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개정 교육과정 고시 철회를 요구하는 역사학계, 역사교육계 성명서>
민주주의를 무시하고 졸속 교과서를 강요하는 교육과정 고시를 철회하라! - 2011년 개정 교육과정 고시를 철회해야 하는 다섯 가지 이유 -
교육과학기술부는 지난 8월 9일 2011년 개정 교육과정을 확정, 고시했다. 역사교육 정상화를 바라는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는 교육과정 흔들기가 시작된 2009년부터 줄기차게 졸속적인 교육과정 개정에 대해 유감과 우려의 뜻을 강하게 표명해왔다. 이런 우려에도 교과부는 2009년 교육과정 총론 개정, 2010년 고등학교 한국사 부분 개정에 이어 이번에 또 2011년 개정 교육과정을 고시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 교육과정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으며 고시 철회를 강력히 요구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충분한 의견수렴 없는 졸속 교육과정 교육과정은 초중등 교육의 큰 얼개를 정하는 것으로 말 그대로 교육의 전체 ‘설계도’라고 할 수 있다. 교육과정에 따라 교과서가 만들어지고 실제 수업과 평가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교육과정이 어떻게 단 4~5개월 만에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이번의 경우 교육과정 개발 실무를 담당한 ‘역사 교육과정 개발 정책연구위원회’가 국사편찬위원회에 구성된 것이 2011년 3월 15일이고 교육과정 고시가 이루어진 것이 8월 9일이니, 실제 작업 기간은 4개월 남짓하다. 놀라울 뿐이다. 2007년 개정 교육과정을 비롯한 이전의 교육과정은 다양한 의견 수렴과 토론 과정을 거쳐 2년 이상 걸려 완성되었다. 그런데 이 정부 들어 만들어진 2009년 개정 교육과정(총론), 2010년 부분 개정 교육과정(한국사), 2011년 개정 교육과정(교과) 모두 충분한 의견수렴 없이 수개월의 짧은 시간 안에 졸속으로 만들어졌다.
2. 절차적 민주주의를 무시한 교육과정 ‘속도전’으로 교육과정 개정 작업이 이루어지다보니 다양한 의견 수렴이나 토론, 설득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는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려웠다. 특히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는 ‘역사교육 정상화’ 노력의 일환으로 오랜 토론 끝에 마련되었던 2007년 개정 교육과정이 훼손되는 것에 대해 꾸준히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를 내왔다. 2009년 8월 교과서 검정 신청을 불과 3개월 앞두고 일부 뉴라이트 학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역사 교과서 집필기준(안)’을 새롭게 발표하고, ‘미래형 교육과정’이란 이름으로 2009년 개정 교육과정을 준비하던 때부터 이에 대해 반대하는 성명서 발표가 잇달았다. 그럼에도 교과부는 2009년 12월 2009년 개정 교육과정을 발표했다. 2010년에는 이미 검정 통과된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를 불과 한 달 만에 ‘한국사’로 고쳐 쓰도록 강요하는 황당한 일까지 벌어지기에 이르렀다. 2011년 들어 개정 교육과정이 졸속으로 추진되는 것에 대해서도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충분한 의견수렴을 요구했다. 그러나 교과부는 학계와 교육자들의 요청은 무시한 채, 형식적인 공청회를 방패삼아 교육과정 개정을 강행했다. 심지어 이번에 고시된 2011년 개정 교육과정에는 그것을 만든 기구에서 논의조차 된 적 없는 용어가 발표단계에서 추가되는 독재적 행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3.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는 교육과정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졸속 교육과정 개정은 역사교육을 정치도구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일부 정치세력과 교과부의 인식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처음부터 정치적 기구로 출발한 ‘역사 교육과정 개정 추진위원회’가 교육과정 개정에 일일이 개입하고, 국가기구인 국사편찬위원회가 교육과정 개발부터 집필기준 작성, 검정까지 주도하도록 한 것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국가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조치였다. 2002년 만들어진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과목을 폐지하고, ‘한국사’ 과목에서 현대사 부분을 크게 줄인 것은 어느 선진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역사교육의 퇴행이 아닐 수 없다. 2011년 개정 교육과정 현대사 부분에서 ‘민주주의’라는 표현이 ‘자유민주주의’로 바뀐 것은 정치편향의 대표적 사례이다. 애초 ‘공청회’에 제출된 초안에도 없었고, ‘정책 연구위원회’가 올린 최종안에도 없었다. 심지어 ‘심의위원회’에서조차 논의되지 않은 내용이 고시 직전에 누군가에 의해 추가되었다. 교과부와 국편은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대부분 뉴라이트 관련자들로 구성된 ‘한국현대사학회’의 건의가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유서 깊은 수많은 학회의 의견은 철저히 외면하면서 아직 학문적 성과도 없는 신생 학회의 의견에 이렇게 즉각 반응하는 교과부에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이 정말 타당하고 필요한 표현이라면 공개적으로 제기하고 토론해서 반영시키면 될 일이다. 누가 제기했는지도 모르게 슬쩍 끼워 넣고 문제가 없다고 강변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처사에 불과하다. 더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사회 교과 교육과정에도 없는 이런 표현이 자칫 혼란과 이념 갈등을 부추기는 수단이 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인류공동의 가치로 자리 잡은 ‘민주주의’가 아닌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굳이 집어넣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학문적 이론이 존재하고 나라에 따라 그 의미도 다르게 쓰이는 이 용어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교과서 공격을 용이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 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교과서를 정치도구화하고 교육현장을 자칫 소모적인 이념 논쟁의 장으로 비화시킬 위험성이 높아졌다.
4. 역사교육을 약화·황폐화시킬 교육과정 연례행사가 되어 버린 교육과정 개정으로 역사교육이 훼손되고 있다는 소식에 국민들의 분노가 커지자 정부는 2011년 2월 ‘역사 교육과정 개정 추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4월 22일 ‘고등학교 한국사의 필수과목화’를 핵심으로 하는 역사교육 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한국사는 이전부터 거의 모든 학교에서 배우고 있던 것으로, 이런 대책은 생색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2011년 개정 교육과정은 그 정도의 역사교육마저 황폐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초, 중, 고 교육과정을 각각 생활과 인물, 정치와 문화, 사회경제와 사상 및 대외관계를 중심으로 한다고 하지만, 통사라는 기본 틀은 그대로여서 ‘반복학습’이라는 비판을 자초할 것이고, 학생들의 흥미도 갈수록 낮아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고등학교 한국사 수업 시간이 크게 줄었기 때문에 20% 감축되었다는 교육과정마저 소화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다. 7차 교육과정에서 국사는 필수였고 1년 동안 주당 두 세 시간의 수업이 이루어졌다. 이에 더해 대부분의 학생들은 한국근현대사를 주당 서너 시간 씩 배웠다. 그러나 이제 한국사 관련 과목은 ‘한국사’ 한 과목밖에 없으며, 그 수업 시수는 주당 5시간을 한 학기만 배운다. 이 시간 동안 전근대와 근현대 통사를 모두 배워야 하는 것이다. 수업시간이 절대적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수준 높은 역사교육을 기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이다.
5. 졸속 교과서를 강요하는 교육과정 교육과정이 개정되면 그에 따라 교과서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보통 교육과정이 고시되면 이에 따른 교과서 개발 기간을 주기 위해 시간적 여유를 두고 순차적으로 이를 적용한다. 2007년 개정 교육과정의 경우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순차적으로 적용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2011년 개정 교육과정은 2013년부터 전면적으로 적용된다. 이를 위해서는 전 과목의 교과서가 2012년 8월까지 검정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려면 늦어도 2012년 2월까지는 검정 신청이 이루어져야 하니, 불과 6개월 만에 모든 교과서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역사과의 경우에는 법 규정에도 없는 ‘집필기준’이라는 것이 집필을 강제하고 있는데, 국편은 ‘집필기준’을 10월에 발표하겠다고 한다. 8월에 교육과정을 고시하고 10월에 집필기준을 발표한다. 그리고 다음 해 2월까지 교과서를 다 쓰고 만들어 내라는 소리이다. 집필 원고가 다 나온 후에 사진, 그림, 지도 등을 제작, 배치하는 편집 작업에 최소 2개월이 걸리니 실제 집필 기간은 4개월 정도가 되는 셈이다. 그것도 중간에 ‘집필기준’에 따른 수정을 거쳐야 한다. 이처럼 짧은 작업 기간에 질 높은 교과서를 기대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일반 출판물도 이렇게 졸속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하물며 전국의 초, 중, 고 학생들이 봐야 할 교과서를 이렇게 짧은 기간에 졸속으로 만들도록 강요하는 일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2011년 개정 교육과정 고시는 즉시 철회되어야 한다. 또다시 역사학, 역사교육계의 의견이 집결된 고언을 무시하고 2011년 교육과정을 그대로 시행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워 나갈 수밖에 없다. 역사교육의 정상화를 바라는 역사학자, 역사교육자, 역사 교과서 집필자들이 힘을 모을 것이다. 2011년 교육과정으로 인해 역사과와 마찬가지로 졸속 교과서 집필을 강요받고 있는 다른 교과 관계자는 물론이고, 학부모 시민들과도 함께 할 것이다. 정부와 교과부는 지금이라도 비민주적 교육과정 고시의 잘못을 깨닫고 2011년 교육과정 고시를 철회해야 한다. 집중이수제 등 그 폐해가 이미 심각한 현행 교육과정도 하루 빨리 바로잡을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이제라도 ‘백년대계’를 세우기 위해 학계, 교육계의 전문가들과 학부모, 시민들과 머리를 맞대야 할 것이다. 교육은 인류의 가치와 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밑바탕이다. 교과부의 변화를 진심으로 촉구한다.
2011년 8월 31일
한국사교과서집필자협의회, 역사교육연구회, 한국역사교육학회, 한국역사연구회, 민족문제연구소, 아시아평화와역사연구소, 역사교육연구소, 역사문제연구소, 역사학연구소, 전국역사교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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