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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3층천의 환상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2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바울이 셋째 하늘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옛번역에는 3층 천이라고 되어 있어요. 삼층천이라는 용어는 당시에 유대교회와 그리고 초기 기독교 사이에서 천국의 구조에 관한 상징적인 표현이에요. 실제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표현이 3층천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늘이 여러 층으로 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1층은 우리가 눈에 보는 하늘, 두 번째 층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먼 우주, 세 번째 층은 하나님이 계신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영역의 하늘을 3층천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셋째 하늘 삼층천을 낙원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어요. 4절 전반절을 영어로 보면 히워즈 어 인투 패러다임스 이렇게 돼 있어요. 사도 바울이 3층천을 경험했는데 그 3층천을 낙원이라 패러다이스라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른 성경에 보면 하늘들의 하늘로 돼 있어요. 하늘보다 더 높은 하늘이라고 이 3층 천을 표현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가만 보면 사도 바울이 막 노력하고 애써서 이 3층천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환상을 바울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말을 들었고, 사람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장면을 봤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웬일인지 그가 본 3층천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하지 않아요. 생각보다 아주 짧게 그리고 간단하게 그냥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해요. 왜냐하면 경험이 때로는 이 경험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말씀보다 앞서요.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는 것을 싫어했던 거예요. 그리고 그런 개인적인 경험이 우상시 되는 것도 싫어했고, 그것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방해되는 것도 싫어해서 3층천이란 놀라운 것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개 간략하고 간단하게 다루고 있는 것을 봅니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이 체험 그러니까 3층천에 대한 체험 때문에 자기가 교만해질까 봐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사울에게 고통을 준 것은 바울에게 고통을 준 것은 이 삼성전의 특별한 경험 때문에 그가 자오할까 봐 교만할까 봐 하나님이 그를 경계하시기 위해서 우리 말로 하면 단돌이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특별한 고난도 주셨어요.
여러분 우리가 특별한 경험을 너무 좋아할 필요는 없어요. 특별한 경험이 있다는 건 거의 대부분 특별한 고난도 같이 있더라고요. 신비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정말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신비한 경험을 너무 사모하고 강조하는 것도 굳이 나쁜 건 아니지만 굳이 그거 없어도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을 사모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항상 거기에 상응하는 권한이 같이 따라와요.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3층천에 대한 경험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이 교만해질까 봐 하나님께서 그에게 육체의 가시도 함께 주셨던 것입니다. 환상이 아니라 경험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육체의 가시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상층천의 경험 때문에 교만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고통스러워졌어요. 그러니까 교만해진 걸 막기 위해서 하나님이 고난을 주셔서 꼈기 때문에 이 경험이 오히려 자기의 삶에 더 큰 육체 같이 고난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의 대적들이 자랑했던 것과는 다른 범죄의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언급해야 된다는 약간 의무감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거짓 교사들이 거짓 선생들이 자꾸 자기들의 경험을 강조하고 내가 이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더 하나님이 택함을 받은 사도다 이렇게 강조했기 때문인 거예요.
사도바울은 경험은 있지만 이것을 강조하지 않았어요. 근데 너무 거짓 교사들이 그것을 강조하니까 자기도 한 번쯤은 자기의 사도직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할 필요성을 느꼈던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경험한 거는 완전히 다른 영역 아마 여러분과 저도 경험하지 못한 영역이죠.
이 영역에 대해서 정말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1절을 표준 새번역으로 보면
자랑함이 나에게는 이룰 것이 없으나 이미 말이 나왔으니 주님께서 보여주신 환상과 계시들을 말할까 합니다.
환상과 계시를 말하는 것이 유익이 없다는 거예요. 이미 말이 나왔기 때문에 자기가 할 뿐이라는 거예요. 바울의 입장에서 환상과 계시는 자랑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개념은 이런 거예요. 어떤 자격과 조건을 가져야 환상과 계시를 경험한다. 이게 바울의 주장이 아니에요. 거짓 교사들이 그걸 주장한 거예요.
내가 영적인 권위를 가졌기 때문에 내가 환상을 봤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근데 바울은 아니에요. 바울은 어떻게 생각하냐면 하나님께서 특별한 경험을 자기에게 허락하셨다 이렇게 접근해요. 자기가 특별하고 뛰어나서 영적인 권세를 가져서 경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에게 허락해 준 거예요. 허락해 주셔서 자기가 경험한 것이지 자기 어떤 조건을 갖춰서 이 신비스러운 것을 보게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예로 다메색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을 예를 듭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본 것은 어떻게 왜 봤을까요? 예수님이 나타난 거예요. 바울이 특별한 조건을 가져서 이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난 게 아니라 하나님 하나님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거예요.
바울은 환상이나 계시나 특별한 경험들을 이렇게 접근하는 거예요.
아마 여러분과 저도 그렇겠지만 우리는 대부분 내가 영적인 어떤 수준이 있어야 하나님의 계시를 보고 환상을 본다. 이 말이 100% 틀린 건 아니지만 바울의 입장은 완전히 생각이 달라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허락해 주셨다는 거죠. 자기의 사도직을 변호하기 위해서 필요한 거니까 바울이 초대교회를 섬기는 일에 필요한 거니까 바울이 확신을 갖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필요한 것이니까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지 바울이 다른 사람보다 능력이 뛰어나서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환상과 계시와는 좀 차이가 나죠. 우리는 대부분 어떤 조건을 가져야 기도를 많이 하고 막 영성이 뛰어나야 물론 개판으로 살면서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를 보이지 않을 수 있어요.
근데 사울의 경우는 또 달라요. 언제 때 하나님이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기독교인들을 잡아 잡으러 갔을 때 나타난 거잖아요. 그래서 바울은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나타나셨다. 자기의 계시를 보여주셨다.
이렇게 말합니다. 반면에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거짓 교사들이죠. 계시를 부었다고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죠. 자기들은 계시를 경험하기에 합당한 조건을 갖췄다는 거예요. 내가 특별한 경험을 한 것, 내가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췄기 때문에 경험을 한 것입니다라고 생각하고 그것들을 자랑하고 다녔고, 오히려 바울은 특별한 경험을 말하는 것을 더 조심스럽게 주의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그들의 태도에 대해서 바울은 오히려 자신의 자신이 3층천을 경험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자오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육체의 가시를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환성과 계시를 경험한 것이 오히려 자기에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은 반대파들로부터 자신의 사도직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3층천에 대한 경험을 말하긴 했지만 이것이 자랑이 되지 않기 위해서 3인칭 기법을 사용해요. 그리고 오늘 1절과 4절에서 이렇게 읽었잖아요. 이게 이제 3인칭 기법이 마침 자기가 아닌 것처럼 그렇게 표현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라 마침 자기가 아닌 것처럼 제3자인 것처럼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경험한 낙원에 대해서 언급하긴 하지만 최대한 자제하는 것은 첫 번째로 단지 이 사실이 자신의 사도직의 권위를 지키는 데만 사용되기를 바랐다는 거예요. 만약에 사도 바울의 특별한 경험이 우상시되거나 그것 때문에 마치 사도 바울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것처럼 사람으로 보여지고 그를 따르고 숭배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복음이 훼손될 것을 우려했던 거예요.
그래서 정말 간단하게 너무 바울의 반대파들이 바울의 사도직을 공격하니까 사도직을 변호하는 일에만 잠깐 사용하고 내려놓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은 바울이 낙원 삼층천에 대한 경험 때문에 자오할까 봐 가시를 주셨습니다. 이 말은 영적인 경험은 큰 유익이 있으나 잘못 사용되면 오히려 복음과 개인 신앙생활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큰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주 제한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특별한 경험이 어떤 경우에 도움이 되고 어떤 경우에 자신을 영적으로 위험하게 하는지 아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부득불 사용한 거죠. 부득불 자랑한 거예요. 어쩔 수 없이 한 거예요. 오히려 이것이 자기의 순교와 자기의 삶에 해가 되는, 실제로 이것 때문에 육체적 가시로 고통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경험은 자기의 해였다는 거예요. 그 때문에 하나님이 육체적인 가시를 주셔서 더 괴로움을 지금 겪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결코 자기가 이걸 말하는 건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말을 합니다.
영생의 최고봉은 뭘까요? 절제입니다. 절제하지 못한 은사는 교회의 해악이 되고 절제하지 못한 능력도 교회에 해악이 되고, 절제하지 못하는 특별한 경험도 교회에 해악이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은사나 특별한 경험이 교회를 보호하는 데 사용되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득보다 해가 많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개인적인 능력을 강조하거나 개인적인 경험을 강조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여주셨다는 것을 강조하여 그러니까 내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 아래 이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는 거죠.
다메색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가 34년 전에 3층 천을 경험한 것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지, 자기가 어떤 능력과 어떤 조건을 갖춰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여주신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그렇게 말하고 다녔던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것을 전혀 아니라고 소상하게 하나씩 밝히고 있습니다. 1절과 4절을 보면 바울의 어떤 마음이 느껴지냐 하면 교회를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져요. 자기의 경험조차도 혹 교회에 해가 될까 주의하고 조심하며 말해요. 얼마나 교회를 보호하고 싶은지에 대한 바울의 마음들이 성경 구절 구절에 다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울의 삶을 기뻐하셨던 거예요. 기뻐하니까 바울이 원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를 그에게 주권적으로 당신을 나타내기도 하고 보이시기도 하시고 신비한 것들을 경험하게 하셨던 겁니다. 개인적인 능력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향한 사랑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요.
누구보다 영혼을 사랑한 바울, 누구보다 교회를 아낀 바울, 누구보다 제자들을 사랑한 바울에게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했어요. 개인적으로 봤을 땐 이것으로 인해서 큰 고통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확신 위에 설 수 있을 거예요. 확신 위에 저도 몇 번의 그런 경험이 있었어요. 여러분 목사라고 항상 막 확신을 갖고 살지 못해요.
여러분이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사는지 보여질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아니에요. 저도 의심하고 저도 염려하고 저도 걱정하고 저도 막 후회하고 여러분이 하는 건 다 해요.
확실한 것은 그럼 가끔 하나님이 저에게 주권적으로 보여주시는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들이 저를 하나님 나라나 복음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 하긴 하더라고요. 원한다고 주시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간절히 뭔가 원할 때는 하나님은 주시지 않으셨고 오히려 오히려 교회에 필요할 때 항상 줬어요. 제가 지금까지 뭔가를 보고 경험했을 때는 대부분 교회에 필요할 때지 내 개인적으로 위로를 위해서 그가 받은 것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여져요. 바울도 똑같았어요. 바울이 조건을 갖춰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바울이 교회를 사랑하니까 그리고 그런 바울에게 이런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필요하다고 여기셔서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나타나셨고 바울에게 자기를 게시해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정말 참되게 교회를 사랑하면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셔요. 그리고 우리가 힘 있게 세상을 살도록 힘도 주시고 이런 거죠. 나를 사랑하면 힘은 자꾸 빠지고 교회를 사랑하면 자꾸 힘이 생겨요.
여러분 우리 다 힘이 빠져가시죠 어쩌면 나를 더 많이 사랑해 가는 마음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그냥 육체가 약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한번 곰곰히 돌아보십시오. 내가 왜 이렇게 자꾸 힘이 없을까? 육체적으로 나이가 50 60이 되고 70~80 돼서 힘이 빠지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교회에 대한 그 참 사랑들, 온전한 사랑들이 약해지고 또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 않게 보여지고 누가 봐도 좀 이상해지고 있어서 어쩌면 여러분과 제가 힘이 빠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참되게 하나님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권적으로 역사하셔서 당신의 능력과 당신의 나라를 보여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쪼록 여러분과 제가 교회를 많이 사랑해 사랑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주권적인 역사를 경험하는 축복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