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이라는 말이 어디에 사용되느냐에 따라서 때론 긍정적으로 때론 부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할리우드의 이단아라고 하면 고리타분한 영화계를 뒤집어 놓는 새로운 대작을 터뜨린 배우나 감독을 지칭할 때 사용한다. 그래서 할리우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감독 올리버 스톤을 평론가들은 할리우드의 이단아라고 부르고 요즘 최고가를 올리고 있는 아이언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아버지인 다우니 시니어 또한 그 세계에서는 이단아로 불렸다. 이처럼 이단이라는 단어는 꼭 나쁜 이미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종교에서 이단이란 무슨 사이비 단체처럼 이상한 의식을 행하고 피를 빠는 흡혈과 같은 이미지로 전락해서 “저기, 이단이다” 하면 사람들이 꺼리고 아예 접촉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단 고깔을 가장 성공적으로 사용한 것은 다름 아닌 로마교였다. 중세의 가톨릭은 자신들의 타락한 진상을 숨기고 백성들의 눈을 가리기 위하여 개혁자들에게 이단이라는 고깔을 뒤집어씌웠다. 마치 마녀사냥 하듯 이단이라는 고깔을 씌워 버리면 사람들이 아무리 바른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으려고 하므로 이단 선언보다 쉽고 간편한 것은 없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트리엔트공의회(1547)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진리로 믿는 자들에게 저주(anathema)를 선언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개혁자들을 이단으로 선언했다. 개혁자 위클립, 얀 후스, 루터, 칼뱅 그들은 한 때 파문 또는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사람들이다. 영국 교회도 마찬가지다. 프로테스탄트의 노선을 따랐던 크래머와 영어 성경 번역자 윌리엄 틴데일은 이단이라는 선고를 받고 화형을 당했다. 도대체가 무엇이 이단이고 무엇이 정통인가? 자신에게 불리하면 상대방에게 이단의 고깔을 씌워서 권력과 힘으로 진리를 겁박하려는 것이 흔히 이단 선언의 역사요 추악한 종교적 뒷거래였다. 그러고 보면 이런 일은 개혁자들이 처음이 아니었다.
(행 24: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초기 교회가 한창 부흥하고 확장되어 갈 때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당시 유대 사회의 주류였던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에게 예수님은 나사렛 이단의 창시자였고 그 교를 전파하는 바울은 나사렛 이단의 괴수였다. 이 선고에 대하여 바울은 자신이 바로 그 이단이라고 커밍아웃한 것이다.
(행 24: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행 24:15)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행 24:16)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
그는 총독 앞에서 재판받다가 자신이 이단임을 고백한 것이다. “맞습니다. 저들이 말하는 그 나사렛 이단의 신봉자입니다. 그런데 그 이단은 하나님을 섬기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으며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을 것도 믿습니다. 그 믿음을 따라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고 나는 그분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안식일 교회는 이단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그래서 “왜요?” 하니까 “거기는 주일 대신 안식일을 지키잖아요?” “성경에 없는 주일을 안 지키고 성경대로 안식일 지키면 이단이에요? 그럼 나는 이단 할래요!”라고 대답했다. 유대의 바리새인들이나 중세 로마의 사제들이나 현대 개신교회의 일부 목사들의 이단 주장은 그 동기가 같다. 기득권 지키기, 자신들의 잘못된 점 숨기기 등이다. 자기들이 이단의 후예들이며 화형을 당하면서도 깨달은 진리를 지키고자 했던 그 이단아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 채 이제는 주류가 되었다고 이단 장사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 초심을 잃지 않게 하소서 언제나 겸손하게 그리고 바르고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고 말씀만을, 진리만을 순종하여 따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