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업화시대에서 디지털시대로
-- 괴물의 등장 대 인민의 노래와 광장.
감각이든 의식의 추론하는 사유든, 대상을 파악하는 방식에서 표면의 현상들을 조립과 종합을 하는 경우에는 알게 모르게, 사물들이 원자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전제로서 인정하고 있다. 이런 전제에는 공간이 선전제로서 있어야 한다는 것도 이런 원자론자류들의 사고이이다. 이에 비해 공감성이라는 살아온 과정의 내재적 축적과 합의는, 표면의 형성 이전에 이미 의식 속에 또는 영혼 속에 죽 내재해 있으면서, 현실에서 어떤 방식으로 발현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두 경우가 다른 길이라고 하면서도 둘 사이를 뗄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철학사적으로 등급 또는 위계에 의해, 후자가 하층(심층)으로 전자가 상층으로, 사유하고 대상화하기에 익숙해져 왔다. 이런 습관적 사고에서는, 표면적으로 또는 현상적으로, 사람들이 사회의 위계에서도 적용하기도 하며, 백성과 위정자 사이처럼 규정되어서 따로 태어나는 것으로 여긴다. 이런 위계적이고 계층적인 사고(思考)는 공동체의 형성에서보다 국가적 체제에 익숙하고, 또한 계급적 태생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데서 왔다. 이런 사고에서는 현실이라는 표면에서 각자의 삶의 위치가 배치된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마치 흙수저로 또는 금수저처럼 태어났다고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태어나, 가족, 동아리, 공동체, 사회, 국가 등을 형성하면서 살아가는데, 이 삶의 영역들에서 덩어리들의 조직화의 방식이 현상적으로 비슷하거나 유비적으로 보이지만, 내재성을 포함하여 각 위상들은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물에 대한 인식의 대상을 다루는 지식의 위상과, 체계화는 사람들의 운명적 삶의 위상은 먼 거리가 있다. 그런데 삶의 터전과 더불어 인간들의 관계와 연관들에 대한 재인식은, 대상이라기보다 계속되는 사건들에 대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재인식의 주제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 조직화, 역사, 심리(영혼)론에 있을 것이다.
*
대상에 대한 표면적 재현의 인식은 지식과 삶에 대한 도구화의 정교화에 있기에, 인간에게 편리와 안정(편안)에 대한 문제와 연관이 크다. 여기에서는 배후학으로서 도덕과 종교에서 말하는 즐거움, 행복, 환희, 평등, 자유 등과는 거리가 있다. 물론 도구의 다룸에서 즐거움과 기쁨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며 살아가는 즐거움과 슬픔, 잘과 잘못에 대한 서로간의 감정과 감화와는 다른 영역일 것이다. 우리가 여러 번 언급하였듯이, 재현의 인식이 삶의 내재적 재인식에 적용은 차원 또는 범주가 다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인식에서 재인식을 설명하려하고 또는 설득하려는 오랜 인습과 습관을 버리지 않고 산다. 인습은 세뇌된 지식만큼 맹목적이다.
게다가 이런 인습을 통해, 변화하는 또는 새로운 사회체에게도 지식과 체제를 막무가내로 적용하려는 사회체가 있다. 이 체제에서 여전히 힘(권력, 권세, 권위)을 발휘한다는 것에 대해, 개인은 어쩔 수 없이 휩쓸려간다. 사회 속에서 산다는 것이, 힘들에 포섭되었건, 강압에 의해 포획되었건, 이 힘들에 굴복하여 투항하였건 간에, 새로운 삶의 사회체(집회, 결사)를 만들 수 있는 자치와 자율성을 찾는 노력은 여전히 미흡해 보인다. 그럼에도, 맑스가 말하는 생산양식의 변화는 인간의 의식을 변하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세계사에서 19세기 후반 이해로 맑스가 공산사회를 말하였고, 생산양식의 변화에 따른 사회체의 변화는 20세기에 분명하게 소비에트연방과 중화인민공화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20세기 후반에 규소의 시대을 연 이래로 21세기는 다극체로 변하고 있다.
대상이 아니라, 사건에서 현실태가 다양체라고 하는 이론의 등장은, 비유클리드기하학과 열역학 이후이지만, 의식과 자연배후학에서는 벩송으로부터이다. 구체적으로 삶의 양식으로 등장한 것은, 미국의 정복전쟁에 반대하는 반전과 새로운 생활양식을 주장했던 세계사적으로 1968년 이후였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습과 습관이 다시 힘을 발휘하여 제자리로 돌려놓으하여 마치 순환 또는 회귀인 듯이 보인다. 맑스의 생산양식 이래로, 68세대의 과정을 겪으면서, 20세기 말에는 산업화의 생산양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터전에서 문화양식으로 바뀌고 있다고들 한다.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대립적 구도는 문명에 대한 관점인데 비해, 삶의 양식에서 즐거움과 행복에는 각 영토(토지)에서 오랜 과정에서 있어왔던 문화양식이란 점이고, 이 문화양식은 지구상에 다극체이상으로 다원화(다양체)를 펼치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제국의 도구/무기를 통한 지배의 방식이 여전한 것으로 보여, 문화양식들의 모습이 잘 드러내지 못하고 있어, 구시대 인습처럼 산업화와 누리소통의 양식이 전지구에서 비슷한 삶의 양식으로 일반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지구화의 도구는 기계적 생산양식에서, 디지털의 발달로 정보기술(IT, SNS, AI, 블록체인)에 의한 통일이 있을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영토에 따른 방식이 다극화와 다양체를 만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 중에서 미국이란 제국 체제와 달리 러시아와 중국이 있고, 게다가 거대한 인도가 있는가 하면, 페르샤 후예인 이란계와 중동의 아랍계 등이 다른 문화의 형성을 이루어가고 있다. 다극체와 다양체는 한 영토 속에 다문화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인습과 습관에 익숙한 또는 세뇌는 20세기 후반의 다극체의 성립과 문화의 다양체가 성립되고 있음에도, 왜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사람들이 한 양식 또는 편집증(파라노이아)에 포섭, 포획, 포로가 되고 있는가? 우리가 4.19, 5.18을 거치면서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과 항쟁을 했음에도 반동에 의해 거꾸로 되돌아가는 것을 반복하였던가. 그리고 며칠전 윤석열 집단의 반란이 인민의 삶을 위협하고 있는 이런 반동이 왜 반복되는가. 혹자는 박정희야 총 맞았지만, 민주화에서 전두환을 민주적 제도에 의해 분명하게 단죄하고 차명 재산들을 국고로 환수하는 작업을 확실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한다. 이들과 같은 반동의 후예들이 이명박, 박근혜에 이어 괴물 같은 수괴 윤석열을 만든 것은 확실한 단죄가 없었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면 대중들은 왜, 포섭, 포획, 포로가 된 예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연좌제가 없다 하더라도 과거의 과정을 보건데, 반동들이 들어서 상층을 차지하는데 비해, 저항과 항쟁의 노력은 핍박과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인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기 위해, 이번에는 단죄를 제대로 해야 하고, 이에 가담한 자들의 부정한 재산을 국고로 귀속시켜야 할 것이다.
역사는 반동들이 행한 역사적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자들 냈는지를 안다. 그럼에도 희생은 제례처럼 추념하는 습관으로 되돌아가서, 마치 반동들의 인식과 체제에 복속될 수 밖에 없다고 여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인습과 세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도 교육이라 했고, 반동들이 이익 차지하는 집단으로 남아서 사적 이익추구의 정당성을 일반화시키는 것도 교육이라 했다. 이 윤석열 집단이 들어서면서 사회전반에서 또한 역사교육에서도 일본에 종속시키고 있다. 그런데 그 일본의 종속이 미국의 전략이라는 점이다. 남녘을 일본의 영향 속에 두고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계산이다. 이런 방식을 군사적으로는 미국에게, 경제적으로 일본에 예속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사회제도를 일본에 속복키려는 전략을 쓰고 있다. 이런 예속과 포획 전술에 끌려가는 극우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 이번 윤석열의 수구반란 세력들에 의해 분명해졌다. 전두환 세력들뿐만 아니라 이명박과 박근혜 세력들도 제대로 단죄했어야 했다. 이들이 재등장하지 못하게 하는 교육은 여전히 중요하다. 사물에 대한 인식을 넘어서, 사건과 역사에 대한 재인식이 필수적이다.
*
<자연과 문화에 대한 관심과 교육이 필수적인 만큼이나, 사회체에 대한 이해와 실행의 방식이 필요하다. 삶 그리고 함. 자연권의 토대 위에서, 다양체의 문화론으로, 그리고 사회체의 다양한 조직화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를 통해서만이 인간이 인간다움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항대립으로 독일에서 그리고 일제이래로 만들었던 보안법을 철폐되어야 한다.> (<옮긴글>)
인간은 삶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 자신의 현존의 지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타성, 즉 마치 물체가 자리를 차지하고 가만히 있으려는 관성처럼, 또는 사회 역사적 인습과 개인의 습관에 매여 산다. 그럼에도 그렇게 사는 것이 각 개인에게 즐겁고, 유쾌하며, 나아가 행복과 미래의 환희를 가져다준다면, 그 인습을 누가 마다할 것인가? 이렇게 사람들은 세상살이에서 관례대로 또는 현상 그대로 살기를 바랄 수 있다. 그런데 소수의 이익집단은 다수의 인민을 착취하고 지배한다 그 집단은. 그 지배를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불평등과 불의, 착오와 악행이 드러나는 것을 감추기 위해 더 많은 실수와 잘못을 범한다. 작은 악을 더 큰 악으러 덮으려는 집단이다.
씨족사회, 부족사회, 공동체, 도시국가 등 여러 방식을 거쳐 살아보면서, 타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치와 자율을 누리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잘 안다. 그래도 지역 사회를 연합하여 만일 공동체를 이루고 산다면, 분업과 기술 전수를 통하여 삶을 편리하게 만든다는 것도 안다. 대규모 공동체의 성립이 황제(참주)제를 형성했을 것이다. 이를 그리스에서는 참주제라고 표현하였다. 황제제에서 백성은, 자기의 생산 작업을 체제 속에서 모자라지 않고 또한 넘쳐나지도 않는 생산을 하며, 공동체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지혜로서 이어왔다. 인간의 탐욕과 과도한 쾌락의 추구는 이런 조화를 깨고, 힘 있는 자, 좀 더 안다고 여기는 자, 더 잘 조직화하는 자들이 재산과 도구를 점유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이 점유 또는 맑스 주의 표현으로 전유는 대규모 사회 형성과 제도의 정립으로 위계를 갖추고 상부와 중간, 그리고 하부(네 계급 또는 세 계급)라는 층위를 갖는 계급을 형성하였다. 이상하게도 이런 네 계층들의 형성은 철기시대부터이며, 그 시기에는 이전과 다른 생산력의 발달로 소공동체가 자급자족을 넘어서 생산하며, 다른 공동체와 교환이 빈번해지는 시기라는 것이다. 교환이 공동체내부의 문제일 경우에는 합의와 조화라는 기본적 동의가 바탕으로 깔려있을 정도로 구성원들 사이의 공통인식이 있다. 표상에 대한 공통의 가치를 부여한다는 의미이다.
도시국가들 사이에서, 또는 동방과 동양의 황제제도들에서 생산과 교환은 합의와 조화가 먼저라는 것이 사라지고, 위계 체제의 유지와 강력한 군대를 유지를 통하여 재화의 확대와 재생산이 현상으로서 전면에 등장하였다. 이런 체제에서 부의 유지는 생산의 확장에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전쟁과 식민 정벌을 통한 약탈과 전유, 또한 근대에서는 식민지의 지배방식통하여 수탈과 착취를 하며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는 전쟁도구/무기의 발달이 있었다. 이 발달에 과학은 동조했던 것은 분명하고, 그 과학에 지식과 인식은 단위 체계의 정확성을 보태었다. 더 나아가 디지털의 시대에, 인공지능(AI)이 생산도구의 연쇄과정에 쓰이면서 인간 노동력을 축소화하였지만, 인간이 노동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여기는 이는 드물다. 이 생산도구를 전쟁무기로 전화시키는 것이 신자유주의 제국의 지배 방식이 아닌가. 그런데, 기술정보(IT)가 하나의 통일성아래 배열과 배치될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푸꼬가 현상에서 새로운 ‘지도그리기’가 말할 때, 세계는 다극체로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들뢰즈가 ‘체’들의 다양체로서 조직화의 다양체들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다양체의 생성이란 재인식을 통한 내재적 의식의 발현이며, 내재성의 층위와 두께만큼의 다양한 선들을 표출한다. 이 표출선, 용출선을 따라 흐르는 이들이 새천년의 젊은이들(MZ)이다.
19세기의 산업화에서 새로운 생산양식의 발달이 회화에서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음악에서 어린이와 소녀들의 노래소리에서 변조들, 문학에서 단편소설의 등장등이 있었듯이.
젊은이들은 우선 대중음악이라는 문화의 선을 따라 흐르고, 그리고 영화와 누리소통에 의한 유투브로서도 흐른다. 그 흐름에서 내재적 흐름도 있다. 그 흐름이 과거의 역사와 영토상의 삶의 양식과 더불어 흐른다는 것을 느낄 때, 다발적이고 총체적 덩어리가 흘러간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박근혜 탄핵시에 광화문의 촛불시위와 달리, 이번 여의도의 촛불시위는 이런 새로운 장면의 창안의 한 장면이라고 느낀다. 젊은이는 촛불이 아니라, 그들이 즐기는 스포츠의 응원봉, 그들이 함께 하는 대중음악을 상징하는 팬덤봉이 등장하였고, 그들은 막간을 이용하여 과거의 노래와 더불어 자기들의 노래들을 틀어 달라고 요구했다. 이 광장은 세대 간의 노래이상의 세대 차이가 있었지만, 몸 흔들기와 흐름은 같은 파도를 따라 흐르고 “체”의 형성은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어쩌면 새로운 세대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모습일 것이고, 이 현상은 앞선 세대의 “산자의 따르라”를 포함하여 스포츠의 응원가와 “소녀시대” 패덤들의 떼창을 부르며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21세기를 살아온 젊은이 시대가 열리는 사건이 여의도의 대중문화의 물결이었다. 이 문화의 연속이, 과거의 천년의 불국정토, 오백년의 평천하, 새로이 수입한 실증적 학문, 다극화 시대를 여는 우리말 시대,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위에다가 새로운 층위로서 물결의 표면을 수 놓을 것이다. 세계사의 새로운 “지도그리기”는 젊은이들의 무한히 열린 열정, 그리고 과거의 연속성을 지난 세대의 내공, 등과 어우러져 새 시대의 창안, 발명, 창조의 길을 갈 것이다. 지금, 디지털 시대이다.
우리 입말을 쓰는 젊은이가 빛처럼 퍼져나가, 세상에, 세계사에서, 새로운 지도를 그릴 수 있다. 이런 시대이다.
(57WKF) (57WL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