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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라델피아 시대의 용사들을 보라 >
1. 들어가는 말
1) 필라델피아 교회에 대한 말씀은 계 3:7-13 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필라델피아” 는 “형제의 사랑” 을 뜻하는 두 헬라어 낱말에서 유래한다. 이것은 1500년에서 1900년까지의 교회 기간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이 시기는 (교회에 관한 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간인데 그 이유는 이 교회가 참된 그리스도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일곱 교회 중에서 유일하게 회개하라는 말을 듣지 않는다! 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셨던 길을 가는 교회였다. 이 교회는 세상이 그 시대까지 이어온 이래로 산업혁명과 농업혁명, 과학혁명 등 주요 진보적인 발전을 가져 온다.
3:9 보라,『자칭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아니요, 오히려 거짓말하는 자들을 내가 사탄의 회당에 속한 자들로 만들리니, 보라, 내가 그들을 오게 하여 너의 발 앞에 경배하게 하여서,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알게 하리라.』
A.D. 200-325년 사이 스머나 기간에 이와 같이 거짓말하는 자들의 무리를 보았다(계 2:9). 스머나에 있었던 이런 자들은 자기들이 진실한 유대인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실제의 유대인들과 완전히 단절하였다고 주장했으며, 자기들이 이스라엘의 참 계승자라 하였고 후천년 교리를 가르쳤다. 이 “작자들” 이 종교개혁 기간인 계시록 3:9에 갑자기 다시 나타난다. 이들은 실제로는 로마인들이면서 유대인들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기껏해야 이스라엘을 도둑질했으면서 자기들이 이스라엘을 대신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사도들의 활동 이후로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켜 온 후천년주의 강도들과 같은 도당이다.
1500-1900년 기간에 바티칸은 “지하” 로 들어가서 1930년 이후에 다시 등장한다. 이때는 하나님께서 계 3:9과 계 17:1-9 에서 말씀하신 가증한 어미와 똑같아진다. 이 로마 교회는 “지옥의 문”과 동맹 관계에 있다.
이 기간에(1500-1900) 프로테스탄트의 성경적 기독교 신앙은 급속하고 완전하게 퍼져나가서 1900년경에는 순간적으로 교황들이 모두 끝장난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교황들은 다른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개정위원회라는 밀폐된 문으로 들어가 <표준원문>을 웨스트코트와 홀트의 로마 카톨릭 원문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2) "시험의 때"(대환란)로부터 지켜 질 것이다. 이 시험은 온 세계에 닥칠 환란을 말한다. 필라델피아 교회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일곱교회중 유일하게 살아남는 교회이다. 스머나 기간에 닥쳤던 10번의 시험에 비하면 시험이라고 할만한 어떤 시험도 받지 않았던 교회이다. "시험의 때"란 미래에 있을 "대환란"(Great Tribulation)을 의미한다는 점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것은 주님이 그분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오시기 전에 있을 것이다. 필라델피아 교회는 이 환란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란 약속이 분명히 주어져 있다. 이 말씀은 교회가 환란을 통과하기 전에 들림받을 것이란 또 하나의 분명한 증거가 되지 않는가?
3) 이 기간에 남북 전쟁과 미국 독립 전쟁 그리고 1812년 전쟁이 있었다. 이 기간에 모든 위대한 발명과 모든 위대한 발견이 있었다.
또한 이 기간에 무신론, 공산주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학문의 여파가 유사 이래로 매우 압도적으로 몰아친다. 스피노자, 라이프니쯔, 데카르트, 헤겔, 루소, 아스트룩 (Astruc), 칸트, 에왈드 (Ewald), 델리취 (Delitzsch), 벨하우젠 (Wellhausen), 세믈러 (Semmler), 노이만(Neuman), 슐라이마허 (Schleirmacher), 예수회 (the Jesuits), 레싱 (Lessing), 트레겔러스(Tregelles), 티셴돌프 (Tishendorf), 프로이드, 헉슬리, 바우어 (Bauer), 막스, 다윈, 스트라우스(Strauss), 제임스 (James) 그리고 이들 모두를 거느린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인 다윈은 자기 꼬리를 잘라버림으로써 하나님을 등진 원숭이가 되었으며,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섹스 신경증 환자로서 꿈들에 관한 책들을 쓴다.
마틴 루터, 스토치 (Storch), 스투브너 (Stubner), 문쩨 (Munzer), 스타우피츠 (Staupitz), 멜랑크톤 (Melancthon), 허브마이어 (Hubmaier), 피터 뵐러 (Peter Boehler), 스페너 (Spener), 진젠돌프(Zinzendorf)는 카톨릭과 단절하고(1500-1600) 하나님을 위해 국토를 뿌리째 흔들었다. 그러나 이들이 “죽고 사라지자 마자”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성경을 공박하는 인문주의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말살하는 데 헌신했던 로첸부쉬 (Rauschenbusch), 스트라우스, 아스트룩, 벨하우젠, 라이프니쯔 등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마틴 루터는 독일 광부의 아들로 1483년에 태어났다. 그는 독일의 한 작은 마을에서 자랐으며 광부였다. 소년 시절에 그는 거리에서 성가를 불렀고 후에 수도승이 되었다. 그는 에르푸르트 (Erfurt) 대학에 법률을 공부하러 갔다가 그곳의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갔다. 루터가 로마에 갔을 때 그는 거기서 난잡한 일들을 본다. 1512년에 그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스타우피츠를 이어 신학 교수가 되며 1546년까지 이 자리에 있게 된다. 그는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여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그 (Wittenberg) 교회 문에 그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을 못박는다.
이 반박문을 인쇄한 사본들이 유럽 전역으로 퍼졌으며 심지어는 루터 자신이 반박문 사본을 로마에 보내기에 이른다. 뒤이어서 그는 보름스(Worms) 의회(1512)의 신부들, 교황들, 주교들로 구성된 범죄단 앞에서 힐문 당하고 여기서 그는 성경을 거부하는 전 로마 카톨릭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양심에 거리끼는 행위를 하는 것은 안전한 것도 정직한 것도 아니기에 나는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시여 저를 도우소서, 여기 제가 서 있나이다!”라고 했다.
2. 전개되는 말
필라델피아 시대의 용사들에 대하여 살펴보자!
1. 교회사에 있어 필라델피아 시대(계3:7,8)는 1600-1900년 사이의 기간에
해당되며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린 시대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한 그대로 지켜온(계3:8) 이 시대의 교회들은 카톨릭 교회의 부패한 교리 대신 성경적 진리를 들고 전세계를 누볐다. 이 시대에는 마틴 루터와 <킹 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사용한 종교개혁 원문들이 세계를 휩쓸었다. 이 원문에서 1900년 이전까지 무려 800여 개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이 번역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손길이 아닐 수 없다.
이 성경들과 번역본들이 끼친 경제적, 사회적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교육받은 계층”들 (주로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어떤 “왕국”이 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착각했다. 즉 그들이 꿈꾸고 있던 “모든 인간이 자유와 연합 하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완전한 평화의 시대, 즉 황금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얼마 후 찰스 다윈이 그 “왕국”이 어떻게 도래될 것인가를 그의 이론으로 제시하자 (다윈은 자연발생에 따른 유기적 진화론을 내세웠다.) 이들 학자 그룹들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그 이론을 따라가고 말았다.
2. 구원받지 못한 철학자들, 과학자들과 더불어 수많은 정통 보수주의자들과 복
음주의 설교자들이 이 이론에 휩쓸렸다.
1) 그들은 “교육받은 지성인” 계층으로 분류받고 싶었던 것이다.
이들 배교한 “지성인”들은 복음으로 인해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두고 천년왕국이 도래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들이 내세운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교도들이 옷을 입게 되었고 읽고 쓰기를 배우게 되었다. 둘째, 교통기관과 통신수단이 발달하고 전기 등이 발명되어 세계는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셋째, 바하, 베토벤, 로시니, 브라암스, 와그너 등으로 음악의 위대한 발전을 이룩했다.
넷째,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게 되었다. 이로써 진리는 전세계를 향해 전진해가고 있는 것이다. 온 인류는 이제 배교와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다루고 있는 성경 교리들을 “진보”의 관점과 지상에 세워질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한다는 “긍정적” 관점에서 해석해야만 될 것이다(이들은 이사야 63장, 요한계시록 14:20 및 19: 15을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왜곡해서 해석한다).
바로 이것이 사탄이 19세기 중엽(1850-1890)에 살던 긍정적 사고주의자들에게 제시한 “복음”이었다. 이와 같은 배경 하에서 드디어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는 라오디케아 교회시대가 지구상에 출현하게 된다. 그리스도 없는 공산주의, 강제수용소에서의 “평등한 권리”, 거룩함이 없는 시민권, 책임을 배제한 “가치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독교 학자들의 “의견”을 최종권위로 삼으려 하는 배교한 근본주의자들이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마지막 교회시대를 수놓고 만 것이다.
2) 이제부터 우리는 성령님께서 1700년으로부터 1850년 사이에 자신의 책(성
경)을 가지고 어떤 사역을 수행하셨는지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신약 교회의 역사이지 창녀 교회의 발전사도 아니고 “인간의 발전사”도 아님을 잊지 말자(학자들은 인간이 경제적, 기술적으로 발전해 가면서 동시에 영적, 정신적으로도 발전해 간다는 후천년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며 교회사 역시 같은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이성의 시대”, “계몽시대”를 거쳐 등장한 것은 “원자시대”로, 학자들이 “폭력의 세기”라고 부르는 20세기이다. 이성과 계몽과 종교로도 인간의 죄성을 통제할 수 없었음을 스스로 입증한 결과이다
18세기와 19세기는 인류 역사상 성경을 믿는 가장 위대한 증인들을 배출해 낸 시기였다. 이들의 삶과 사역을 다 다루자면 책 몇 권을 따로 써야할 정도이다. 이들 주님의 군사들은 실로 역전의 노장들이었다. 그들은 산, 평원, 사막, 바다를 누비면서 “전쟁”을 벌였고 순교자의 무덤에 몸을 내던졌다. 그들은 피스가, 헤브론, 갈보리, 헤르몬 그리고 모리아 산에 서서 그 어떤 교황, 황제, 왕, 대통령도 듣고 보지 못한 것들을 듣고 보았다.
그들의 생은 한 마디로 그들이 풀어준 쇠사슬, 그들이 해방시킨 영혼들, 그들이 먹인 배고픈 자들, 그들이 변화시킨 이교도들로 설명될 수 있다. 그들은 생활의 모든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냈고 느꼈으며, 그들의 인생 여정은 교회에서 보낸 시간들과 제단에서 외친 찬양 소리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며 흘린 눈물로 엮어져 있었다. 그들은 오직 한 가지 책만을 믿었고, 그 책을 설교했으며, 그 책을 암송했고, 그 책을 가르쳤다. 그들이 그 책을 외국어로 번역할 때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패한 알렉산드리아 필사본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3) 이들 용사들 중 몇은 다음과 같다.
토마스 웹(1724-1796), 사무엘 시버리(1729-1796), 크리스챤 슈바르츠(1726 -1798), 윌리암 카우퍼(1731-1800), 존 뉴톤(1725-1807), 토마스 랑컨(1738-1810), 헨리 마틴(1781-1812), 앤드류 풀러(1754-1815), 프란시스 애스버리(1745-1816), 티모시 드와이트(1752-1817), 플리니 피스크(1793- 1825), 에드워드 페이슨(1783-1827), 로버트 홀(1764-1831), 죠지 다나 보드맨(1801-1831), 아담 클라크(1762- 1832), 롤랑 힐(1744-1833), 윌리암 케리(1761-1834), 로렌조 다우(1777- 1834), 로버트 모리슨(1782-1834), 루터 라이스(1783-1836), 조슈아 마쉬맨(1768-1837), 사무엘 마즈덴(1764- 1838), 크리스마스 에반스(1766-1838), 로버트 홀데인(1764-1842), 로버트 멕케인(1813-1834), 아도니람 져드슨(1788-1850), 그리고 이외 수십 명이 더 있다.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침례교 선교회, 런던 선교회, 교회 선교회, 글래스고우 선교회, 스코틀랜드 선교회 등이 세워졌다. 1824년 이들 선교회들의 사역이 일으킨 커다란 파장으로 인해 로마 교황은 “성경공회”들이 전세계 모든 민족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교황의 우려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들 선교회들이 번역하고 있던 성경은 에라스무스의 <표준원문>에서 나온 것으로 이 원문은 그것이 출판된 이래 로마 카톨릭 교황과 사제들이 감히 추천하지 못한 유일한 헬라어 성경이기 때문이었다.
미국해외성경공회에서 성경을 변개시키려는 최초의 시도는 1837년 “교육받은 계층”들이 아도니람 져드슨의 버마어 성경에 마음이 상하게 되었을 때 일어났다. 이들 학자들은 권위역본 본문을 수정하려고 했다. 이 번역본은 두 차례나 선교지에서 아내를 잃었고, 쇠사슬로 묶여 철창에 갇혔으며, 수 개월간 열병으로 시달리기도 했고, 버마에 자녀들을 묻어야 했던 선교사가 번역한 그 성경이었다. 미국성경공회는 1836년 5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영역본(즉 1611년 권위역본)에 일치하는 번역본들만” 공인할 것이라고 선언했었다.
4) 이 선언은 1800년부터 “구령하는 근본주의자들”이 권위역본을 카톨릭 원문으로 대체하려는 수차에 걸친 시도들이 있어왔기 때문에 이를 막을 목적으로 선포된 것이었다.
철창에 갇힌 적도 없고 선교지에 친척 하나도 묻어본 적이 없는 성경공회 내의 교육받은 계층들은 <킹 제임스 권위역본>을 제거하려 했으나 그들의 기도는 부결당하고 말았다(1850년 5월). 그러나 이들 학자들은 그들의 후계자들(1901년 ASV위원회 위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키는 노력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교지에서 사용할 성경에 다른 영어본문을 침투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들의 후계자들 역시(1881, 웨스트코트와 홀트) 1881년 개정위원회에서 동일한 음모를 꾸몄다. 권위역본은 “원본에 충실하지 못하고” “헬라어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다른 성경을 써야 한다는 학자들이 득세하면서 교단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1611년 권위역본을 고수하던 사람들은 “본질적이 아닌” 문제들로 성경공회를 분열시키는 “지옥얘기만 하는 문제아들”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미국해외성경공회는 1883년 5월 사라토가에서 열린 총회에서 교단 싸움으로 인해 쪼개질 수밖에 없었다. 이 “분열”의 책임은 “용감한 선교사”들 편에 섰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복음의 용사들은 250년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성경을 믿고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인간들은 성령님마저도 “반동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계신다고 정죄하는 것이다.
5) 윌리암 케리 윌리암 케리(1761-1834)는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는 선교에 대한 비전을 <모라비안 선교소식, Periodical Account of Moravian Missions>이라는 책자에서 받았다. 그는 구두 수선공으로 일하면서 6개의 언어를 독학했고 인도를 향해 떠났다. 그는 그곳에서 42년 동안 44개의 언어와 방언으로 권위역본을 번역했다. 케리의 표어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들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들을 시도하라.”였다. 케리의 사역을 통해 화란 선교회(1797), 영국과 해외성경공회(1804), 해외선교를 위한 미국위원회(1810), 미국침례교 선교연맹(1814), 미국성경공회(1816) 등이 생겨났다.
미국과 영국의 성경공회에서 펴낸 모든 성경들은 1904년까지는 <킹 제임스 성경>의 <표준원문>에서 나온 번역본들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1904년 장자권을 포기하고(1611년판 권위역본 서문에는 에서의 경거망동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리겐과 콘스탄틴의 로마 카톨릭 교회의 아프리카 본문을 채택하고 말았다. 이로써 “필라델피아” 교회시대는 공식적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사무엘 밀즈 1806년 사무엘 밀즈는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제임스 리챠드, 프란시스 로빈즈, 하버루미스, 고돈 홀과 루터 라이스를 불러 모아 “건초더미그룹”을 만들었다. 이들은 건초더미를 쌓아놓은 곳에 모여 이교도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했다. 후일 아도니람 져드슨, 사무엘 니웰 그리고 사무엘 놋트 등이 이 그룹에 더해졌다.
1817년에 시작되어 1883년까지 계속된 이 기도모임의 여러 회원이 혜로키, 치카소, 쵹타우 및 다코타 인디안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져드슨과 니웰은 인도의 선교사가 되었고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다른 선교사들은 실론(1816), 중국(1830), 그리고 마두라(1834)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땅 끝까지” 갔다.
아도니람 져드슨 아도니람 져드슨(1788-1850)은 버마로 선교를 위해 떠났다. 그는 미국에서 출발할 때는 장로교인이었다가 버마의 수도 랭구운에 내릴 때는 침례교도가 되었다. 그는 남은 여생을 버마인들의 영혼을 위해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두 명의 아내와 딸을 묻어야 했고 자기 자신도 버마해안 근처의 바다에 수장되었다. <표준원문>을 번역하면서 지낸 져드슨의 감옥생활에 대한 기록은 기독교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 내용을 잘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그의 아내 앤의 고난은 모든 순종하는 아내의 본이라고 할 수 있다(엡5:22). 이 내용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잘 알아두어야 한다.
3. 미국의 순회 설교자들
1800-1859년 사이에는 비록 웨슬리의 시절과 같은 대부흥은 없었지만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지역에는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많은 증인들이 있었다. 또한 일단의 증인들이 테네시, 죠지아, 노스 케롤라이나, 사우스 캐롤라이나 그리고 켄터키를 통해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들 프론티어 순례자들은 미국의 대부흥운동에 뒤따라 이어진 복음운동의 선봉장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에 관해 살펴보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1) 에벤에셀 루기스는 일리노이, 오하이오, 미시간에서 복음을 전했고, 제임스 딜래니는 위스콘신에서, 애모리 게일은 미네소타에서 설교했다.
이들 초기의 순회설교자들은 믿음으로 살았으며 그 누구도 폭력에 의해 죽은 사람은 없다. 그들은 가죽 가방에 찬송가와 <킹 제임스 성경>을 넣고 말을 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고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순회 설교자들은 “영 안에서 뜨거워야” 할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강인해야 했다. 인디안들, 건달들, 주정뱅이들을 늘 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도모임보다 잭크 나이프에 더 친숙한 사람들을 회심시켜야만 했다. 말을 타고 돌아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아마 감리교 설교자였던 프랜시스 애스베리(1745-1816)가 처음으로 시도했을 것이다.
피터 카트라이트 가장 잘 알려진 미국 개척시대의 프론티어 설교자는 피터 카트라이트로 그는 키는 작아도 “통통한 체구”에 깔끔한 머리와 까맣게 반짝이는 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켄터키 주 로간 카운티 근처에서 자신의 설교에 대해 “사람들은 매번 킹 제임스 시대의 영어를 공격하지만 <킹 제임스 성경>에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다.”라고 했다고 한다(이 선언을 약 70년 후에 등장한 빌리 선데이의 선언과 비교해 보라.
“나의 언어에 불평을 하는 어떤 설교자가 내게 묻기를 ‘왜 당신은 나처럼 설교하지 않는 거요.’라고 하기에 나는 그에게 내가 그처럼 설교한다면 그보다 전혀 나을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
피터 카트라이트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들이 있으며 앤드류 잭슨 장군과 그의 만남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일화이다. 엘머타운즈라는 사람은 이때의 일화를 어느 정도 ‘완화’시켜 전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에 따르면 피터 카트라이트의 원래 발언은 “그 사람이 회개하지 않으면, 그 역시 깜둥이 도둑놈처럼 지옥으로 갈 것이다.”였다고 한다. 때로는 “교육받은 계층”들의 “세련된 감각”이 그들로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특히 그들이 역사적 사실들 대신 언론매체에다 그들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한은 더욱 그렇다.
한번은 피터 카트라이트가 감리교 감독들의 모임에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때 한 감독이 그를 조롱할 생각으로 헬라어로 말을 걸었다. 그러자 피터는 어렸을 때 배웠던 독일어로 대답을 했다. 그 감독은 독일어를 전혀 몰랐으므로 어떻게든 그 순간을 벗어나야만 했다. 결국 그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저 친구 헬라어 좀 아는데, 알고 있어!” 하고는 내빼고 말았다. 카트라이트는 그 외에도 죄인들을 넉다운 시킨 일화로 유명해졌다. 그는 양다리를 떡 펴고 서서 커다란 주먹을 쥐고서는 “이봐 형제, 주의 영께서 당신과 다투고 계시는데도 그것을 못 느끼는 거야?”라고 외쳐대곤 했다고 한다.
2) 제임스 맥그리디 미개척된 서부를 누비며 다니던 순회 설교자들과 매우 깊은 교제를 갖고 있던 제임스 맥그리디(1798)는 미국의 “캠프미팅”의 창시자로 큠버랜드 벨리 전지역을 휩쓴 부흥에(1806-1810) 불꽃을 당긴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죠지 가드윈이라는 사람은 (“교육받은 계층”과 그들의 “세련된 감각”에 맞추기 위해) 맥그리디를 “숲속의 침례교도”라고 불렀으며 그의 추종자들을 “무지한 열변가들”이라고 불렀다. 제임스 맥그리디의 설교로 300여 명이 거의 죽은 자들처럼 되어 하늘을 향해 자비를 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웨슬리와 카트라이트의 사역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1801년 20,000여 명의 개척자들이 최초의 “캠프미팅”에 참여했다. 바로 이 미팅이 미국의 부흥운동의 전례라고 볼 수 있다. 열광적인 분위기에서 열린 캠프미팅에는 존 맥기 목사와 로렌조 다우도 참석했다. 많은 사람들의 회심은 “열광”과 아울러 울부짖음과 “거룩한 웃음”으로 집회를 가득 채웠다. 죄인들은 기절하기도 했고 몇 시간 동안 그대로 누워있기도 했다.
“그들은 춤추고, 미친듯이 웃었고, 뛰어다녔고, 울부짖었고, 소리를 질러댔고, 뒹굴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교육받은 계층들이” 디스코텍이나 NBA 농구장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종종 목격된다.) “다른 사람들은 그루터기와 벤치로 달려가 ‘죄인들이여, 숲으로 가서 구원받으라.’고 외쳐댔다.” 이러한 미팅이 있고 난 후 15년 동안이나 이러한 “열광적”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사람들을 놀려주려고 왔던 구원받지 못한 자들까지도 이 열광의 와중에 휩싸여 버렸다.
3) 로렌조 다우 로렌조 다우(1777) 는 개척시대의 프론티어 설교자들 가운데 가장 괴짜였다.
그는 호프훌의 설교로 회심했고 그때 그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너무도 확신한 나머지 의자에서 거의 떨어질 뻔했다고 한다. 다우의 교회 장로들은 그가 무지하고, 교만하며, 행동이 거칠고 설교 매너가 나쁘다고 비판했다. 후일 다우는 감리교인이 되어 전 미국을 돌면서 칼빈주의자들은 “전부-일부 사람들”(All-Part men)이라고 반격했다.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에서 전부(all)가 나오면 그것을 일부(part)로 읽는다는 것이다(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의 “제한적 속죄” 교리를 비판하는 말임).
어떤 사람들은 그를 “마귀”라고 불렀다. 그는 적어도 한번 이상에 걸쳐 자기를 쫓아낸 한 마을을 저주했는데 그 마을은 그후 100년 동안 너무도 많은 자연재해 및 경제적 재앙 그리고 기상재해를 당해 그 마을 사람들은 다우의 저주가 아니고서는 그럴 수가 있겠냐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4) 큠버랜드밸리 부흥은 미국의 제 2의 부흥(각성)운동을 가져왔다.
성령께서는 이번에도 역시 서쪽을 향해 움직여 가셨는데 이번에는 약간 남서쪽이었다. 이번에는 제 1차 때보다는 온건한 반응이 나왔다. 결국 제 1차 때보다는 “덜 열광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적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긴 했지만 그만큼 열매는 적었다고 할 수 있다.
5) 챨스 피니 제 2차 대부흥운동과 더불어 챨스 피니의 사역이 일어났다(1792-1875).
그는 그의 생애의 첫 20년 동안은 온타리오 호수 남쪽의 광야지역과 뉴욕주의 오네이다 카운티의 인구가 적은 지역에서 무명으로 지냈다. 쉬어러에 따르면 피니가 부흥운동을 일으켰을 무렵 뉴잉글랜드 지방의 교회들은 영적으로 병에 걸린 상태였다고 한다. 그 지역의 로마 카톨릭과 이교도들에게 제공된 “음식”이라고 해야 극단적 칼빈주의와 만인구원론(Universalism)뿐이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 지역에서 그 분의 사역을 마치시고(1600- 1780) 서쪽으로 옮겨가신 후 코네티컷과 메사츄세츠 지역에서 생긴 공백을 카톨릭 교도들이 메꾸었기 때문이다.
피니가 불씨를 제공한 부흥은 메사츄세츠와 코네티컷의 서쪽 지역에 있는 뉴욕시의 풀톤스트리트 화란개혁교회에서 시작되었고 곧이어 다른 교단들도 들어왔다. 같은 시기에 런던의 엑스터 홀, 크로스버 홀, 노스반즈베리 홀 등에서는 장년들의 합심기도회가 열리고 있었고 큠버랜드벨리의 부흥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피니는 구원을 받으려면 개개인이 주님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전파했다. 즉 그는 구원에 있어서의 개인의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경건주의자들 역시 이 점을 강조했다). 그는 칼빈주의자들이 말하는 “주권적 은혜” 대신 개개인이 회개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뉴욕주의 유티카, 로마, 트로이시에서 복음을 전했고 델라웨어주 윌밍톤에서도 설교했다. 그후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사역했고 마지막으로는 뉴욕주의 로체스터시에서 일했다.
독일에서는 바이스, 네안더, 베이슐라그 등과 같은 사람들이 마틴 루터와 바우어를 하나로 묶어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고 영국에서는 다윈과 헉슬리가 인간과 원숭이 사이를 중재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동안, 미국에서는 하나님께서 <킹 제임스 성경>의 설교와 교육을 통해 수천 명의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계속 수행하고 계셨던 것이다.
챨스 피니, 로렌조 다우 및 제임스 맥그리디는 오직 하나의 책만을 믿었고 사용했다. 그들은 결코 “원본” 타령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에 들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고 믿었던 것이다. 피니는 “탄식자의 벤치” 혹은 “애타는 좌석”들의 창시자였다. 그는 변호사의 자질을 갖추고 있어서(루터, 크리소스톰, 탈매지, 터툴리안, 스코필드, 샘 죤스, 등을 기억하라)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에게 잘 맞아떨어지는 내용을 제시하여 그들을 설득시키곤 했다. 그 결과 수십 명의 의사들과 변호사들이 그의 사역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피니는 다른 사역자들로부터 많은 질시와 미움을 받았는데 그 중 유니테리안 교도였던 테오도르 파커는 보스톤에서 일어난 부흥역사를 방해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유니테리안 교도들과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자신들이 상속받은 “필그림 파더즈의 땅”에 부흥을 가져온 챨스 피니를 미워했다. 헨리워드 비쳐 역시 피니를 저항했다(1843).
여러 종교단체에서 피니와 빌리 선데이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돼지우리에서 밀기울을 흔드는 것과 같다(이들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니는 그의 생애 동안 북장로교회들에게 10만여 명의 새신자를 더해 주었고 그의 사역과 연관되어 일어난 부흥으로 메인주에서 플로리다주에 걸쳐 50만 명의 회심자를 얻었다.
로슨에 따르면 피니의 회심자들의 85%가 그들의 회심에 있어 진실되었던 반면에 D.L. 무디의 경우는 70%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피니는 대서양을 건너 영국 볼톤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1200명의 회심자를 얻었다. 이는 영국에서 이미 <킹 제임스 성경>을 설교하고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 밭이 잘 갈아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로버트 에이트킨, 존 로버트슨, 리챠드 위버, 레지날 트래드, 클리프 등이 잉글랜드에서 로버트 홀레인, 제임스 홀레인, 로버트 엠 맥키네, 호라티우스 보너, 알렉산더 보너 등이 스코틀랜드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로버트 에이트킨 같은 사람은 성공회 소속이었는데도 제임스 맥그리디 스타일의 강력한 사역을 펼치고 있었다. 이들 모두는 1611년 권위역본만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었다.
6)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필라델피아 시대의 위대한 선교사들 중 인디안들을 위해 사역한 사람들로는 존 엘리옷(1604-1690), 데이비드 브레이너드(1718-1747), 존 사젼트, 데이비드 짜이스버거, 그리고 헨리 바클레이 등이 있다.
시간과 공간의 부족으로 이들 <킹 제임스 성경>의 위대한 설교자들의 생애를 다 다룰 수 없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읽어야만 한다. 이 일기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 그리스도인의 두 성품이 어떻게 갈등을 빚고 있는가를 가장 실감나게 기록하고 있다.
브레이너드는 게리퍼켈(1979)이 밥 죤스 대학교에서 쫓겨난 것처럼 교수 중의 한 사람이 전혀 은혜롭지 못하다고 말했다고 해서 예일 대학에서 쫓겨났다(1740). (오늘날도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한 근본주의신학교 교수들의 태도와 왜곡된 고집을 접하게 되는 모든 신학생들도 같은 고백을 할 것이다. 한 마디로 전혀 은혜가 안된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자기의 정직한 발언을 철회하지 않아 쫓겨났던 것이다.
그는 델라웨어, 르하이강 및 서스케하나 강 등지에서 인디안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29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의 일생은 한 마디로 생활의 궁핍과 어려운 자연환경 가운데서의 투쟁이었다. 그의 거룩한 삶은 헨리 마틴에게 감동을 주어 선교사가 되도록 하였다. 윌리암 케리가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도 브레이너드의 생애가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7) 데이비드는 루소, 볼테르, 흄, 레싱과 동시대 사람이었다.
이들 철학자들의 삶과 브레이너드 같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과의 생애를 그 열매와 더불어 비교해 본다면 자신이 믿고 설교하였던 바를 일관성 있게 실행한 점에 있어서 브레이너드는 4명의 흄, 5명의 볼테르, 혹은 6명의 루소를 능가하고도 남는다. 브레이너드는 그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든 없든 간에 자신의 확신에 충실하고 정직했다. 그는 인류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영원한 열매를 맺은 것이다. 볼테르, 루소, 흄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옆에 나란히 둔다면 신품 메르세데스 벤츠 옆에 중고품 티코 석대를 세워놓는 꼴일 것이다. 이 세상은 이 세상의 영웅이 있는 반면 데이비드는 하나님의 영웅이었다고 할 수 있다.
8) 셀던 잭슨 개척지 설교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을 들자면 프린스톤 출신의 셀던 잭슨일 것이다(1834-1909).
그는 50년 동안 백만 마일을 여행하면서 사역을 한 결과 6개의 노회, 31개의 장로회, 그리고 886개의 교회를 세우고 죽었다. 그는 1960년 이전에 알라스카, 네브라스카, 아이오와, 몬타나, 워밍 및 유타주를 돌며 설교하였고 77,100명의 회심자를 얻었다. 이 하나님의 용사는 1년 동안에(1869-1870) 29,000마일을 여행하며 23개의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그는 평생 단 한 가지의 책만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축자적으로 영감받은 원본”이 아니라 영어 <킹 제임스 성경>이었다.
9) 에이비 얼 에이비 얼(1810-1890)은 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설교자로 1830년경 사역을 시작한 후 미국과 캐나다에서 325,000마일을 여행하면서 말씀을 전파했다.
그 역시 1611년 권위역본을 사용하여 평생동안 15만 명의 회심자를 얻었다. 얼은 19,000여 번의 설교를 했으며 “나는 오랜 경험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나와 있는 엄격한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사실, 즉 사람들이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기 전에 자신들은 버림받은 자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유명한 발언을 남겼다.
10) 필라델피아 시대에 매튜 헨리, 앤드류 맥클라인, 존 헨리 죠벳 등은 목사로서 사역하면서 영적 교훈 혹은 경건 생활에 관한 교훈 등을 위주로 한 성경 주석을 출간하였다. 플리니피스크와 레비 파슨은 1819년경 유대인과 아랍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다니엘 블리스는 시리아에서 개인 사역을 하였다(필라델피아 시대의 주의 군사들이 도래한 것이다!).
11) 1854년 나가사키 항에 페리호가 정박함으로써 일본에서의 복음 사역이 재개되었는데 리긴스, 윌리암스, 헵번과 시몬즈 등은 그곳에서 사역하였다. 그 중 가장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제임스 발라프(1872)가 조직한 “요꼬사마 밴드”라는 선교단체였다. 이들은 일본 열도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으며 도시샤 대학교에서 일어난 부흥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 그룹이 훈련시켜 배출한 전도자들로는 카나모니, 야마무로, 크와베 및 키무라 등이 있다. 한편 허드슨 테일러는(1832-1905) 중국 내지 선교회를 세웠다. 판디타 라마바이와 몇 사람들은 인도에서 알렉산더 더프(1853)의 사역을 이어받아 복음을 전했다.
(1) 빌리 브레이
빌리 브레이(1794-1868)는 영국의 콘월 출신으로 여러 곳을 순회하며 설교했던 전도자였다. 그는 심히 죄악된 삶을 살다가 구원을 받았으며, 거듭남과 아울러 영국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브레이는 커다란 집회를 개최해 본 적은 없지만 죽을 때까지 꾸준하고 신실하게 복음을 전했고,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빌리 브레이는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나를 보고 미친(mad)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의미하는 바는 내가 기쁜(glad) 사람이란 뜻이다... 나는 길을 걸어갈 때마다 한쪽 발은 ‘영광’이라고 말하고 또 한쪽 발은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브레이의 삶과 죽음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 점철되었다. 아마 그러한 영적 축복을 누린 신학자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브레이의 아내가 죽었을 때 그는 거실에서 춤을 추며 기뻐 외쳤다. “나의 아내 조에이는 빛나는 영광을 지닌 자들에게로 갔도다. 찬란한 천사들과 함께 거하니 영광이 있으라.” 라오디케아 교회시대(1900-1990)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가능한 한 빌리 브레이의 전기를 읽어야만 한다. 특히 그가 실제로 산을 옮긴 때와 그의 마지막 한 잎을(그 돈은 의사를 불러 딸을 치료하려던 것이었다) 가난한 자에게 주어버린 그 때를 잘 읽어봐야 할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의사를 부르지 않고도 그의 딸을 치료해 주셨다. 빌리 브레이의 “다리를 건너는 이야기”는 실천신학과 성화에 있어서 이미 고전이다.
(2) 클라우스 함즈
클라우스 함즈(1778-1855)는 독일 출신으로 당시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던 관념론(Rational- ism)을 공격했다. 니브가 지적하는 19세기 전반기에 독일에서 일어났던 종교적 부흥은 세속적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로크만, 키에르케고르, 쉘링, 게세니우스, 기본, 칸트, 쉴러, 팔레이, 페인, 피히테, 밀, 나폴레온(카톨릭), 헤겔, 슐라이어마허, 텔리란트(카톨릭), 메떼르니히(카톨릭), 페스탈로치, 베에토벤]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바로 클라우스 함즈에 의해 일어난 것이었다.
토마스 구트리(1803-1873), 에드워드 어빙(1792-1834), 헨리 페리(1829- 1890), 로랜드 힐(1744-1833), 그리고 다니엘 롤랜즈(1800)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피의 대속을 믿음으로 받게 되는 구원을 전파했다. 그들은 영국, 스코틀랜드, 미국에서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했다. 롤랜즈가 설교하는 강대상 밑에 누군가가 화약을 갖다 놓고 휴즈를 연결시켜 놓기도 했고, 한번은 가까운 거리에서 엽총 알에 맞기도 했다. 위에 열거한 모든 사람들은 단 하나의 책, 즉 <킹제임스성경, 1611>만을 설교했고 믿었다.
(3) 크리스마스 에반즈
크리스마스 에반즈(1766-1838)는 웨일즈 출신의 설교자로 존 죤스, 윌리암 윌리암즈, 다니엘 롤랜드, 존 엘리아스 등의 뒤를 이어 부흥을 이끌었다. 1742년에는 두 명의 위대한 설교자가 스코틀랜드를 복음화시키고 있었다. 그는 윌리암 맥컬로크와 제임스 글랜딩이었다. 맥클로크는 글래스고우 근처에서 사역했는데 일년에 400여 명의 남녀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했다. 이들의 회심은 강제로 미사에 참여하는 따위의 로마 카톨릭식 개종도 아니고 라오디케아 교회시대에서 흔히 행하는 “입으로만” 하는 그런 회심과는 달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심이었다. 그들은 성인 남녀로서 맥클로크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께 울면서 자비와 용서를 구했던 자들이다.
크리스마스 에반즈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9살 때 부모를 잃었고 회심하기 전에는 여러 사건들이 있었는데 한 번은 거의 익사할 뻔하였으며, 한 번은 칼에 찔렸고, 또 한 번은 달리는 말에 치어 거의 죽을 뻔하였다. 그가 사역을 시작한 후에도 그의 회심으로 그를 미워했던 친구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그의 눈을 상했다. 그는 서투른 설교자였으며 초라한 옷을 입고 다녔지만 그의 메시지는 강력한 영향력이 있었다.
그의 설교를 들은 남녀노소는 울고, 뛰며, 소리를 질러댔고 어떤 때는 흥분이 도저히 가라앉지 않을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에 크게 고무되어서 때로는 글자 그대로 일어나 춤을 추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웨일즈의 뛰는 자들”(The Welsh Jumpers)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웨드워드 페이슨은 메인 주 포트랜드에서 목사로서 설교했으며 사무엘 부엘은 롱 아일랜드에서, 그리고 리챠드 박스터는 키더민스터에서 부쉬넬(1802-1876), 비쳐(1800-1887), 필립스 브룩스(1835-1892), 프레데릭 로버트슨(1816- 1853), 그리고 존 뉴맨(1801-1890) 등과 더불어 사역했다. 부쉬넬은 후일 독일의 배교자 슐라이어마허에 의해 사회주의에 몰입했고 끝내 어린 아이에게는 그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을 해서는 안되며 어린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크리스챤이었다고 생각하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이단에 빠지고 말았다.
리만 비쳐는 삼위일체 문제로 이단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에 관해 건전한 교리를 갖고 있었다. 그의 문제점은 그가 오리겐과 어거스틴의 거짓 교리인 후천년주의를 가르쳤고 “거듭난 인류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언급하였다는 것이다(성경 어디에도 인류가 거듭난다는 말은 없다. 개개인이 성령으로 거듭날 뿐이다).
그는 또한 해리엇 비쳐 스토브와 쥴리아워드 호브 등과 함께 “왕국을 이 땅에 가져오는 일”에 힘썼다. 그들은 북군이 남쪽의 백인들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가 행진을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것은 진리라는 단어가 가장 남용된 예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이 사용한 구실은 “자유”였다. 그들은 북쪽의 양키 군대가 남북전쟁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위대한 과업을 수행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80년 현재 미국의 흑인향상협회 지도자 중 그 누구도 흑인들이 “해방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4) 로버트 모리슨
로버트 모리슨(1782-1834)은 최초의 개신교 중국 선교사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중국인이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두 가지 대적이 중국에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로마 카톨릭과 동인도 회사의 간부들이었다. 모리슨은 창고에서 살면서 킹 제임스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했으며 중국어 사전과 문법책도 만들었다. 사실 이것들 덕분에 1945-1965년 모택동이 만들어낸 공산주의에 관한 책들을 중국인들이 읽을 수 있었다(복음전파, 성경교육, 문화, 배교를 기억하라).
(5) 죠슈애 마쉬맨
죠슈애 마쉬맨(1766-1837)은 윌리암워드와 윌리암 캐리의 선교사역에 동참하기 위해 인도로 갔다. 사무엘 마즈렌은 마오리스(뉴질랜드)의 사도로 불리는 사람으로 1794년 호주로 갔다가 1814년 처음으로 뉴질랜드로 갔다. 그때부터 1838년 그가 죽을 때까지 마즈렌은 뉴질랜드로 여러 차례 선교 여행을 가서 마오리스 족에게 복음을 전했다. 마즈렌의 사후 3년이 지나 그 지역을 방문했는데 셀윈 주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이 지역 전 주민이 신앙으로 돌이킨 것을 보았다.” 마즈렌이 죽었을 때 뉴질랜즈의 모든 마오리 족 성인들은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자들이었다.
마즈렌은 홀트와 네슬 본문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당시의 비평 원문들은 완전히 무시했다. 그것들은 윌리암 메이스(1729), 벵겔(1734), 하우드(1776), 버치(1798), 허그(1808), 알터(1787) 등이 만들어낸 “성서”들이었다. 마시맨과 마즈렌 같은 선교사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은 이들 부패한 성서들은 오늘날의 커스터, 웨스트, 메이첸, 로버트슨(하바드 출신), 예일, 옥스포드, 할레, 캠브리지, 다트마우스, 프린스톤, 튜빙겐, 베를린 대학의 신학자들을 배출했다. 심는 것은 종류대로 나오는 법이다.
(6) 존 펙
존 펙(1789-1858)은 일리노이와 미주리 주로 선교사역을 펼쳤다. 그는 죠나단 고잉 박사가 미국 침례교 가정선교회를 설립하는 것을 도왔으며 후일에 켄터키 코빙톤에 신학교를 세울 때도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피터 파커(1804- 1888)는 의료 선교사역을 하기 위해 중국의 캔톤지방으로 갔다. 그들은 바울의 지침대로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지역으로 1611년 권위역본, 즉 <킹 제임스 성경>을 들고 복음을 전파하러 간 것이다. 윌프레드 그렌펠(1866-1940)은 라브라도르와 뉴파운드랜드에서 의료 선교사로서 일했다.
헨리 마틴(1781-1812)은 페르시아로, 데이비드 리빙스톤(1813-1881)은 동아프리카로, 한스에기드(1686- 1758)는 그린랜드, 알렉산더 더프(1806-1878)는 인도로, 알프레드 세이커(1814-1880)는 카메룬으로 갔다. 아렌 프렌시스 카이너(1794-1851)는 띠에라 델 푸에고에 있는 파타고니아 지방 해안에서 떨어져 있는 픽톤 아일랜드에서 굶어 죽음으로써 자신의 피로 주님을 증거했다. 가디너(네이트 세인트처럼)는 포크랜드 섬의 원주민들을 복음화시킬 기회를 결코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희생적 죽음 후 영국 국민들의 각성으로 30년도 채 못되어 포크랜드 섬의 모든 원주민 성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존 게디(1815-1872)는 뉴히브리즈 지역으로 갔던 카나다 선교사였다. 그는 존 페이톤(1824-1907)의 선구자였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존 페이톤의 전기를 타잔의 모험담처럼 읽고 있다. 게디가 에네이팀 섬에 상륙했을 때 그곳에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1832년 그곳을 떠났을 때 그곳에는 이교도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어떤 사람들에게는 게디야말로 “영국의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인물일지 모르겠다).
존 페이톤은 타나 지방의 인간 사냥꾼들 및 식인종들과 싸웠다. 이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 그가 갖고 있었던 무기는 <킹 제임스 성경>과 찬송가뿐이었다. 그의 아내가 죽었고 그의 아들도 죽었으며 선교센타는 타버렸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성경 하나만을 든 채로 타나에서 쫓겨났다. 선교를 포기하는 대신 그는 아니와 섬으로 선교를 하러갔다. 그는 그곳에 살면서 모든 원주민 성인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도록 이끌었다.
페이톤은 최소한 30차례에 걸쳐 직접적인 목숨의 위협을 당했다(이것은 직업 군인이나 깡패들보다도 더많은 횟수이다). 그리고 적어도 20번은 무기가 그의 얼굴 혹은 몸에 거의 닿을 정도의 위협을 받았다. 글을 읽을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존 페이톤의 전기를 읽어야만 한다. 존 페이톤의 삶을 존 웨인, 아브라함 링컨, 맥아더, 케네디, 패튼 장군, 존 레논 등의 인생을 비교해 보면 이들의 삶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인생일 뿐이다.
[출처] < 필라델피아 시대의 용사들을 보라 >|작성자 셋째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