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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대교구 역촌동 성당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Gervase
2009년 11월 24일 화요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 베트남의 순교 성인 안드레아 둥락 신부는 1785년에 태어났으며, 사제가 되어 열정적으로 사목하였다. 박해 시대의 중심 인물이었던 그는 관헌들의 끈질긴 추적으로 체포되어, 1839년 하노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54세였다.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그의 동료 순교자들을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Jesus said, 말씀의 초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은 거대한 동상이 부서지는 꿈을 꾸고는 번민에 빠진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고 했지만 누구도 해몽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니엘이 풀이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니엘은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종말을 예고하신다. 사람들은 그날이 언제인지 묻고 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표징이 먼저 있을 것이라 하신다. 거짓 메시아의 출현과 종말에 대한 난립하는 정보들이다. 평소 준비하며 사는 이들에게는 예전부터 알려진 가르침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최고의 가짜는 ‘가짜 메시아’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다.”, “내가 재림 예수다.” 겁 없이 외치는 자들입니다. 역사 안에는 그런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죽은 뒤에는 가짜임이 금방 드러났습니다. 지금도 자신을 메시아라 외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가짜가 분명한데도 따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무엇인가에 현혹되어 자신의 미래를 맡기고 있는 자들입니다. 자비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 김순중 수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여러 예언자가 성전 파괴를 예고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제자리에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조명연신부- 개구리 한 마리가 있었는데, 이 개구리는 개굴 개굴 우는 자기 자신의 둔탁한 목소리를 싫어해서 몹시 속상해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아름답게 노래하는 새들이 너무나도 부러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그 개구리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 때문에 우울해 하고 있는데, 천사가 나타났어요. 그리고는 이 개구리에게 왜 그렇게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개구리는 자기 자신의 소원을 말했지요. 그랬더니 천사가 개구리의 목소리를 아름다운 종달새의 목소리로 바꿔 주었습니다. 개구리는 너무나도 신이 났지요. 그리고 이 개구리는 새로 얻은 목소리를 자랑하고 싶어서 부지런히 개구리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마을의 모든 개구리를 불렀습니다. 이윽고 개구리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는 아름다운 새소리로 감미로운 노래를 불렀지요. 노래가 끝나자 개구리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둔탁한 목소리로 개골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개구리 목소리가 저렇게 흉칙할 수도 있담!" 무엇이든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 개구리 역시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야 아름다운 목소리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새 소리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참, 듣기 좋은 소리라고 말을 하지요. 하지만 사람이 사람 말을 하지 못하고, 새 소리만을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겠지요. "아이고, 저 사람 참 안됐어." 그밖에도 제자리에 있어야 아름다운 경우는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시원하고 깨끗한 물 한 컵을 만나면 무척이나 반갑지요. 하지만 그 물이 화장실 변기통 속에 들어 있다면 같은 물이지만 인상을 찌푸릴 것입니다. 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햅쌀밥이 예쁜 사기 그릇에 담겨 있으면 먹음직스럽도록 귀하지만, 바닥에 떨어지면 순식간에 그 밥은 양식이 아니라 쓰레기가 될 것입니다. 또한 남편이 아내 곁에 누워 있으면 아무도 나무랄 사람이 없지만 그 남편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 곁에 누워서 제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겠지요. 이처럼 자기 자리에 있을 때,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하신 것 같아요? 여러분들의 자리에 충실히 계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구경시켜 주십니다. 제자들은 모두 갈릴래아라는 시골 출신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서 입이 쩍 하고 벌어졌을 것입니다. 마치 시골 사람이 서울에 와서 사람이 많고, 높은 건물을 보고, 많은 차들을 보면서 놀라는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아름답고, 웅장한 이 성전이 무너져 버릴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성전은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곳으로 절대 무너질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이 아름답고 웅장한 이 성전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성전이 전부인 양 생각하고 이곳에서만 최선을 다하는 행동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종말이 다가왔다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이 현재에 대해서 충실한 삶을 살 때, 즉 지금 어떻게 살아야 구원받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열심히 지금 내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자리를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얼마나 그 자리에 충실했는가를 반성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양승국신부- 요즘 우리 사회의 문화 안에서 눈에 띄게 우려되는 측면이 한가지 있습니다. 제가 가장 혐오하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철저하게도 인간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조직폭력배들의 삶이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의리"니 "우정"이니 뭐니 하면서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자연스럽게 용인되고 미화되는 현상입니다. 그들은 이 시대의 암적인 존재들이지요. 그들에게 찾아볼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은 거의 없습니다. 오로지 파괴를 일삼으면서 살육을 본업 삼아 무위도식하면서 동물처럼 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가정과 공동체, 이 나라를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조폭들의 일상을 미화시키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많습니다. 그들은 이 시대 청소년들과 부모들에게 무릎꿇고 백배 사죄해야할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9시 뉴스를 보다가 기가 차서 할말을 다 잃었습니다. 현금지급기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 한 여성을 한 강도가 쇠파이프로 인정사정 없이 휘갈기는 광경이 여과 없이 그대로 방영되더군요. 피해자는 너무도 많이 맞아 혼수상태로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고 있답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그리도 철저히 파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불구대천의 원수지간도 아닌데 말입니다. 때로 이 사회 안에 버젓이 그리고 당당히,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는 구조적인 사회악 앞에서 너무도 분노에 찬 나머지 할말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끝도 없이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양상을 더해만 가는 하위 문화의 구조 안에서 동물처럼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슬픈 눈동자로 바라만 보고 있어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도 가슴아픕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하는 약육강식의 시대, 아비규환의 세상에서 정도(正道)를 걷는 사람들의 삶이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물고 물리는 먹이사슬 안에서 빈자와 약자만을 골라 등을 쳐서 호의호식하는 사람들, 보통 사람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접대문화 안에서 그저 하루 하루를 동물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제 부족한 소견으로도 이런 상황들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너무 화가 납니다. "도대체 이 세상이 어디까지 갈려고 이러나?"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귀신은 뭐하나? 저런 *들 데려가지 않고!"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하느님은 도대체 뭐하시나? 저런 *들 벌하시지 않고!"하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끝도 없는 이스라엘의 배신과 타락 앞에 예수님의 마음 역시 저 못지 않게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죄악도 타락도 어느 정도여야지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던 예수님께서는 극약처방으로 "성전파괴"를 예언하십니다. 비통한 심정, 애끓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의 대재앙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최후의 경고마저 우리 인간을 향한 무한한 예수님의 자비, 아버지로서 애끓는 연민의 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그 하느님이시기에 죽어 가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최후의 처방전으로 성전파괴와 이 세상의 종말을 예언하십니다 너를 허물고 나를 세우리라 -상지종신부- 살다보면 자신에 대해서, 자신이 속해있는 자그마한 모임이나 공동체에 대해서,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일에 대해서 내심 뿌듯하게 생각하며 자족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도가 지나쳐 이런 것들에 집착하거나 자만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고 그저 외적으로 드러난 것에만 눈길을 보낼 때 이런 어리석은 짓을 너무나 당당하게 행하게 됩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신앙인이라면 자신, 자신이 속해있는 자그마한 모임이나 공동체(교회안에 있는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일, 이 모두를 하느님의 뜻에 비추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겉으로 그럴듯 하게 보인다 할 지라도 그 안에 주님의 뜻이 담겨 있지 않다면, 주님의 뜻으로 정향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이내 허물어지고 말 모래성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신앙인들이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와 자신의 일을 주님의 뜻으로 채우기 보다는, 인간적인 욕심과 명예, 알량한 자존심과 하찮은 지식으로 채우려 합니다. 그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뜻을 이룬다는 미명하에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 무척 당당합니다. 이들의 당당함 앞에 오히려 측은함을 느끼게 됩니다. 도대체 자신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당당하게 아니 뻔뻔스럽게 자신의 뜻만을 고집하는 이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다가도 이내 인간적 한계안에서 헤매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고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조금만 주님의 뜻을 헤아린다면, 조금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면 자신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참된 신앙인으로 기쁨과 희망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텐데 무척이나 아쉽습니다. 잘못된 것이라고 하더라도(사실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잘못인지 안다면 그것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 안에서 쌓여 온 여러가지 것들을 떨어버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잘못된 생각이나 관점들도 오랫동안 자신 안에 묵혀 있으면 옳은 것처럼 느껴지고, 주님의 뜻과 무관하거나 심지어 상반되는 인간적인 뜻도 이기심에 눈이 먼 자신에 의해, 자신이 속한 단체의 잘못된 전통에 의해 주님의 뜻으로 둔갑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한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 바로 주님과 맞대고 앉아 솔직하게 대화하는 것,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자신을 거기에 맞추는 것, 교회 공동체 전체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신앙인은 아무도 없겠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실천을 하고 있는지 솔직히 의심스럽습니다. 사제로서 살아가면서 교회 공동체안에서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라고 해서 여기서 특별히 제외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때때로 교회 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이들과 대화를 하다보면(특히 교회안에 있는 여러 단체간의 미묘한 갈등이나 입장 차이, 이로 인한 개인 신상에 관련된 문제에 이르기까지) 안타까운 경우도 많고, 심지어 주체하기 어려운 격정과 분노를 일으키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솔직히 사제로서의 한계를 체험하면서 하느님께 한탄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만히 계시는 주님이 너무나도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멋대로 교회 활동을 하는 이들이 교회 공동체 전체의 입장이나 다른 신앙인들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나 입장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 함부로 주장하는 경우에 참으로 암담한 생각이 듭니다. 이들의 그릇된 생각이나 행동을 바로 잡아주되, 이들이 지니고 있던 것들이 무너질 때 오는 상처를 최소화시킴으로써 교회 공동체를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 주님의 사제로서의 책임이기에 사제 생활이 참으로 어려운가 봅니다. 요즈음 이런 저런 일련의 일 때문에 고민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에서 희망을 얻습니다. "지금 너희가 성전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날이 올 것이다." 자신의 생각만으로, 자신이 속한 단체의 전통만으로, 자신이 이루어 놓은 일만으로 세워놓은 아성에 집착하여 다른 사람을, 다른 단체를, 교회 공동체 전체를, 모두 함께 일구어가는 주님의 일을, 하느님의 뜻을 보지 못하는 미숙한 이들이 참 신앙을 되찾게 되리라는 말씀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 일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아픔을 겪어야만 하겠지만, 제 안에서 먼저 이 일을 이루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보시기에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이들 안에서 이 일을 꼭 이루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기도를 이루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주님의 자그만한 도구로서 사목 현장으로 기쁘게 그리고 당당하게 달려가렵니다. <천국 체험> -양승국신부- 오늘 "모닝 미팅" 때에는 6개월 만기를 채우고 귀가하는 한 친구의 참으로 가슴 찡한 작별인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괜히 여기저기 간섭하다가 형들에게 혼도 많이 났었고, 목소리가 유난히 커서 오버할 때도 많았던 친구였지만, 모닝미팅 "신나요" 코너-장기자랑-단골손님으로 팍팍한 모임의 청량제가 되었던 친구, 참으로 심성이 곱고 정이 많았던 친구였습니다. 아침 모임이 끝나갈 무렵, 진행하시는 선생님이 그 친구를 앞으로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신부님, 수사님, 선생님들 앞에서 "한 말씀"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한마디에 다들 뒤집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전체를 한번 둘러본 그 친구는 자신이 생각했을 때 자기보다 더 어리버리하고 비실거린다고 생각되는 친구들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르면서 한마디씩 충고를 하는 것입니다. "야, 너! **! 너는 수사님들한테 개기지 말고 열심히 살아. 그리고 **! 너는 말이지 빨리 담배끊어. 일생에 도움이 않되. 또 **! 너 제발 가출 좀 하지마. 여기서 나가봐야 특별한 게 있는 줄 아냐?" 등등. 그리고 마침내 표정을 가다듬더니, "신부님, 수사님, 선생님들 그간 잘 지도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자주 놀러오겠습니다"로 마무리지었습니다. 떠나가는 아이의 표정은 연신 싱글벙글 너무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천국체험을 하는 듯 했습니다. 요즘 계속되는 복음의 주제가 "종말"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날, 작별의 날이 우리 착한 친구가 체험했던 기쁨의 순간, 행복의 순간, 감사의 순간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마지막 날이 오랜 세월 우리가 품어왔던 모든 두려움과 고통, 십자가가 영원한 삶으로 승화되는 순간이면 좋겠습니다. 그날은 하느님께서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는 날,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뵙는 은총에 너무 기뻐 뛰노는 날이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날이 공포의 순간, 멸망의 순간이 아니라 은총의 순간, 희망의 순간이 되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할 전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지속적인 봉헌생활입니다. 다시 말해서 각자 주어진 처지에서 기회가 닿는 대로 꾸준히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각자의 삶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언제나 기도하는 일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이방인 왕을 통해서도 계시된 하느님 나라 그때에 이르면 - 원영배- 오늘 복음을 읽으며 4년 전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서 열렸던 미국 CLC(Christian Life Community)의 전국대회에 참가했을 때가 떠올랐다. 대회 프로그램 중 사회정의 사도직 체험의 일환으로 현지의 빈민구제와 난민보호사업 견학이 있었다. 버스를 타고 시내를 조금 벗어난 거리에 들어서자 이곳이 미국 땅인가 의심이 들었다. 야자수만 무성한 먼지투성이 길에 갈색 피부의 하이티 출신 난민들 모습을 보니 가난하고 정치가 불안정한 카리브해 섬나라의 살풍경을 그대로 옮겨온 듯싶었다. 무당 신앙 장재봉신부- 성경은 하느님과 인간의 경지를 하느님 안에 그리고 내 안에 하느님이 들어오시는 임마누엘이라는 사실을 명료하게 설명합니다. 삶의 가장 최고의 기쁨은 하느님이심을 말하고 최대의 축복은 복덩이 자체이신 하느님을 누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속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속이는 자는 늘 있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존재할 것입니다. 이들은 땅의 것을 해결해 준다고 선언하여 기복으로 기울어진 마음을 홀립니다. 혹은 땅의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며 맹신을 유도하기도 합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속지 말아야지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속을 리가 없겠지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교회 안에서조차 기복신앙이 허다합니다. 기복신앙이란 꼭이 점을 치고 굿을 하는 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는 모든 것이 ‘기복’입니다. 삶 안에서 하느님을 밀어 두고 하느님의 뜻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꾸만 세상 것에 안달하고 조바심을 친다면 ‘기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조차 많이 갖고 누리는 것을 행복인양 인식하는 까닭에 이단과 적그리스도가 기승을 부립니다. 그리스도인임에도 잘 먹고 잘 입는 일이 축복이라 생각하고 큰 소리 치면서 섬김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만을 복이라 여긴다면 한 마디로, 무당신앙입니다. 성경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의 에센스는 ‘기뻐하라’는 명령입니다. 기뻐하는 일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은 모든 상황에 감사합니다. 하느님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을 세상이 속일 수 없는 이유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기쁜 사람에게는 ‘그날’마저 기쁨의 때입니다. 그분을 모시기 위해 그분을 뵙기 위해 변화되고 성숙되는 최고의 오늘이기를 원합니다. 아멘 새벽을 열며 위대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뒤뜰에 있는 큰 바위를 보았습니다. 반은 땅 속에 묻혀있고 반은 나와 있어서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돌을 보면서 ‘쓸모없는 돌이 왜 여기에 있어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느냐’고 불평과 불만을 터뜨렸지요.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빠다킹신부 세상의 종말 -서현승 신부- 약 15년 전쯤에 한바탕 ‘휴거’ 소동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묵시적 표현들을 지금이 바로 그때 -정애경 수녀- 연중 제34주간은 교회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간이다. 이제 며칠 후면 새해를 맞이하게 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교회의 전례는 세상의 종말과 그 징조에 대해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화려하게 장식된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고, 종말의 끔찍한 표징들이 있을 것이며 당신을 사칭한 자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통해 -오 마리아 수녀- 지난 여름 미국에서 카트리나라는 무서운 허리케인으로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재난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그 일이 미국에서 일어났는데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재난을 당했다면 제3세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얼마나 더 큰 재난이 있었을까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나라도 지난 추석에 충청도에 뜻하지 않은 폭우로 농경지가 모두 물속에 잠겼을 때 한 농부가 뉴스 인터뷰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뭐, 할 수 있습니까? 하느님이 하시는 일인데요.” 천재지변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할 수 있는가. 과학이나 어떤 준비로도 당해낼 수가 없었던 이런 체험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 전상규 신부- 예루살렘 성전은 실제로 기원 후 70년경에 성전 파괴라는 재앙을 겪었습니다. “ 세상이 유지되는 밑바탕에는 주님께만 최종적인 희망을 두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 -홍성만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두고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를 하는 몇몇 사람을 향해, 찬물을 끼얹는 듯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이에 그들이, 이러한 일이 언제, 그리고 어떠한 표징으로 나타나겠느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이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반드시 먼저 벌어지고 말 '그러한 일'들이 현재의 세계 역사 속에서 누누이 일어나고 있지만 '바로 끝이 아니다'라는 말씀과 함께 '속지 말고 뒤를 따라가지 말며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에 시선을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헤쳐 나가지 못할 것만 같은 어두운 이 세상이지만, 주님께 궁극적인 희망을 두며, 속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이 세상은 유지가 됩니다. 이렇게 세상이 유지되는 밑바탕에는 주님께만 최종적인 희망을 두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암혹의 시기마다 성인ㆍ성녀들이 탄생했음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주님만 희망을 두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풍요로운 마지막 날 -김현영 신부 - 오늘의 성경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시면서 세상의 마지막 날이 오기 전 여러 가지 징표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루가 21:8) 굳이 ‘참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 즉, 사랑의 복음 말씀에 기초하여 세상의 삶을 올바로 살아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어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어놓으셨던 하느님의 사랑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은 언젠가는 올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개인의 삶이 끝나는 날 즉,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순간이 될 것이고, 세상에는 어느 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가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서로 서로를 사랑하여 미움과 질투 그리고 싸움과 전쟁이 사라질 때, 이 세상이 바로 천국이라 여겨질 때가 세상의 마지막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때에는 더 이상 지상의 삶이 필요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요?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이요 기회입니다. 세상 어느 누구도 갑자기 들이닥친 생애 마지막 사건에 초연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매 순간 기쁨을 살 수 있다면 인생 전체를 기쁨의 바다에서 유람할 수 있을 것이며, 나의 기쁨으로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뢰심과 인내심 갖기 -백광현 신부 - 언젠가 불후의 명작 ‘벤허’를 본 적이 있습니다. 벤허가 잡혀 배를 젓는 노예가 -강영구 신부 -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너희가 성전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날이 올 것이다.” -박상대신부_ 어제 복음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동전 두 닢이라는 과부의 헌금(루가 21,1-4)이 과연 자신의 가진 것 모두를 바친 것인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당장은 알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다. 그 ‘언제’란 바로 종말 때의 심판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종말까지 갈 필요는 없다. 누구보다 자기 스스로가 자신이 행한 행동의 동기(動機, motive)와 지향(志向, intention)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바치는 헌금의 가치는 헌금하는 자의 마음이 결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늘 제3자의 시각과 판단이다. 부자가 넉넉한 가운데서 많이 바치고 자랑스럽게 뽐내는 행동과, 과부의 경우처럼 가난한 사람이 어려운 가운데서 가진 모든 것을 바치고도 부끄러워 미안해하는 행동은 겉으로만 보이는 제3자의 인식이다. 그러나 부자와 가난한 자의 그 속마음과 사정을 제3자가 어떻게 알겠는가? 따라서 제3자의 인식에는 분명히 모순(矛盾, contradiction)과 불일치(不一致, discrepancy)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종말의 공심판이 필요한 셈이다. 교회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화~토요일)에 들려주는 매일미사의 독서와 복음말씀은 모두 세상종말에 관한 내용이다. 독서는 홀수 해의 경우, 다니엘서(1-7장)의 말씀을 듣고, 짝수 해의 경우에는 연중 제33주간 월요일부터 34주간 토요일까지 요한 묵시록(1-22장)의 말씀을 듣게 되며, 복음으로는 루가복음 21장을 듣는다. 모든 내용이 종말론적이고 묵시(?示) 문학적인 성격을 아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종말과 묵시적 성격이란 세상이 이제 그 마지막에 직면하여 드러내거나 맞이하게 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말한다. 계시(啓示, revelation)라는 개념이 ‘시작’과 관련하여 새로운 것과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는 단어라면, ‘종말’과 ‘묵시’와 관련하여 드러나거나 맞이하게 될 일들을 대표하는 개념은 현현(顯現, epiphany)과 폭로(暴露, apocalypse)라는 단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의 종말을 선언하는 대변화,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생자(生者)와 사자(死者)에 대한 그분의 심판, 그리고 종말 후의 내세(來世)에 관한 일 등이다. 성서(聖書)상 종말과 묵시문학적 유형으로는 구약의 다니엘서(BC 160년경)와 신약의 요한묵시록(AD 100년경)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구약시대 말기에 편집된 묵시문학적 작품들은 ‘에티오피아어 에녹서’, ‘희년서’, ‘시빌라의 신탁’, ‘열두 족장의 유언’, ‘모세의 승천기’, ‘솔로몬의 시편’, ‘제2 에즈라서’, ‘시리아의 바룩서’ 등 그 규모가 실로 방대하다. 묵시문학의 발생원인은 이스라엘이 외세의 지속적인 침략에 의해 주권(主權)을 잃고(BC 721년 북왕조 멸망, 587년 남왕조 멸망과 유배생활, 333년부터 알렉산더 대왕과 희랍의 지배, 63년부터 로마제국의 지배) 의기소침한 가운데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주권회복을 야훼 하느님이나 그분의 사자(使者) 또는 메시아에 의탁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묵시문학은 천지창조부터 세상종말까지의 환란과 난세의 역사를 다루면서 종말사건과 내세를 통한 통렬한 개벽(開闢)과 역전(逆轉)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염원하던 개벽과 역전은 없었고, 한 가닥 독립전쟁(AD 66-70)의 시도마저 여지없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대가로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이스라엘 자존심의 상징인 성전까지 불타고 말았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도 공생활 마지막 시점에서 세상종말과 관련하여 묵시문학적 가르침을 주셨다.(마태 24,1-25,46; 마르 13,1-37; 루가 21,5-36) 그러나 예수님의 종말교훈은 이스라엘의 염원이나 묵시문학자들의 생각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것은 구약의 묵시문학적 염원과 예언의 성취자로 예수께서 이미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도래는 단지 ‘사람의 눈으로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뿐’(루가 17,20)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임재(臨在)하여 있는 하느님 나라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끝나는 것도, 가짜 그리스도의 출현이나 반란과 전쟁, 기근과 전염병이나 지진과 우주적 징조로도 끝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왜 공관복음들이 제각기 예루살렘성전의 파괴, 종말의 시작, 큰 재난의 예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최후 만찬을 앞둔 시점에 배치하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다.(마태 24장; 마르 13장; 루가 21장) 예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파스카의 성삼일)을 목전에 두고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면서 당신의 몸으로 이루어질 신약(新約)의 새로운 성전을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돌과 사람들이 갖다 바친 예물로 인해 겉으로만 화려한 성전을 보고 넋 나간 듯이 감탄하지 말고, 그 성전 안을 맑은 눈과 마음으로 들여다보며, 자신의 성전을 내적 아름다움으로 채우는 일이다. 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당하는 불행의 결과만 놓고 땅을 치며 통곡할 것이 아니라 그럴수록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침착하며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헛되고 표면적인 가치나 사상, 특히 부(副)나 재물이나 돈 같은 맘몬(Mammon)이나 우상을 따르지 말고, 오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을 귀 기울여 듣고 마음에 새겨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종말보다 오늘 내 삶의 동기와 지향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유 광수신부-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 질 때가 올 것이다." 오늘 복음은 이 세상이 끝날 때 어떻게 될 것인가를 미리 알려 주는 말씀이다. 이 세상도 언젠가는 끝나는 날이 올 것이고 인간도 누구나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죽음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지에 대해서 늘 관심을 갖고 살아간다. 언젠가는 반드시 올 세상 끝 날은 그리고 나의 죽음은 불행한 일이거나 슬픈 일이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들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 뿐이다. 즉 그 동안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안개 속에 쌓였던 신비스런 세계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 뿐이다. 따라서 세상 종말이 온다는 것은 비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기쁨일 수도 있고 완성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정몽준 후보와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 치열한 경선 끝에 마침내 단일화를 이루워져서 그 동안 말도 많고 문제도 많았던 일들이 하나로 정리되고 일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듯이 나의 죽음은 그리고 세상 종말은 굳이 불행한 일이거나 비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마침내 우리가 바라던 때가 되어 모든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단일화가 두 사람 중에 하나가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었듯이 나의 죽음 후에 올 세계가 그리고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들이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이 누누히 말씀하셨던 것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종말에 가서 일어날 일들은 지금 현재 나의 삶과 무관한 전혀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의 현재의 삶의 결산이 종합적인 평가가 될 것이다. 즉 지금 내가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열심히 살았으면 상을 받을 것이고 아무리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살았다면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반드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 세상이 올 것이다. 아니 우리는 매일 낡은 것을 보내고 새로운 날을 맞이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이며 하루 하루 지나가듯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언젠가는 모든 것이 다 완성될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시간을 물을 흘러보내지 않고 고여있게 하면 반드시 썩듯이 매순간 영원을 향해 흘러가는 현재의 시간을 흘러가는 리듬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변화되지 않고 마치 영원히 살 것 같이 현재의 것들에 집착되어 있다면 새로워지지 않고 마침내 썩을 것이다. 따라서 루가는 종말과 현재의 삶이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계획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 속에서 실현시키신다. 즉 죽음과 부활이라는 서로 대립되는 삶을 통해서 구원 계획을 보여주시고 실현시키신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위해서 먼저 죽으셨다. 즉 이 세상을 그리고 나의 죽음을 심판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세상 종말이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라고 묻는 질문에 "너희는 잘못 이끌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 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겁내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바로 끝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세상 종말에 가서 갑자기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에 오셨고 그분의 심판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 자신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듯이 우리가 나와 이웃의 구원을 위해 죽지 않으면 세상 종말에 영광스럽게 부활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심판하는 것은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2,19-2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삶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살도록 불리움을 받은 이들이고 그것을 증명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라고 말씀하셨듯이 세상 끝 날에 그리고 나의 죽음에서 영광스럽게 부활하려면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삶은 오늘 내가 걸어가야 할 삶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삶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온갖 사치와 화려함으로 자기 자신을 꾸미며 사는 삶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으나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어제 복음에서 이야기한 부자들 즉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라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생명까지 다 바친 예수님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바로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주님께 예물로 다 바친 가난한 과부이다. 그래서 가난한 과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델이라고 말한 것이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 이 세상도 인간의 운명도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 또한 이 세상의 惡도 善도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이 모든 것을 증명하고 심판할 것이다. 즉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진 낡은 성전은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듯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즉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파괴되듯이 그렇게 피괴 될 것이다. 새로운 성전은 물질적인 것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루가 20,17)라고 말씀하셨던 십자가 위에 세워진 성전만이 남아 있을 것이며 승리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 제물에 또는 자기 자신 위에 성전을 짓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퉁이 돌 즉 십자가 위에 성전을 짓는 사람들이다. 십자가 위에 성전을 짓는 사람은 세상 종말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올 것인가에 대해서 굳이 궁금해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이미 승리가 보장된 삶을 살고 있고 또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된 하늘 나라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