삼음으로써, 서원의 골격을 갖추었다. 처음에는 백운동서당이라고 했는데, 안축(安軸)과 안보(安補)를 배향하면서3) 1545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불렀다.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을 본떴다. 해당 지역인을 제향하며 사림을 교육하고,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4)
어쨌든 안향(1243-1306)의 고향에 최초의 서원이 섰다는 역사적 인연은 의미심장하다
2). 단종이 복위된 후 1710년(숙종 36년) 소수서원을 끼고 도는 죽계천의 상류에 제월교(일반적으로 청다리라 칭함)를 놓았다.
죽계천에는 금성대군 거사 때 희생된 사람의 원혼이 떠돈다고 했다. 원래 두 해마다 새로 놓는 나무다리였는데, 1966년 시멘트 다리가 되었다. 다리를 설치한 이듬해에는 순흥부사 이명희가 왕의 윤허를 얻어 죽계천 하류에 금성단을 설치했다. 금성단은 3단으로 상단은 금성대군, 우단은 순흥부사 이보흠, 좌단은 모의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사람을 위해 설치했는데, 해마다 봄가을에 향사를 지냈다. 또 순흥부가 부활된 것을 경축하고자 시작한 줄다리기는 이곳 사람들의 민속 행사로 자리 잡아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3) 안축과 안보는 형제지간으로 항상 청렴한 생활을 했으며, 학문 높은 고려말 문신으로 숭상받았다.
4) 주세붕은 1549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도 해주에 그곳 출신 최충을 모신 수양서원을 건립했다.
주세붕은 이때 옛 순흥부 숙수사 옛터에 소 한 마리가 울고 있었는데, 산수풍광
이 백록동서원이 있는 중국의 여산에 못지 않다고 했다. 그러므로 소수서원은 숙수사
를 깔고 앉은 것이 아니고, 이미 비어버린 전통의 터에 새로 들어온 문화로 대치된
것이다.
고려에 성리학이 도입된 지 100년여 뒤 마침내 주자 성리학을 건국 이데올로
기로 하는 조선왕조가 섰다. 그리고 주자학은 조선왕조 5백 년은 물론, 현재 한국인의
의식구조에도 깊이 뿌리내려 있다.
처음 백운동서원을 설립하는 작업은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사액을 받기 전까지 백
운동서원은 풍기 사림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서원이 풍기에 세워지긴 했으나, 경상
도 내 각 군현 유생들에게도 교육 기회가 개방되어 있는 데다, 또 주세붕이 부임한
해부터 연이어 가뭄과 큰 기근이 잇달아 고을의 민심과 재정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
었다.
주세붕은 사당을 세워 유덕한 이를 숭상하고 서원을 세워 학문을 돈독하게 하
는 것이 난을 그치고 기근을 구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며, 당장의 기근을 구하는
것은 일, 이년을 위한 계책이지만 서원과 사당을 세워 민심을 교화시키고 성리학을
뿌리내리게 하는 것은 천 년, 만 년을 위한 계책이 된다며 서원 건립을 강행했다. 과
연 그의 말만큼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도 주세붕은 당장의 기근을 구제하기 위해 공사 기간 중에 구리 수백 근을 캐
내어 밑천으로 삼았다고 한다. 또 그는 소백산에서 산삼 종자를 채취하여 풍기에 인
삼을 재배하게 했다. 풍기인삼의 시작이다. 풍기읍사무소 안에 주세붕 선정비가 있다.
그리고도 주세붕은 임백령이나 이언적 등의 도움으로 제향과 교육을 위한 서원 재정
을 마련하려 애썼고, 자신도 종종 서원에 들러 성리학 강론에 참여했다.
백운동서원은 주세붕이 떠나간 후 지방관들의 노력에 힘입어 발전했다. 1546년 경
상도관찰사 안현(安玹)은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 방책을 보완했다.
1548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은 이듬해 경상감사인 심통원(沈通源)에게 서
원의 편액과 토지, 노비를 하사해 주도록 청했다.
1550년 왕명으로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이 서원의 이름을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지었다. 소수서원은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하다”(旣廢之學 紹而修之)라는 뜻이다. 명종이 손수 편액 글씨를써서 하사하고는 서적도 함께 내렸다. 이로써 우리나라 최초로 국가 공인 서원이 설립되었다. 1633년 주세붕이 여기에 배향되었다.
소수서원은 1543년 첫 입원생으로 세 사람을 받아 가르친 이후 1888년 마지막 입학생까지 350년 동안의 4천2백여 명의 유생을 배출했다, 퇴계의 제자들은 대부분 소수서원 출신이다. 유성용, 김성일, 김룡, 정사성, 장현광, 유치명 등 정관계와 학계 명사를 망라하는 인물들이 소수서원에서 공부를 했다.
국가로부터 공인된 서원이라는 타이틀은 소수서원을 중심으로 사림들이 뭉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후 서원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되었으며, 지방 교육과 교화를 담당한 기관을 넘어서 조선 시대 정치‧사상‧사회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서원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관립기관인 향교는 교육의 기능을 서원에 내주고 문묘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역할이 줄어들었다.
서원은 특히 경상도에 많이 세워졌는데, 중종 때부터 철종 때까지 세워진 서원 417
개소 중 40%가 넘는 173개소가 경상도에 집중돼 있었다. 또 전체 사액서원 200여
곳 가운데 56개소가 경상도에 있었다. 영조 때 이미 김창욱이 서원의 폐해에 일갈했
다.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훼철했다. 소수서원은 이때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였다.
<소수서원의 구조와 건축>
서원에는 앞뒤 넓은 주차장이 있다. 부석사에서 오게 되면
선비촌을 지나 청다리(제월교)를 건너 들어가는 것은 뒷문이다. 우리는 후문을 통해
들어갔으나 제대로 답사하려면 정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물론, 정문으로 들어간다 하
더라도 소수서원은 서원의 정형과는 다르다. 현풍 도동서원이나 안동 병산서원과 비
교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소수서원은 사우(祠宇)에서 출발하여 교육기관이 되었고,
형편과 필요에 따라 환경과 아우르면서 건물들을 앉혀 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 서원에 들어서면 학자수(學者樹)라고 불리는 수백 년은 됨직한 소나무 군락이
있다. 서원 입구에는 약 4m 높이의 숙수사 당간지주(보물 제59호)가 남아있다. 즉,
소수서원을 짓고 생활하면서 굳이 사찰의 옛 흔적을 없앤 것 같지는 않다. 소수서원
에는 곳곳에 숙수사 시절의 여러 석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현대에도 땅속에서 불상
등이 다수 발굴되었다. 불교와 유교의 유적이 곳곳에서 보이는 일이 반갑다. 멕시코시
티에 있는 메트로성당처럼 아즈텍신전을 깔고 앉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슬람사원
이 천주교성당이 된 스페인의 코르도바 성당과 같다고 하면 좀 과장일까?
정문 쪽으로 공자의 나무를 상징하는 은행나무가 있고, 제사에 쓸 재물의 적합여부
를 판단하는 성생단이 있다. 이것도 다른 서원에는 사당 근처에 있는 단이다. 그리고
서원 정문(사주문) 입구 오른쪽으로 경렴정(景濂亭)이 있다.
유생들이 자연을 벗 삼으면서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도록 지은 정자인데, 성리학을 일으킨 중국 북송의 염계 주돈이(周敦頤, 1017-1073)의 호에서 염(濂)자를 따오고 안향을 공경한다는 의미에서 경(景)자를 썼다. 주돈이를 주자(周子), 성리학을 집대성한 남송의 주희(1130-1200)를 주자(朱子)라고도 부른다. 죽계 건너편 물가에는 취한대가 위치해 있다.
서원의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학의 중심인 명륜당이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명륜
당에는 ‘白雲洞’이라는 현판이, 강당 안의 북쪽 면에 ‘紹修書院’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일신재(日新齋, 교수 집무실 겸 숙소)와 직방재(直方齋, 숙소)는 선비들의 기숙 공간인
동재와 서재인데, 다른 서원에서는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만, 여기서는 하나의 연속된 채로 건립하여 편액을 달아 구분했다. 일신재의 오른편에
는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던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가 자리하고 있다.
학구재와 지락재는 스승에 대한 예절로 일신재·직방재보다 계단 높이도 낮으며 한자
낮게 뒤로 물러나도록 지어졌다.
이곳에 반상의 차이를 벗어나 교육했던 일화가 있다. 퇴계가 이곳 소수서원 강학당
에서 유생들을 가르칠 때 밖에서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강의를 듣고 있었다. 인근에
사는 대장장이 배점(혹은 배수)였다. 퇴계는 그 모습을 보고 그를 정식 제자로 받아들
였다. 배점은 훗날 퇴계 제자들의 이름을 적은 퇴계 문도록에도 이름을 올렸다.
배점은 퇴계가 별세하자 방에다 철상을 차려놓고 3년 동안 스승에 대한 예를 다하였고,
선조가 죽었을 때에도 3년 동안 소백산에 올라가 한양을 향하여 곡을 하였다고 한다.
퇴계는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음을 실천했고, 배점은
이곳에서 배우며 익힌 교육을 실천했다. 순흥면 배점리에 그의 정려비(경북유형문화재
제279호)가 있다.
배향의 중심 공간인 사당인 문성공묘는 명륜당의 서북 측 따로 쌓은 담장 속에 남
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곳에는 문성공 안향, 안축과 안보, 주세붕 4명의 위패를 봉
안했다. 다른 사당이 ‘사(祠)’라고 하는데 비해 이곳은 임금이 인정했기에 ‘묘(廟)’라고
칭한다. 사당 바로 뒤 나무 판자벽으로 된 자그마한 장서각, 그 뒤 제사 때 음식을 준
비하는 전사청이 있다.
뒤편으로 마주치는 영정각에는 주문공 주희, 문선공 안향, 문민공 주세붕, 이덕형, 이
원익, 허목 등의 초상이 있다. 그리고 소수서원에는 새로 잘 지은 전시관과 교육관이
있다. 이 건물이 서원의 뒤편에 있기에 망정이지, 그 규모로 서원을 압도하는 점이 아
쉽다. 전시관 안에는 성리학자의 계보와 인물들 그리고 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본래 소수서원을 들어오면서 집행부에서는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먼저 가기를 원했
다. 나는 이왕 온 것이니 소수서원의 구조는 파악하고 촬영을 하기를 원해 먼저 건물구
조를 파악하기로 했다. 그러나 유물관에 들어간 교수님들은 내가 나왔는데도 나오지 않
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경치를 잡을 시간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이르지 못한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서 또한번 금성대군의 ‘한’이 있다. 서원을
둘러 흐르고 있는 죽계천으로 가면, 붉은 글씨로 ‘敬’, 흰 글씨로 ‘白雲洞’이라고 새겨
있는 바위를 보게 된다. 경(敬)자는 주세붕이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한다
는 뜻으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세간에는 주세붕이 서원을 짓고나서 밤만 되면 서원 옆에 있는 바위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는데, 주민들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의 원혼이라고 했다. 주세붕은 고심 끝에 장인을 시켜 죽계의 바위에 경자를 새기고, 원혼을 달래기 위해 경자에 붉은 칠을 하고 위령제를 지냈다.
백운동은 퇴계가 썼다. 또는 숙수사를 폐찰하면서 불상들을 죽계천에 모두 버렸는데, 밤마다 울음소리가 들려와서 퇴계 이황이 경자를 새겨 공경하는 뜻을 나타냈더니 그제야 소리가 그쳤다는 설도 있고, 단종복위 운동에 쓰러져간 선비들의 혼백을 달래려고 했다는 설도 있다.
소수서원은 1963년 사적 제55호에 지정되고, 2019년 ‘한국의 서원’이라는 명칭으
로 다른 8곳5)의 서원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한편, 소수서원 바로 뒤에는 소수박물관이 만들어졌으나 이곳은 들리지 않았다. 또
한 박물관으로 이르기 전에, 숙박부터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터를 체험하게 하는 ‘선비
촌’, 한옥·한복·한식·한글·한지·한음악의 6개 한국문화를 공연하고 체험하는 ‘대한민국
K-문화테마파크’, 학생과 일반인들을 대상하는 한국 인성교육을 목표로 하는 ‘한국선
비문화수련원’이 단지로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빼놓고 온 소수박물관까지 넣
어서 이곳도 하루, 이틀 조선시대에 푹 빠져 지낼 수 있는 곳이다.
내륙의 바다, 청풍호(淸風湖)
부석사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힘을 내었다. 음식도 풍부하고 누룽지까지 나오는 푸
짐한 식사였는데, 거기에 집행부는 센스있게 부석사 인근에서 나는 사과를 후식으로
5) 도산서원, 병산서원, 옥산서원, 도동서원, 남계서원, 필암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
마련했다. 나는 사과에 추억까지 얹어 정말 반가와 했다.
점심을 먹고는 청풍호로 향했다. 충청북도를 흔히 청풍명월의 고장이라고 하는데,
청풍이 바로 이 청풍면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청풍호는 이곳 일대에 1985년 준공된
댐으로 인해 형성된 인공호수이다.
충청북도 제천시와 충주시에 걸쳐 조성된 이 댐은 높이 97.5m, 길이 464m, 면적 67.5㎢(만수위 면적 97㎢)이고, 저수량은 27억 5천톤이다. 담수량은 소양호 다음이며, 발전시설용량 41만 2천KW, 홍수조절 능력 6억1천 6백만㎥의 규모이다. 충주시와 제천시, 단양군은 물론 인근에 13억톤의 생활용수, 12억 톤의 관개용수, 8억 톤의 공업용수를 공급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 정도면 이 거대한 ‘내륙의 바다’의 규모를 그릴 수 있을까?
이 인공 호수를 제천 지역에서는 청풍호라 부르고, 충주 지역에서는 충주호라 부른
다. 상호간 이름을 제압하기 위한 갈등도 있다. 아무튼, 이쪽 청풍호는 댐 건설 직후
부터는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주변의 호수를 가리키다가 나중에는 점차 제천시 행정
구역 내의 수역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청풍호 주변에는 빼어난 풍광들이 산재해 있다. 물맛이 좋기로 유명한 비봉산과 청
풍읍의 진산인 인지산이 있으며 남한강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금수산이
있다. 이외에도 명산들이 청풍호 주변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변의 깊은 계곡과 함께 햇
빛으로 반짝이는 수면은, 한반도에서는 가장 바다에서 멀리 있는 이 지역에 물의 나
라를 만들고 있다. 이 비경(祕境)을 연간 1백만 명 이상이 찾는다고 한다.
나는 이곳이 처음이다.
나는 옛것을 찾아다니지, 옛것을 아예 발밑에 묻어버린 곳은 방문할 계획을 해보지 못하는데, 명예교수회 덕분에 새 세계를 접했다. 아침에 어린이날 노래로부터 젊어지기 시작한 우리는 종일 숲길에서 노닐다, 오후에 청풍호에 도착하자 정말 아이가 되어 버렸다.
케이블카가 정점이었다. 케이블카를 탔던 게 언제였던가? 바닥이 유리로 되어있는 크리스탈 캐빈도 있다고 하는데, 우리 팀은 일반 캐빈을 탔다. 한번에 8명씩 타게 되는데, 줄 서서 도착하는 대로 타는 바람에 때로 부부가 갈라져 타게 되기도 했다. 우리는 ‘이산가족’을 놀리며, 비봉까지 약 2,3km(9분간 운행)를 하늘에 떠서 떠들었다.
비봉산역에서는 1 시간가량의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이곳에는 초승달 포토존 등
여러 형태의 포토존이 있고, 비봉하늘 전망대에서는 360도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도
있다. 또 타임캡슐도 운영하는데, 전망대에 꿈을 담은 타임캡슐을 보관하고 2년 뒤에
찾으러 가는 것이다. 또한 케이블카를 운행하는 물태리역 건물 내외에도 환상미술관,
족욕카페, 약초 숲길, 대자연 여행을 하는 20분짜리 영화관 등 여러 시설이 있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끝없이 돌고, 또 눈이 시리도록 푸른 물과 계곡을 보고나서
는 베이커리 카페에 들어가 앉기도 했다. 정신의 지주라는 불교와 유교로 이미 지적
욕구를 채운 우리는 자연 산하에 그대로 늘어졌다. 다시 우리를 부르는 곳,
물론 이곳도 다 본 동료는 없다. 아마도 집행부는 다음에 오붓이 와서 즐기라고 서
두르는 것 같다.
참고로, 이 거대한 인공호수에는 5곳에서 유람선도 운항하고 있다.
기암절벽의 암봉과 하늘이 만들어내는 풍광을 물소리를 들으며 즐길 수 있다. 충주나
루에서 장회나루까지의 뱃길은 52㎞인데 1시간 30여분 걸리는 선상 여행이다. 단양
팔경 중 구담봉, 옥순봉이 이곳에 들어있다.6)
다음에 다시 와야 하는 이유는 물론 이 호수가 깔고 앉은 역사와 대면하기 위해서
다. 호수가 큰 만큼 수몰된 마을도 엄청나다. 댐 건설 당시 약 5만 명의 수몰 이주민
이 발생했는데, 그때 5개 면에 걸쳐 61개 마을이 물에 잠겼다. 그중에서도 청풍면은
27개 마을 가운데 겨우 두 마을만이 남았다.
사람들은 뿔뿔이 다른 고장으로 떠나고, 그들이 다니던 길로는 물고기가 헤엄치고, 그들이 살던 마을 위로 충주와 단양을 오가는 배가 떠다니게 된 것이다. 제천시의 수몰 면적이 가장 크다. 청풍은 남한강 줄기를 낀 살기 좋은 곳이어서 오래 전부터 사람살이가 시작되어 곳 곳에 선사시대의 집자리와 고인돌,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고분군들이 흩어져 있었다.
6) 소백산맥 줄기와 남한강 및 그 지류가 엮어내는 단양의 풍경 중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은 빼어난 곳을 단양팔경이라 부른다. 1경 하선암, 2경 중선암, 3경 상선암, 4경 사인암, 5경과 6경인 구담봉과 옥순봉, 7경 도담삼봉, 8경은 천연성문이다.
고구려 때에는 사열이현이라 불렸고, 신라 경덕왕 때부터 청풍으로 불렸으
며, 왕후의 관향이라 하여 충청도에서 유일하게 도호부로 승격되기도 했고, 고종 때는
제천과 함께 군으로 승격되었다.
수많은 역사와 또 역사가 형성한 유적들이 있었다. 청풍 면소재지는 물에 잠긴 읍리 대신 물태리로 옮겨졌고, 수몰 지구에 있던 각종 유물들은 청풍문화재단지나 충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청풍문화재단지에는 청풍면 일대에서 옮겨온 유물들로 옛 고을을 재현했다. 정자, 누각, 민가, 그 안에 있는 살림살이까지 옮겨 놓았다. 이와 더블어 단양수몰이주기념관도 있다. 시간을 많이 할애할만한 장소들이다. 그 푸르른 물속에 있는 역사를 보고, 골목골목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더듬어 만나고 나면 이 계곡은 인생의 의미를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
<이동하는 강의실>
우리는 한껏 부풀었다. 그리고 철저한 집행부는 이제 호수에 닿은 언덕에서 땅을 밟고 즐길 장소에 풀어주었다. 커피값도 각각 나누어주어 자유롭게 소그룹이 지어지고, 사적인 대화로 빠져들었다. 그러니까 단체로 왔지만, 끼리모임도 이루어졌다. 우리가 간 곳은 Papas Brot 카페였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서양풍의 숙박촌이 형성되어 있는데, 카페는 그 단지에서 가장 물 쪽으로 가까운 위치였다. 그래도 물까지는 넓은 풀밭이 펼쳐져있었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수영장도 있다는데, 지금은 수리하는지 보지 못했다.
우리는 다시 풍기로 가서 ‘인삼 한우불고기’로 저녁을 하고 대구로 출발하기로 했다.
영주 특산품으로는 인삼, 한우, 사과, 인견을 꼽는다. 인견은 1930년경 가내수공업 직
기로 시작해서 현재 전국 생산량의 86%를 담당한다고 한다. 일명 ‘꿀사과’라 불리는
사과는 이미 점심 때 즐겼다. 앞서 인삼은 주세붕 군수 때 시작했음을 보았다. 다른
곳 산물보다 인삼향이 강하며 유효사포닌 함량이 매우 높다고 한다. 또한 이곳 한우
는 육질이 우수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특히 인체에 좋다는 마블링(불포화지방산)을
많이 함유하고 있으며, 독특한 향(올레산)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 한우에 그 인삼
으로 저녁을 했다. 인견을 살 시간만 없었지 다 누리고 간다.
이렇게 꿈같은 길로만 다니면서 유적과 자연과 특산물까지를 하루 짧은 시간에 다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이 산골에서 자란 운영간사 강용호 교수님의 정보력과 조
직력 덕분이다. 다만, 부석사, 소수서원, 청풍호, Papas Brot까지 네 곳을 모두 1시간
정도씩만 방문했다는 것은 물론 너무 서두른 답사였다. 아마도 집행부에서는 이 코스
를 알려주고, 나중에 가족들과 함께 2-3일 날 잡아서 오롯이 즐기기를 권하려는 의도
였던 것 같다. 나도 다음 방문을 위해, 또는 다녀온 곳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그래도 사찰이나 서원에서의 오묘한 교리나 사상보다는 유적 설명에
머물러서 아쉽다. 언젠가 다시 사상적 측면을 다루는 기회를 잡아야겠다.
나날이 진화하는 우리의 답사는 다시 버전이 더 upgrade되었다. 늘 내용이 풍성해
지고 자율적 계획의 범위가 넓어지는 것이다. 청풍호 일대의 오후는 바로 소그룹으로
대화하고 즐기는 자율적 범위였다면, ‘버스 안 특별 강의와 활력’은 답사의 내용이 풍
성해지는 활동이었다. 달리는 강의실인 버스 이동 시간에 평생을 선생으로 살은 우리
들은 누구 지명할 것도 없이 각자의 전공으로 오늘 방문한 곳에 대해 부연 설명을 했
다. 소수서원을 나와 청풍호로 향하면서 홍우흠 교수님은 주돈이로부터 시작한 성리
학이 주자에 와서 완성되는 과정과 그 정신세계를 차분히 설명하셨다. 또 청풍호를
떠나면서 이석순 교수님은 물과 농사에 대해 설명했다. 이런 특강을 마련하려면 얼마
나 여러 번 교섭하고 사정해야 되던가? 그런데 현장에서 동료들과 나누고 싶은 애정
으로 이루어지는 설명은 바로 지혜로 환원된다.
또 특산품으로 저녁까지 채우고 귀가하는 길에는 하정상 교수님께서 우리가 아침에
제대로 음을 찾지 못한 ‘아빠의 청춘’을 멋지게 불러 우리의 평균을 만회시켜 주셨다.
이후는 당일 방문한 곳에 대한 복습, 그리고 운영위원장의 생활 지혜 등이 이어졌다.
아마도 다음번에는 더욱 활발한 이동강의실이 되지 싶다. 언젠가는 마이크를 잡으려
는 사람이 돈을 내야 할지도?! 이제는 집행부의 초대가 아닌 자발적 참여로 떠나게
될 것 같다.
산속을 헤집고, 경북에서 충북의 경계를 넘어들며, 푸름 속에 지냈던 하루- 그곳을
함께한 교수님들과 사모님들은 언제나 거기 있을 것만 같은 얼굴로 새겨졌다. 물론
이번에도 사진작가를 모시고 다녀서 우리의 근사한 순간들이 눈에, 귀에 저장되었다.
작가가 훌륭한지, 참가 모델들이 실력자들인지 포즈와 연출까지 완벽한 '예술 작품'이
잡혔다. 또 이 작가는 편집까지 담당한다(강용호 교수님). 다만, 앞으로는 어린이날 노
래도 좀더 동요 목소리로 불러야겠다. 목소리도 나이들지 않도록 가꾸어가기를! 내 대
학시절 부석사 안양루에는 빨간 고추들을 널어 말리고 있었다. 모든 곳이 엄청 변했
는데도 근 50년 전의 장면을 눈에 담고 다녔던 것은 우리의 하루가 매우 편안한 고
향 같았다는 말이리라.
Photos: https://cafe.daum.net/yuprofem/YpLG/15
Video: https://cafe.daum.net/yuprofem/YpGh/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