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랑 참외의 의미
올해 봄 두 포기 심은 참외가 여름 내내 알전구같이 텃밭을 밝혀 주었다. 솜털 보송한 여린 초록에서 샛노랗게 변해가며 알이 굵어지는 참외는 전등을 켜는 듯 나의 몸과 마음에 에너지를 주었다. 한더위에 바로 딴 참외는 더할 수 없이 아삭하고 달큰하다. 수분 가득한 참외 한 알이면 텃밭에서 오는 노동의 고단함을 속까지 시원하게 달랠 수 있었다. 이제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넝쿨을 거두려고 보니 잎사귀 뒤로 또 여린 열매를 맺고 있다. 아무것도 해준 것도 없이, 심지어 눈길조차 주지 않아도 여기저기 빼꼼히 노란 낯빛을 내어주는 참외가 참으로 고맙고 정겹다. 아주 아주 오래전 나의 친구처럼.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거리지만, 초등 6학년 때 나에게도 친구가 있었을 게다. 제법 먼 거리 등굣길을 종알거리며 다니고, 느닷없이 송충이 뚝 떨어지는 소나무 밑에서 옴마야! 하고 비명 지르며 함께 공기놀이 했던 나의 친구들 말이다. 이제는 모두 잊힌 얼굴이 되었지만, 빛바랜 기억 속에 유독 한 친구의 형상만이 마음의 빚처럼 남아있다.
쌍둥이였던 그 애 이름은 쌍연이었다. 반 친구들은 그 애의 이름과 비슷한 말로 욕을 하며 놀렸다. 지저분하고 냄새난다며 같이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 시절 나는 내 앞자리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애를 좀 챙겨준 것 같다. 수업 시간에 자주 혼나는 것이 딱해서 산수 문제를 가르쳐 주고, 준비물을 빌려주기도 한 것 같다. 늘 혼자 밥 먹는 모습이 안쓰러워 가끔은 도시락도 같이 먹었지만, 선심을 베풀었을 뿐 마음을 터놓고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
요즘 같으면 반 애들이 모두 싫어하는 왕따 같은 그 애를 구태여 내가 친구로 사귀고 싶지는 않았다. 두어 달이 지나자 애들에게 향하던 그 애의 날 선 눈빛이 나한테는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여름 방학이 다가오던 날, 내 책상 서랍에 주먹만 한 조랑 참외 한 알이 들어있었다. 과일 한 조각도 귀하던 시절, 달콤한 참외 한 알이 생기니 큰 횡재를 한 기분이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가방에 꼭꼭 숨겨 두었다가, 집에 와서 꿀처럼 달다리하게 한 입 한 입 깨물며 누군가 실수로 내 서랍에 둔 것으로 생각했다.
참외는 이튿날도, 그다음 날도 서랍에 꼭 한 알씩 들어있었고, 쌍연이네가 참외 농사를 짓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쌍연이한테는 끝내 모르는 척했지만, 나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 방학이 되기 전까지 그 애한테 마음에도 없는 친절을 베풀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그 애가 어디 사는지 중학교는 어디로 갔는지 아무것도 기억에 없는 것을 보면 참외만 얻어먹고 그 애와의 관계도 끝이 났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참 철없던 시절이었다. 참외의 단맛에 취해 쌍연이가 전하려던 참외의 의미를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때 일찍 등교해서 몰래 참외 한 알을 서랍에 넣어 두던 쌍연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소심하고 수줍어서 차마 말로는 하지 못한 친구가 되어 달라는 고백을 참외로 대신했으리라.
학교에서 놀림을 받으며, 아이들 곁을 맴돌던 그 애는 항상 외롭고 심심했을 것이다. 내 허울뿐인 관심이 고마워 조랑 참외같이 여린 마음을 열었는데, 부끄럽게 나는 끝까지 모른 체했나 보다.
친구가 세상의 전부 같았던 사춘기 시절을 보내며, 나는 참 많은 조랑 참외를 친구들에게 먼저 내밀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대부분 철없던 시절의 나처럼 단맛만 훔쳐 가고 노오랗고 따뜻한 내 마음의 빛은 몰라주었다. 그런 친구들이 야속해서 혼자 속앓이할 때면 아른아른 쌍연이가 생각나기도 했다. 매일 아침 나한테 마음을 전했지만, 끝내 친구가 되어주지 못하고 한 뭉텅이 상처만 준 그 시절의 기억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내 마음을 치고 갔다.
이십 년 전, 달랑 이민 가방 세 개와 아이들 둘을 데리고 낯선 외국 땅 뉴질랜드에 갔었다. 입시 경쟁으로 학원에 발목 잡혀 있는 아이들을 푸른 잔디에서 뛰놀게 해주고 싶다는 이유였다. 목적은 거룩했지만, 현실은 비참했다. 우리는 철저히 낯선 이방인으로 고립된 섬에 던져진 양 백인들한테 무시 받으며 생활했다. 그때 문득, 조랑 참외를 내밀며 마음을 전하려 애썼던 쌍연이 얼굴이 떠올랐다. 나와 애들은 쌍연이처럼 수줍게 마음을 열었지만, 그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바라볼 뿐,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지 않았다.
그들한테 외면당하고 소태같이 쓴맛이 입과 마음을 적시면 향수병처럼 달달한 조랑 참외가 더욱 생각났다. 하지만, 체리가 주렁주렁 열리고 키위가 탐스럽게 열리는 축복받은 그 땅에 아이러니하게도 참외는 없었다. 단내에 코를 박고 참외를 아작아작 먹지 못해 결국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내 쌉쌀한 속병은 낫지 않았다.
텃밭을 시작하며 제일 먼저 심은 모종이 참외였다. 하루가 다르게 뻗어가는 넝쿨과 조랑조랑 달리는 참외에 연신 눈 맞춤을 했다. 제법 굵은 씨알이 열렸지만, 작고 샛노란 참외에 먼저 손이 갔다. 어릴 적 추억 때문인지 나는 백화점에서 파는 크고 때깔 좋은 참외보다 바람만 스쳐도 단대가 훅 타들어오는 조랑 참외를 좋아한다.
방금 딴 주먹만 한 참외를 껍질째 한입 깨물어 본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서운하고 씁쓸했던 마음을 위로받으며, 또 한때 상처 주었던 친구의 마음도 더듬어 위로하며 볼이 미어지게 단맛을 느껴본다. 서랍 속 조랑 참외를 넣어 두던 나의 친구를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