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조스님의 인불사상
<1>
마조(馬祖, 709∼788)스님은 불교역사에서 깨달음을 성취한 제자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분이다.
대주大珠화상이라는 스님이 마조스님을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니 마조스님이 물었다.
“그대는 어디서 오는가?”
“예, 월주 대운사라는 곳에서 왔습니다.”
“여기에 와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여기에 와서 불법을 구하고자 합니다.”
“자기 자신의 보물창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집을 버리고 쓸데없이 와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불법을 구하자는 것인가?”
대주스님이 드디어 예배를 올리고 물었다.
“무엇이 저의 집의 보물창고입니까?”
“지금 나에게 질문을 하는 그것이 곧 그대의 보물창고이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어서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그래서 쓰고 싶으면 마음대로 쓸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밖을 향해서 구하는가?”
대주화상이 그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본래의 마음을 스스로 알았다.
이 이야기는 선가禪家에서 대단히 많이 애송이 된다. 불교가 이 얼마나 간단명료한가? 이 얼마나 쉬운가?
그렇다. 불법은 이렇게 쉽고 간단명료하다. 복잡하고 어려우면 그것은 십중팔구 가짜 불교다.
“지금 나에게 질문하는 그것이 그대가 찾는 불법이며 그대의 보물창고라네. 그것 밖에 달리 없네.”
그렇다. 궁금하면 물을 줄 아는 그것이 곧 진짜 불법이다. 누가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말을 하면 들을 줄 알고,
추우면 추운 줄을 알고, 더우면 더운 줄을 알고, 웃을 줄도 알고, 울 줄도 아는 그것이 곧 불법이며 보물창고다.
그곳에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2>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에게 불법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황벽스님은 불문곡직하고 사정없이 60번이나 몽둥이를 후려갈겼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죽기 직전까지 불법을 얻어맞았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다가 엉뚱하게도 대우스님에게 가서 주먹질을
세 번 하여 불법을 토해내었다. 참 멋있고 근사한 불법놀이의 광경이다. 불교역사의 명장면 제1호다. 그리고 거기에서
“황벽스님의 불법이 참으로 간단하고 쉽구나.”라는 말이 등장한다. 진정한 불교는 이처럼 어디에 가도 쉽고 간단명료하다.
왜냐하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부처님이며, 자기 자신이 불교며,
자기 자신이 도며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간단히 표현하면 “당신은 부처님”이다. 이와 같은 견해가 바른 견해다.
이와 다른 견해는 사견邪見이다.
멀쩡한 사람을 죄업이 지중한 중생이라고 보거나, 어느 누구의 종이라고 보아서 지극히 고귀한 부처님이며 하나님인 사람을
돈으로 사고팔던 사조가 동양에 유입되어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오염시키고 있다. 그래서 재산을 위하여, 또는 돈을 위하여 자신을 죽이고 남을 죽이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것이 1회로 끝나면 다행이겠으나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어서 깊이
염려된다. 잘못된 견해의 폐해는 저 핵폭탄보다도 무섭다. 핵폭탄은 1회로 끝나지만 삿된 견해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 오염도가 더욱 확산되고 심각하기 때문이다.
<3>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든 사람의 하루의 삶의 가치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우리들은 무감각하게 아무런 고마움도 모르고 이렇게 마음놓고 잘살고 있지만, 오늘 이 순간을 살기 위해서 그토록 간절한 기도를 드렸지만 끝내 오늘을 살지 못하고 어제, 그리고 그저께, 그끄저께에 돌아가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을 살기 위해서 많은 돈을 들이고, 또한 인공호흡기를 사용해가며 가족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무진 애를 썼으나 모두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어떤 대가라도 치를 테니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그와 같은 광경을 생각한다면 오늘 이 순간의 삶의 가치는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지극히 소중한 순간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리라.
어떤 사형수가 쓴 글이 있다. 사형집행 날짜를 며칠 앞둔 그는 문득 감방 안에 기어다니는 작은 벌레를 보고 부러워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이 몸이 애석하구나. 차라리 저 벌레가 되더라도 목숨을 부지하며 살고 싶구나.”라고 하였다. 그는 또 이런 글도 남겼다. “애정에 굶주린 사형수여라. 과자를 땅에 놓고 개미를 기다리네.” “세상에 보탬이 되고 죽고 싶은 사형수의 이 눈을 얻으려는 사람도 없는가?”라고 하였다. 사형수의 눈이니 어떤 맹인인들 가져가려 하겠는가? 벌레가 되어서라도 살고 싶다는 말이 너무나 절절하다.
또 교통사고를 당하여 처참한 모습으로 변한 아들을 보고 “팔과 다리를 다 자르더라도 내 아들의 목숨만은 살려내라.”라고
울부짖으며 애원하고 또 애원하는 광경은 얼마든지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명을 무슨 방법으로 살릴 수 있으랴?
수백억을 들인다고 살릴 수 있겠는가?
사람의 하루의 삶의 가치는 수백억보다도 더 값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자신을 죽이고 남을 죽이는가?
모두가 삿된 견해의 소산이다. 사람의 지고한 가치, 즉 부처님이며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전도된 견해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부처님”이라는 운동을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힘껏 펼쳐야 한다.
“당신은 부처님”이라는 염불을 통해서, 깊은 사유와 명상을 통해서 힘껏 펼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