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만든 사직단이 있습니다. 지금도 사직공원안에 존재하는 제단입니다. 국법으로 다스리는 국사범을 처형하기 위한 처형장소를 정할 때 그 기준이 엄격했습니다. 사직단을 중심으로 우측으로 벗어난 자리로서 물이 흘러야 처형장소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국가 안위를 위한 사직단 안에 피를 뿌려서는 안된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 순교성인들께서 참수 또는 교수형을 당하신 순교성지는 사직단 우측으로 빗겨나 있습니다. 서소문 사거리 성지가 그렇고 당고개와 절두산 또한 그 기준에 부합됩니다. 그러나 새남터 만큼은 그 기준에 부합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목측으로 견주어 보아도 광화문 위치와 거의 일직선에
가깝습니다. 그 이유는 원래 새남터 자리를 발굴하고 찾지 못하였거나, 이미 이 지역들이 경부선 철도건설과 도시화 건설로 심하게 훼손되었기에 생긴 현상일 수 있습니다. 지금 자리로부터 원효로4가 부근으로 500m 이상 옮겨가야 한다는 설과 용산철도 차량기지 안쪽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은 새남터에서 사육신들이 최초로 참수를 당했으며 그 후 참수가 시작된 것은 주문모신부님과 천주교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사직단을 기준으로 본다면 원효로4가 쪽 500m 방향이 맞는 것 같습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사직단을 기준으로 남쪽방향을 바라 보았을 때 사직단 우측에 일직선으로 자리를 잡은 순교터전은 서소문성지, 당고개, 새남터, 사육신 묘역이 있습니다. 새남터란 뜻은 풀과 나무가 많은 곳이라는 뜻입니다. 새는 풀이란 뜻으로서 억새에서 따온 말입니다. 억새와 나무가 많았던 강변 모래사장이 새남터이며 그 일대를 노들강변이라 불렀습니다. 노들이란 뜻은 노란빛이 가득한 들녁이란 뜻입니다. 억새빛이 가득했던 강변에는 버드나무가 많아 경기민요중 그 노래가 현재까지 구전되어 오고 있습니다. 근세기에 신불출에 의하여 작곡된 노들강변이란 노랫말은 애상과 흥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민요입니다. 새남터에서 울렸던 북소리 지금도 그 북소리의 맥은 한국천주교의 역사 흐름속에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한번 뿌려진 씨앗은 죽지 않고 싹을 튀우고 나무로 성장하는 것이 천주님의 원리이십니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 매어나 볼까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믿을 이로다.
흐르는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노들강변 백사장 모래마다 밟은 자죽
만고풍상 비바람에 몇 번이나 지워 갔나
에헤요 백사장도 못 믿을 이로다.
흐르는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노들강변 푸른 물 네가 무슨 망령으로
재자가인 아까운 몸 몇몇이나 데려갔나
에헤요 네가 진정 마음을 돌려서
이 세상 쌓인 한이나 두둥 싣고서 가거라
국사범이 처형되던 곳 새남터 1801년 5월31일 신유박해 때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군문효수형을 당하십니다. 이어서 1839년 기해박해 때 제2대 교구장 앵베르( 북경교구로부터 조선교구로 독립 후 임명된 첫 조선교고주교께서는 만주에서 돌아가십니다. 조선교구 설립 100주년 때 용산성당내 성직자묘역에 안장되셨습니다), 모방신부, 샤스탕신부께서 순교하셨으며 1846년 병오박해 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현석문 카롤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제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푸르티에 신부, 정의배 마르코, 우세영 일렉시오, 순교자가 군문효수로 순교하신 성지가 바로 새남터 성지입니다. 2006년 9월 3일 순교자 기념관을 만들어 개관하였습니다. 기념관 내부에는 다음과 같은 시설이 있습니다.
1) 한국천주교회의 창설과 4대박해역사 2) 103위 순교성인화, 3) 천주교회의 시복과 시성역사 4) 교우촌과 장터, 순교지 모형, 5)
형구와 형틀, 6) 순교의 열매, 7) 영상실, 8) 서인 유해실 9) 기획전시 최양업신부 일생, 10) 상복을 입은 선교사 모습 11) 순교자 14인 동판화
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맞이한 사제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장렬하게 순교한 후 조선 교회는 또다시 목자 없는 양 떼 신세가 됐다. 그 후, 30년 만인 1831년 조선 교구는 중국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해 명실 공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와 함께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모방,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한다. 이들 성직자들은 외인과 포졸들의 눈을 피해 상복 차림으로 변장하고 먹을 것도 여의치 못한 채 험한 산길을 걸어다니며 전국 각지의 신자들을 찾아 다녔다. 제한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 전파에 힘쓴 결과 이들은 입국한 후 불과 1년 만에 신자가 9천여 명으로 늘어나는 성과를 얻는다. 방인 사제 양성을 의해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는 한편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했던 것이 모두 이 때의 일이다. 앵베르 주교는 지방을 돌아다니던 중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이 알려져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자 수원에서 가까운 어느 교우집에 몸을 숨겼고, 여기서 그는 다른 두 신부에게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당부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하고 임지로 돌려보낸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로 인해 이들의 거처가 알려지고 포졸들이 들이닥친다
앵베르 주교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잡힌 몸이 되는 동시에 동료 신부들에게도 스스로 자수해 순교할 것을 권했다. 이리하여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된다. 이들이 곤장을 맞고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형장으로 끌려오는 모습은 참으로 참담한 대목을 이룬다. 희광이들은 이들의 옷을 벗기고 겨드랑이 밑에 몽둥이를 끼워 처형 장소에 이르러서는 머리채를 모두 기둥에 매고 나서 목을 쳤다. 이 때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하우현 성당과 청계산 둔토리 동굴과 관련된 신부님이십니다.
서양사제들께서 전교를 위하여 한글과 한국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그 강습소가 바로 손골이었습니다. 조선에 처음 귀국하신 사제께서는 손골을 찾아 말을 익히고 글을 배운 후 경기도 남부, 충남일대를 다니시며 전교에 전념하십니다. 도리신부님께서는 손골에 머므시며 전교에 애를 쓰시다 약관 24세의 나이로 순교를 하십니다. 11월에 다녀 온 손골성지, 도리신부님과 깊은 연관성이 있는 성지입니다.
사흘 동안 한강변 모래톱에 버려져 있던 이들의 유해는 감시의 눈이 소홀해진 틈을 탄 몇몇 교우들에 의해 스무 날 가량이 지나서야 겨우 수습되기에 이른다. 세 성직자의 유해를 거둔 교우들은 시체를 큰 궤에 넣어 노고산에 일단 암매장한다. 그리고 4년 후, 당시 유해를 훔쳐 낸 교우들 중 하나인 박 바오로는 자신의 선산인 삼성산(三聖山)에 세 분 성직자의 시체를 다시 안장한다.
선약이 되어 있는 왜고개 성지. 군종교구내 중앙성당에서 미사참례가 있어 서둘러야 했다. 다시 한강변으로 나갔다. 노들섬으로 나가는 한강대교에 설치된 엘비베이터를 이용한 후 용산역 대로를 걸어 왜고개로 걸어 나갔다.
왜고개 성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1839년 기해박해 때 군문 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고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 그리고 188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 성 최형 베드로 그리고 홍봉주 토마스 등이 얼마간 암매장됐던 곳이다. 현재 국군 중앙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한자로는 와고개(瓦署峴)로 알려져 있다. 원래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내던 와고개 또는 왜고개에서는 서울 명동 성당과 중림동 성당을 지을 때 사용했던 벽돌도 공급해 주었다고 전해지는 곳입니다. 또한 이곳은
박순집이 부친의 뜻에 따라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직자 및 다른 치명자의 시신을 바로 이곳, 왜고개에 안장한다. 시복을 앞둔 1924년에 무덤이 다시 발굴 되어 이들의 유해는 대부분 로마와 파리외방 전교회 등으로 분배되고 명동 성당에는 현재 그 일부만이 모셔져 있습니다.
군종교구 국군중앙주교좌본당인 이곳을 2008.4 성전 내부 보수공사를 마무리 했다. 1981년 건립해 낡고 어둡던 성당 내부는 따뜻하고 밝은 분위기로 바뀌었다. 성당 안에는 이곳에 묻혔던 성인과 순교자들이 하늘로 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유리화가 눈에 띈다. 햇빛이 비추는 방향에 따라 유리화 속 성인과 순교자가 차례로 밝아진다. 오전에는 최형(베드로, 1814~1866) 성인과 순교자 푸르티에(요한, 1830~1866) 신부 등이 빛을 내기 시작해 해질 무렵에는 성 김대건 신부와 성 베르뇌 주교가 밝게 빛난다. 국군중앙성당과 군종교구청이 있는 이곳은 서울의 성지 중에서도 비교적 덜 알려진 왜고개 성지로,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안드레아, 1822~1846) 신부 시신이 임시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또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네(시메온, 1814~1866) 주교와 남종삼(요한, 1817~1866), 우세영(알렉시오, 1845~1866), 프티니콜라(미카엘, 1828~1866) 신부 등 성인과 순교자 10명이 묻혔던 장소다. 성당 제대 중앙에는 흰색과 푸른빛의 유리화 네 점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푸른색은 하늘을 뜻하고, 열 개의 붉은 유리조각은 10명의 성인ㆍ순교자를 상징한다. 성당 천장은 팔각형 돔으로 돼 있는데 이곳에 묻혔던 8명의 성인 수와 우연히 일치한다.
재속프란치스코회 서울지구 야고바형제회 초대 영보이셨던 유수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군종 주교님을 뵙기위하여 방문한 후 미사참례를 계획하였으나 마침 중앙성당에서 유아세례가 있어 주교님 계신 주교관 소성당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하였습니다.
주교님 따라 이동하는 야고바트레커들....
주교님의 인사 말슴을 들은 후 주교님과 함께 묵주기도를 드렸습니다.
야고바형제회 의료구역 봉사자들이십니다.
주교님께서 야고바 트레커들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묵주와 2013년 주교님 작은 수첩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언제나 인자하신 주교님의 마음은 늘 평온하십니다. 재속프란치스코 양성기 시절을 끝낸 후 종신서약을 받을 때 주교님께서 이끌어 주셔서 개인적으로 깊은 감회를 느끼게 됩니다.
제1독서와 제2독서는 양재구역 구역장님과 자매님께서 맡아 주셨습니다.
장영희 데레사 전례 평의원께서 ..
복음....
성탄 메세지를 주시고
현재 영보이신 조기영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도 도착하셔서 함께 미사를 집전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를....
성체를 모신 후 거룩한 마음으로 자신의 온갖 일들을 성심으로 모았습니다.
미사 후 주교관 1층 로비에서 주교님을 모시고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주교님께서 일정이 있으셔서 격식도 없이 단체사진촬영에 임해 주셨습니다. 저녁식사를 모시려고 하였으나 일정 때문에 .. 차후를 기약하며 인사를 드린 후 일정을 소화하시기 위하여 먼저 떠나셨습니다.
성모님 앞에서 기념촬영을.....
그리고 영보신부님을 모시고 야고바 트레킹 총결산을 하였습니다. 2012년 야고바트레킹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동안 함께해 주신
영보신부님과 야고바 트레커 그리고 솔선하여 동행해 주신 회장님 그리고 열성적으로 회를 이끌어 주시며 선물까지 준비해 주신 총무님께 감사드립니다. 새해에는 더욱 더 주님의 은총과 사랑으로 그리고 영원한 우리들의 사부 성프란치스코의 영성으로 평화의 나날을 보내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동행하여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새해에는 더우 더 알찬 기획으로 성지순례 트레킹을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