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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 画像の部屋 스크랩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Henri de Toulouse-Lautrec
히피(陳宣惠) 추천 0 조회 14 10.04.04 09:39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파일:Photolautrec.jpg

 

 

앙리 드 툴르즈로트렉(Henri de Toulouse Lautrec,1864년 11월 24일 ~ 1901년 9월 9일)은 프랑스의 화가이다.

남부 프랑스 알비의 귀족 집안에서 출생한 그는 본래 허약한데다가 소년 시절에 다리를 다쳐서 불구자가 되었다. 그는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하고 그림에 몰두하였으며, 파리로 나가 미술 학교에 다녔다.

드가, 고흐와 친분을 맺어 그들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귀족 사회의 허위와 위선 등을 미워하였다. 주로 서커스 · 놀이터 · 운동경기 · 무용장 · 초상화 등을 즐겨 그렸으며 포스터를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인상파에 속하고 색채 취급, 성격 묘사에도 뛰어났다.

유화 외에 파스텔, 수채화, 석판에도 독특한 스타일로 만들었다.

대표 작품으로는 《물랑 드 라 가레트》, 《이베지루벨》 등이 있다.

 

 -위키백과-

 

 

 

 

 

 

입맞춤

당시 몽마르트 주변의 작은 바를 비롯한 카페 콩세르와 매음굴에서는 레즈비언들의 사랑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사랑을 나누는 레즈비언들의 자세에서 예술적 영감을 받은 로트렉은 여성의 동성애 경향에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침대에서 서로 얽혀 잠을 자는 두 여성을 보며 로트렉은 "최고다. 다른 어느 것도 이처럼 명료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로트렉은 부르주아의 도덕성에 충격을 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린, 당대의 가장 앞선 화가였다.

1893년 레즈비언들의 사랑을 담은 11점의 그림을 제작했다.

위의 그림을 제작할 당시 로트렉은 일 년 간을 물랭가의 한 매음굴에서 보내고 있었다. 이 매음굴에 대해 그는 "나는 그저 잠깐 그곳에 들르는 것은 싫다,"고 말했다. 도덕적 자유와 금기에 대한 경멸이라는 점에서 로트렉은 피카소의 정신적 선구자이다.

 

 

 

 

 

 

잔 아브릴

1890년 로트렉은 '라 멜리니트 (강력 폭약)'로 불리는 잔 아브릴과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아브릴은 유복한 이탈리아 이주민과 화류계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로 병약해 보일 정도로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엄청난 정력의 소유자로 멜리니트라는 화약과 같은 폭발력을 지닌 여성이었다. 아브릴은 젊은 시절 우연히 사귄 한 의과대학생의 도움으로 뷜리에 무도장의 관객들 앞에서 춤을 추었고, 스무 살에 물랭 루즈에 데뷔했다.
아브릴은 비평가들에게 '춤의 화신'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녀는 곧 로트렉의 가장 대표적인 모델 중 하나가 되었다. 로트렉은 그녀가 춤을 추는 모습 뿐만 아니라, 모피 목도리에 아름다운 외투를 걸치고 물랭 루즈로 들어서는 모습도 그렸다.

아브릴은 교양을 갖춘 여성이었으며, 시인인 폴 포르, 레옹 디에르,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 소설가인 조리 카를 위스망스 등과 교제를 하였다. 1896년 입센의 "페르귄트"를 무대로 올린 연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로트렉이 죽은 후 아브릴은 연극에 전념하다가 언론인이자 데생가인 모르스 비에와 결혼하여 화려한 부르주아의 삶을 향유했으나, 말년에는 비참한 가난 속에서 생을 마쳤다.

 

 

 

 

 

  

긴 의자에 앉은 여자 (나부습작) 1882년 캔버스 유채 46 x 55cm

1882년 한때 로트렉은 보나르의 문하에 들어가서 철저히 아카데믹한 교육을 받았는데, 그 무렵의 그의 화풍을 잘 전해 주는 작품의 하나이다. 긴 의자의 중심에 앉은 검정 스타킹의 나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밑으로 넣고, 오른손은 왼쪽 무릎에 놓고, 왼손의 인지는 가볍게 입에 대는 변화나 하얀 피부를 돋보이게 하는 검정 스타킹의 색 대비와 함께 포즈에서 약간 인위적인 느낌이 들고 습작적인 냄새가 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로트렉의 인물에 대한 관심과 수업기의 철저한 작품을볼 수 있다.

 

 

 

 

 

  

빨강머리의 화장하는여인 1896년 종이, 유채 54 x 64cm

상반신을 훌훌 벗어버린 채 등을 보이고 있는 여자, 그 아름다움이나 미모를 그리는 다른 작가와는 달리 등을 보이는 화폭에 꽉 찬 한 모델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을 생각게 한다. 로트렉이 여성을 모델로 한것 중에 1890년을 경계로 화가를 위해 포즈를 취한 평범한 초상 중심인데 반해, 후반엔 여성 특유의 사생활에서 얻은 특이한 포즈들이 중심을 이루는 대조를 보인다. 지극히 평범한 포즈이지만 드가를 연상케하는 대담한 구도가 보이지 않는 얼굴에서 긴 여운을 남긴다.

 

 

 

            

로트렉이 그린 로트렉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은 프로방스 귀족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난 행운을 맛보기도 전에 두 차례의 사고로 어린시절 두다리의 성장이 멈추어버리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아마도 귀족가문의 사촌이었던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근친 결혼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추정이 지배적이다.그의 키는 152cm에서 더 자라나지 않았다.

1872년 가족과함께 앙리는 파리에 정착한다. 그는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파리와 가족 소유지가 있던 랑그독에서 보낸다.아마추어 데생작가였던 아버지와 삼촌들을 따라 앙리는 일찍 그림에 눈을 뜬다. .
어린 앙리가 선호한 모델은, 사냥과 말 그리고 주변인물인 가족들이다.


1881년 바칼로레아(대학합격 자격시험)에 합격한 앙리는 1882년 아틀리에 보나에 들어가서 짧은기간 수학한다. 앙리는 이때사귄 젊은 예술가인 에밀 베르나르,빈센트반 고흐 등과 함께 조형적인 관점을 연구한다. 이 시기에 앙리는 아틀리에 동창생들 가족 전문 모델등을 대상으로 수많은 초상화를 그려낸다.

인간의 얼굴에 대한 앙리의열정은 대단한것이었다.작가는 임상의 처럼 날카롭게 심리를 분석한후 인문의 마음속에 숨은 비밀까지 포착하여 데생 회화 석판화등 다양한 기법으로 재현해 내었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을 특정 유파에 묶어넣기는 어렵다.

여러 유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이론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1890년까지 인상파의 영향을 받고 팔레트를 밝은 색으로 채우던 앙리는 드가의 영향을 받아 화면을 분할하고 주제 중심을 이동시키고며 주변적인 상황을 연상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풍경화에는 무관심했던 앙리는 도시생활 카바레와 공연 창녀촌을 주제로 작업한다.


1885년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한 거리 몽마르뜨에 정착해서 회화와 일러스트에 몰두한다.
몽마르뜨거리 공연 애호가들을 위한 싸구려잡지 <프랑스 소식>,조금나은잡지 <삽화가 있는 파리>, 브리앙이 발간한 잡지 <르 마들리통>등에앙리의 그림과 데생이 자주 실린다.

앙리는 1888년과 1890년 <브뤼셀 살롱>에 프랑스 작가로 초대받아 전시한다.

1890년에는 <앙데팡당전>에 쇠라 반 고흐 루소 등과함께 전시한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1891년 파리에 게제된 카바레 <무랭루즈>포스트이다.

앙리에게 카바레<무랑루즈>의 장식과 연예인들은 작품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었다.앙리는 상젤리에 거리의 소극장 카페인 <앙비싸되르>를 비롯 그가 카바레 스타를 명작의 주인공으로 만든 바로 그 카바레 <폴리베르제르>등 많은 카바레를 드나들었다.

창녀촌에도 대단한 애착을 보인 앙리는 창녀와 그 일상생활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알코올 중독과 무절제한 생활의 여파로 앙리는 성격파탄에 이르고, 1899년 마침내 뇌이이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폐쇄된 병동에서 앙리는 "내데생으로 자유를 산다"고 말하면서 기억을 통해 작업한다. 같은해 5월 퇴원한 후 먼 친척인 폴비오와 함께 르아브르르 크로투아 옹플뢰브 등을 여행하고, 1900년 겨울에는 보르도에 정착한다.

 

이듬해 9월 37세의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은 <비오제독>이란 제목을 붙인 미완의 초상화를 남기고 숨을 거둔다.

19세기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기존의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부정과 거부가 주를 이루었다.
회화에서도 마찬가지로 화가들은 숭고하고 고귀한 이미지 보다는 일상의 현실, 더 나아가 그 현실속의 야릇한 매력을 화폭에 옮기려했다. 밤의 산책자라 불리는 툴루즈 로트렉은 카폐와 대중 무도회 그리고 카바레등 속세에 대한 호기심을 즐겨표현했다. 매춘부서커스 단원의 천한 웃음뒤에 가려진 인간의 비애를 그린 그의 그림은 인간의 닫힌 마음을 열어주는 사랑의 메시지와 항상 아름다울 수만은 없는 현실을 그대로 자연스럽게 혹은 아이러니로 재현하고 있다.

 

 

 

 

 

 

 

 

  

 

 

 

 

 

 

 

 

 

 

 

 

 

 

 

 

 

 

 

 

 

 

 

[서정욱 미술토크] 물랑루즈의 난쟁이화가

 

툴루즈 로트렉

 

영화 '물랑루즈'입니다.
바즈루어만 감독 연출에 이완 맥그리거, 니콜 키드먼이 주연을 맡은 2001년 뮤지컬 영화입니다.
혹시 이 영화를 보셨다면 흥겨운 한 난쟁이를 기억하시나요?
툴루즈 로트렉 입니다.

물랑루즈를 다룬 영화는 지금까지 총 6편이 만들어졌습니다.
특히 자자 게이보(Zsa Zsa Gabor)가 부르는 노래로 유명한 1952년 존 휴스턴 감독 호세페러 주연의 물랑루즈를 보셔도 한 난쟁이 화가가 나옵니다.
바로 툴루즈 로트렉 입니다.

1889년 개장한 물랑루즈는 파리의 몽마르뜨에 있는 카바레입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한 빨간 풍차가 서 있는 에디트 피아프와 이브 몽땅이 처음 만난 곳.
프랭크 시나트라가 노래했던 곳… 빨간 풍차 물랑루즈.

과학이 발달해 타임머신을 타고 1890년쯤 그때의 몽마르뜨의 물랑루즈에 갈수 있다면 우리는 한쪽 귀퉁이에서 술을 마시며 열심히 그림에 몰두해 있는 한 난쟁이화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툴루즈 로트렉입니다.

툴루즈 로트렉은 물랑루즈의 지배인과 약속을 했습니다.
그림을 그려주는 조건으로 언제나 이곳에서 술을 먹기로…
몽마르뜨에서 그는 이미 유명합니다. 옷걸이나 커피포트 등으로 불리기도 하죠.

그의 그림에선 그저 그런 모습들 만이 아니라 그들의 속 이야기들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궁금해집니다.
툴루즈 로트렉에겐 사람들의 속마음들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는 걸까요?

12시 자정 문을 닫는 물랑루즈를 나와 툴루즈 로트렉은 다시 술을 마시러 갑니다.
정작 툴루즈 로트렉에겐 어떤 이야기가 있는 걸까요?

툴루즈 로트렉의 본명은 앙리 마리 레이몽드 툴루즈로트렉 몽파 입니다.
프랑스 귀족 중에서도 매우 유서 깊은 귀족이란 뜻이지요. 그 귀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툴루즈 로트렉의 부모님은 친사촌간 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근친혼의 불행한 결과였는지 툴루즈 로트렉 은 어려서부터 매우 허약한 체질이었습니다.

14세에 사고로 다리를 다친 후 그의 다리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습니다. 툴루즈 로트렉은 다리가 불편해진 이후로는 더욱 더 그림에 심취하게 됩니다. 결국 스물두살이 되던 해 툴루즈 로트렉은 집을 떠나 몽마르뜨로 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술을 마십니다. 기이한 그의 모습과 행동 때문에 그를 환락가의 퇴폐화가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툴루즈 로트렉은 그런 것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림 하나로 결국 몽마르뜨의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게 합니다. 그는 어떤 경향이나 사조도 따르지 않았으며 독자적인 자신의 그림을 그렸고 현대 디자인 포스터의 시작이 되며 후에 근대 소묘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의 열정이 이제 다 소진 되었던 걸까요? 서른 다섯살이 되던 해 10월 툴루즈 로트렉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정신이상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요양하던 중 37세의 젊은 나이로 아쉽게도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죽은 후 큰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그의 어머니는 남겨진 아들의 작품을 전부 챙겨 로트렉의 고향인 알비시에 기증하였고, 1922년 알비시엔 로트렉미술관이 개관됩니다.

 

 

Aristide Bruant dans son Cabaret, 1893, Colored lithograph, San Diego Museum of Art, USA/

사진제공=서정욱

 

 

At the Moulin Rouge, The Clowness Cha-U-Kao, 1895, Oil on canvas, Musee d_Orsay, Paris, France/사진제공=서정욱

 

 

 

In Bed, The Kiss, 1892, Thinned oil on cardboard/사진제공=서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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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4.04 15:33

    첫댓글 일요 겔러리..
    인생의 빛깔로 스민 생각속으로....
    커피향은 더욱 코 끝에 가까워지고...
    히피여사님~~, 행복한 하루~~~~~~~,

  • 10.04.04 12:38

    감사합니다..^^*

  • 10.04.04 20:17

    감상 잘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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