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숲속작은책방(제1회)
― 연애소설 읽고 싶어지는 가을
사회/원고정리 : 백창화
참여 : 진영준, 김현숙, 신명순, 안기홍
산골 숲 속의 시간은 도시와 다르게 움직인다. 어떤 계절은 급한 걸음으로 바삐 다가오고, 또 어떤 계절은 늦도록 찾아오질 않아 애를 태우기도 한다. 예컨대 긴 겨울 지난 후의 봄, 이미 다른 곳은 꽃이 한창인데 깊은 산골에는 겨우내 내린 눈이 여전히 녹지 않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그런가 하면 가을은 빨리도 찾아와 아직 도심은 따가운 여름 햇살인데 이곳 숲 속엔 찬바람이 불고 푸르던 나뭇잎은 이르게 갈색으로 물들어 간다.
하늘이 유난히 높아지고, 산과 들은 노랗게 또 붉게 물들어 가는 요즘이면 우리들 마음도 함께 물들어 간다. 실내에 앉아 있기보다는 바깥으로 나가고 싶고, 먼 길 떠나고도 싶고, 무엇보다 이런 계절이면 그리운 사람들이 생각난다. 남아 있는 삶이 조금은 외롭게 느껴지고 내 안쓰러운 생애를 위로하기 위해 진한 사랑의 기억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한마디로 연애소설 읽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 온 것이다.
그래서 다 같이 읽을 책으로 연애소설 『가시리』를 골랐다.
사 회 : 김탁환 작가님은 숲속작은책방과 여러 번에 걸쳐 인연이 있는 분이죠. 무엇보다 지난해 작가님이 쓰신 소설 『살아야겠다』가 숲속작은책방이 선정한 올해의 소설상에 선정돼 책방에서 시상식과 함께 축하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는데요. 얼마 전 김탁환 작가님이 깜짝 선언을 하셨어요. 2년 전에 '선유'라는 이름으로 시중에 출간된 소설 『가시리』가 실은 작가님이 쓰신 작품이라고 발표했는데, 기존에 쓰던 소설과는 다른 결로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서 일부러 필명으로 내셨다고 하네요. 과연 어떤 작품일까 궁금한 마음에 이번 책을 『가시리』로 골라 보았습니다. 다들 어떠셨는지 궁금하네요.
신명순 :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전에도 김탁환 작가님 소설을 많이 읽어 왔는데 전작들보다 이 작품이 정말 좋았던 거 같아요. 그래서 책을 다 읽고 이어서 작가님이 최근에 펴낸 『대소설의 시대』까지 완독을 했습니다. 오랜만에 소설이 주는 재미에 흠뻑 빠질 수 있어서 좋았어요.
안기홍 : 일단 맨 처음 느낀 점은 이 책을 판소리나 뮤지컬, 마당극의 대본으로 하면 너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실제로 소리극으로 만들어져 공연을 올린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김탁환 작가님의 장점은 스토리텔링에 능하고 소설적인 구성을 잘 이끌어 간다는 점 같아요. 이 책도 그런 면에서 구성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김현숙 : 저는 이 책을 그냥 '소설'로서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연애'소설이라고 했을 때는 세 남녀 주인공의 설정이라든지 캐릭터 구성이 살짝 진부하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 여인과 그를 사랑하는 두 명의 남자가 있지요. 그런데 그 두 명의 남자가 절대 선과 절대 악으로 구분되어서 캐릭터가 좀 정형화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안기홍 : 아마 여기 등장하는 주인공 인물들이 완성형 인간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도 같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운명이 바뀌기보다는 무언가 정해진 운명대로 가는 듯한 느낌인데요. 어쩌면 그것은 삼별초라는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삼별초가 항쟁하며 제주까지 쫓겨 가 끝내는 패배하고 마는 역사적 사실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요.
진영준 : 저는 책을 모처럼 편안하고 재미나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김탁환 작가님의 장점이자 특징인 역사라는 소재를 남녀의 사랑과 잘 버무려서 굴곡 있게 표현한 점도 좋았고요. 그런데 우리가 연애소설에서 느끼고 싶었던 아기자기하고 감수성 넘치는 표현, 혹은 섬세한 떨림 같은 건 좀 부족했던 거 같아요.
사 회 : 아마도 이 작품을 처음부터 김탁환 작가 소설이다 하고 보았더라면 또 다른 느낌이었을 텐데 필명으로 출간하고, 게다가 사랑을 노래한 연애소설이라는 점이 강조되어 있어서 우리가 기대했던 바가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싶어요.
진영준 : 저는 주인공 아청이 배 위에서 노래를 할 때 과연 어떤 분위기, 어떤 느낌일까 마음속으로 계속 상상하면서 읽었어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뱃머리에 서서 아름다운 노래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그런 장면을 영상으로 보면 좋겠다 싶더군요.
김현숙 : 아청이라는 인물은 어떻게 보면 과거의 여성이라기보다는 요즘 시대 주체적인 여성상에 가까운 거 같아요. 사랑을 따라가기보다는 자기 노래와 자신의 삶이 더 소중한 여인이죠. 아청이 사랑한 건 남자가 아니라 자신의 삶이고 자기 노래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명순 : 고려시대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진 바가 없어서 작가의 고민이 컸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이 책에 인용된 고려가요들을 통해 남녀관계나 애정문제가 조선시대보다 자유로웠을 거라는 말들은 많이 들어왔죠. 여성의 지위도 조선시대보다 훨씬 평등하게 유지되었다고 들었는데 정작 우리한테 역사적 사실로 알려진 건 별로 없는 거 같아요.
사 회 : 고려가요는 정말 아름다운 시라는 생각이 들어요. "가시리"라는 노래는 현대에 와서 가요로도 불리어질 만큼 대중적인 사랑의 노래고 이런 사랑을 노래했던 당시 사람들의 자유로움, 애틋함 이런 게 느껴져서 좋아요. 이런 고려가요를 소재로 차용해서 사랑 이야기를 썼다는 게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안기홍 : 아청은 삼별초 배 위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제국의 군대를 위해서도 노래를 불렀습니다. 한편 생각하면 자기 노래가 저항군을 죽음으로 내모는 데 기여를 하는데 왜 노래 부르기를 멈추지 않았을까 궁금증이 일기도 하고요. 한편으로 생각하면 제국의 군대든 삼별초 저항군이든 그들이 모두 지배자 아래 고통 받는 민중이고, 아청은 결국 그들을 위해 노래한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김현숙 : 아청은 결국 자기 노래를 가장 사랑했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삶을 선택한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순수한 예술 그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일 수도 있어요.
신명순 : 이 소설은 김탁환 작가님의 다른 작품인 『대소설의 시대』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두 책을 연이어 읽었기 때문인지 거기에 등장하는 남녀 주인공들의 모습이 『가시리』 주인공들의 모습과 계속 겹쳐져 보였어요. 물론 같은 작가님 책이니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네요.
진영준 : 저는 개인적으로 주인공들의 이름을 굳이 왜 그렇게 설정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남네요. 이름이 있음에도 이름이 별로 중요하지 않고 끝까지 좌, 우, 남, 북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요. 좌와 우라는 이름은 이미 이름에서 그들 캐릭터를 너무 분명하게 상징하고 있어서 인물에 대한 상상력이 조금 떨어진 면이 있어요. 작가님의 의도가 궁금해요.
안기홍 : 이 소설을 펴내게 된 동기를 살펴보면 일단, 이 소설을 쓰던 중에 2014년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고 했어요. 그러자 이렇게 엄중한 시대에 연애소설을 쓰는 게 어떤 의미가 있겠나 싶어서 작가님은 소설에서 손을 놓고 세월호와 관련된 사회파 소설을 쓰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소설들을 연이어 펴낸 이후에, 어쩌면 부채의식이 조금 덜어진 상태에서 작가님은 이 작품을 다시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이미 세월호 이전의 김탁환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을 거란 생각을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각인된 기억은 작가님의 글쓰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아마도 『가시리』의 서사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신명순 : 맞아요. 책을 읽으면서 세월호가 계속 떠올랐어요. 삼별초가 뱃길을 따라 제주로 쫓겨 가는 그 과정은 인천에서 제주로 향했던 세월호의 여정과 고스란히 닮아 있지요. 지도에 실제로 팽목항이 나오기도 하고요.
진영준 : 아청으로 하여금 그 뱃머리에서 계속 노래를 부르게 한 건 어쩌면 우리 아이들에 대한 진혼곡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아이들뿐 아니라 고려시대부터 지금까지 역사를 통틀어 권력에 의해 억압받고 고통 받고 죽어갔던 모든 민중들에 대한 진혼곡이기도 하겠죠.
김현숙 : 결국 작가님은 연애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작가 내면에 사로잡힌 역사성과 사회성을 비껴갈 수 없었던 거네요. 그 점이 작가님의 훌륭한 점이겠지만, 동시에 정말 미친 사랑의 노래를 꿈꾸었던(웃음) 우리들의 마른 가슴을 적시기에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 사랑노래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 회 : 오늘 즐겁고 유익한 이야기들 나눠서 좋았어요. 김탁환 작가님 소설은 기본적으로 스토리가 탄탄하고 메시지가 있어서 읽고 나서 여운이 남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작품에서 채우지 못한 미친 사랑의 노래에 대한 갈증은 다른 연애소설에서 찾아보는 걸로 하지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
|
|
|
|
《문장웹진 2019년 10월호》
첫댓글 멋진 사진촬영은 책방지기 김병록 님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