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연경(숭실대학교)
1. 들어가는 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는 말로 시작하는 마태복음 5:13은 “세상의 빛”에 관한 14~16절의 말씀과 더불어 신약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구절 중 하나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교회의 강단에서 이 구절을 두고 무수한 설교들이 행해져 왔고, 교회 공동체 혹은 일상적 삶의 문맥에서도 이 구절은 기독교인들의 책임을 일깨우고 격려하는 가장 익숙한 표어로 활용되고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 물으면, 많은 이들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 말로 대답한다. 이처럼 “세상의 소금” 및 “세상의 빛”이라는 이미지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의 하나가 되었다.
당연히 대부분 신자는 이 말씀에 익숙하다. 하지만 익숙함이 언제나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익숙함이란 구체적이고 철저한 지식을 소유한 결과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표면적 접촉의 반복에 의한 착시 현상일 수도 있다. 익숙함이 반드시 정확한 이해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세상의 소금”이나 “세상의 빛”처럼, 어떤 가르침이 본문의 일차적 문맥을 초월하는 전방위적 표어로 차출될 경우, 본래의 정황 속에서 그 표현이 지녔던 의미를 상실하고 주관적 관심의 조류를 따라 표류할 위험이 크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나 “세상의 빛”을 말하며 생각하는 의미가 애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그 말씀을 선포할 때, 혹은 마태복음(산상수훈)의 문맥에서 그 말씀이 제시될 때 드러나는 의미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소금이나 빛과 같은 일상적 이미지를 우리 나름으로 사용하는 것이 나쁠 이유는 없다. 문제는 그것을 구체적 성경 본문의 본래 의미로 착각하고서, 소금과 빛에 관한 예수의 말씀조차 우리 방식대로 읽어버린다는 사실에 있다. 실제로 마태복음의 문맥 속에서 소금과 빛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이런 염려가 단순한 기우가 아님을 알게 된다.
본 고의 목적은 이 익숙한 이미지 중 “소금”에 관한 13절의 가르침을 다시금 들여다봄으로써, 통상적 용법에 의해 가려진 본래의 의미를 분명히 하려는 것이다. 본문의 일차적 의미를 넘는 창조적 방식으로 “소금과 빛” 이미지를 활용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성경에 근거를 둔 기독교적 가치 혹은 신적 권위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회를 위한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소금과 빛”을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불가불 마태복음의 문맥 속에서 예수가 전달하고자 했던 일차적 의도를 존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 제시된 논지는 필자가 더욱 대중적 문맥에서 상세한 주석적 논증 없이 자주 언급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는 학문적 논쟁에 대한 나름의 기여라기보다는 교회적 상황에서 이해되고 활용되는 의미에 대한 주석적 재고를 의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5:13의 소금 이미지 자체의 활용 방식에 국한된다. 더욱 충실한 논의를 위해서는 13절 전반에 관한 심도 있는 논의 및 주변 문맥과의 관련 또한 다루어야 하겠지만, 이는 하나의 논문 이상의 논증을 요구하는 일이 될 것이다. 논문의 말미에 보다 넓은 문맥 속에서 13절의 의미를 간략히 다루겠지만, 이 역시 본 절의 핵심 의미로 제시된 심판이라는 주제와 관련된 것으로 논의를 제한할 것이다.
2. 통상적 해석의 문제점
가. 두 개의 상반된 메시지?
소금에 관한 13절의 말씀을 “소금이 되라”라는 명령 혹은 “소금이 되자”라는 권고로 읽는 통상적 해석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런 읽기 속에 드러나는 심각한 불균형이다.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라는 본문의 일부만을 취하고 뒤따르는 긴 설명은 사실상 무시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소금이 되자”라는 의미는 “소금이다”라는 말씀을 나름으로 해석한 것이며, 그 자체로 보면 별 무리 없는 해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본문의 전부가 아니다. 실제 13절을 보면,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라는 문장보다는 그 뒤 이어지는 설명이 훨씬 더 많은 지면을 차지한다. 헬라어로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는 6단어이며 13절 나머지는 20단어다. 단어의 수가 전부는 아니지만, 원칙적으로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 이야기일수록 중요한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별 의미가 없는 사실을 말하자고 아까운 지면을 낭비하면서 핵심을 흐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금이 되자”라는 통상적 해석은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라는 짧은 진술 뒤에 이어지는 더욱 긴 설명을 사실상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소금이 맛을 잃고 다시 회복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나 결국 버려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부정적 경고는 “소금이 되자”라는 긍정적 권고와 논리적으로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그 권고에 꼭 필요한 부분도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도 대부분 독자는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라는 긍정적 진술에만 주의를 집중할 뿐, 소금이 한 번 맛을 잃으면 회복할 수 없어 버림을 당한다는 13절 후반부의 경고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대부분 설교자도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라는 구절에만 치중한 채, 이어지는 긴 경고는 그 존재 이유를 알기 어려운,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좋았을 법한” 구절 정도로 치부한다. 가령,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라는 설교(2000년 6월 4일)에서 옥한흠 목사는 실제로 그럴 자격이 별로 없는 그리스도인들을 “소금”과 “빛”이라 불러주신 과분한 은혜를 강조한 후,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면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도덕성, 복음 전도 및 자연보호 세 가지로 설명한다. 물론, 이 세 가지는 설교자 자신의 신념에서 나온 항목들이다. 그리고 설교 어느 부분에도 “버려짐”에 관한 13b절의 경고에 관한 언급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식의 설교가 전형적이라는 사실은 굳이 예증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본문을 “소금이 되자”라는 권유로 이해한 데서 생겨나는 불가피한 결과다. 일단 13절 앞부분을 “소금이 되라”라는 긍정적 명령으로 읽게 되면, 이를 “맛을 잃으면 회복이 불가능하며 그래서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라는 어두운 경고와 한 호흡으로 연결하는 것이 어렵기 문이다. 하지만 본문의 일부만 설명하고 나머지를 무시하는 편파적 읽기가 정확한 해석일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래서 우리는 “소금이 되라”라는 식의 명령법적 읽기가 예수의 의도를 정확하게 포착한 것인지 되묻게 된다. 심판에 대한 경고로서의 ‘소금’ (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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