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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영조어진(부분·보물 제932호).
<호산청일기>는 영조의 탄생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그는 손자 정조와 함께 18세기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새벽 5시에 숙의 최 씨가 남자 아기씨를 생산했습니다. 아기씨가 젖을 토하고 숨이 막히는 증세가 심해 걱정이 적지 않습니다. 부득이 우황과 대나무 태운 즙을 젖꼭지에 발라 삼키게 하니 진정되었습니다."
조선 임금 가운데 가장 모범적인 군주로 꼽히는 영조는 숙종 20년(1694) 9월 13일 이렇게 세상에 태어났다. 그는 52년이나 왕위에 있으면서 탕평책으로 정국의 안정을 꾀했고 또한 사회, 경제, 문화 각 방면에 걸쳐 중흥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 그의 시작은 미약했다. 영조의 어머니 숙의 최 씨(후일 숙빈 최 씨·1670~1718)는 궁중에서 가장 천한 무수리 출신이었다. 최 씨는 어릴 적 부모를 여의고 일곱 살 남짓한 어린 나이에 대궐로 들어왔다. 그녀는 숙종에게 승은을 입기까지 15년 동안 궐내에서 온갖 허드렛 일을 도맡아 하면서 어렵게 살았다.
영조는 왕자 시절 어머니를 찾아 "침방에 계실 때 무슨 일이 제일 어렵더이까"라고 여쭈었다. 그러자 "중누비, 오목누비, 납작누비 다 어렵지만 세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더이다"고 최 씨가 대답했다. 영조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영조는 어머니 말을 듣고 난 후 평생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
영조가 노론의 지원으로 어렵게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어머니의 출신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모가 미천해 영조는 숙종의 후궁이던 영빈 김 씨의 양자가 되어야만 했다. 영빈 김 씨는 노론의 유력 인사였던 김창집(1648~1722)의 5촌 조카였는데 이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노론이 영조의 편에 서게 되었다.
500년간 지속된 조선왕조에서 왕실의 출산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대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고 나라를 통치하는 일이 원자에게 달려 있어 어느 대를 막론하고 훌륭한 왕자의 탄생은 왕실과 왕실주위 신료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조선은 국왕의 혼인을 비롯해 세자 책봉, 왕실의 장례, 궁궐 건축 등에 이르기까지 국가나 왕실의 중요한 행사를 실록이나 일기, 등록, 의궤 등으로 제작한 '기록물의 왕국' 조선은 왕자의 탄생 과정도 세세히 기록했다. 왕비나 빈궁은 산실청, 후궁은 호산청을 설치해 출산을 도왔는데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시간 단위로 일기에 담았다.
후궁의 출산을 기록한 책이 <호산청일기>이다. 현전하는 <호산청일기>는 숙빈 최 씨의 세 아들 출산 과정을 서술한 <호산청일기>, 고종의 후궁인 귀인 엄 씨가 영친왕을 낳는 과정을 쓴 <정유년 호산청 소일기>가 있다.
창덕궁에서 탄생한 영조는 숙종의 넷째 아들이다. 셋째 아들도 숙빈 최 씨가 낳았지만 얼마 살지 못하고 사망했다. 출생한 영조도 처음에는 젖을 소화시키지 못해 계속 토하고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해 위태로웠다.
영조마저 잘못되는 것 아닌가 해서 모든 사람들이 크게 가슴을 졸였다. 의관 김유현을 불러 우황 등을 처방하자 천만다행으로 영조의 상태가 안정을 되찾아 젖을 잘 빨고 잠도 평안하게 잤다.
사진2. 국보 제325호 <기사계첩>에 들어있는 김창집 초상.
김창집은 경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영조는 생모가 미천해 영빈 김 씨의 양자가 됐는데, 영빈 김 씨는 당시 노론 핵심인사 김창집의 조카였다. 영조가 노론의 지원을 받게 된 이유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최 씨는 영조를 낳고 난 뒤에도 건강했다. 하루에 화반곽탕을 일곱 번씩 꼬박꼬박 잘 챙겨먹었다. 화반곽탕은 해물을 넣어 끓인 미역국에 밥을 만 음식이다. 출산한 지 사흘째 되는 9월 15일 길시를 택해 산모가 처음으로 목욕을 했다.
최 씨는 쑥탕에 몸을 씻었고 아기씨는 매화나무뿌리, 복숭아나무뿌리, 오얏나무뿌리, 호두를 달인 물에 돼지 쓸개를 타서 목욕시켰다. 목욕하는 날 태를 씻는 세태식도 행해졌다.
태는 길한 방향에서 물을 길어와 100번 씻은 뒤 술로 다시 세척해 백자 항아리에 넣어 밀봉했다. 항아리 전면에 '강희 33년 9월 13일에 숙의 최 씨 방에서 해산한 남자아기씨 태'라고 썼다.
"9월 18일 영조가 눈을 떠 곁눈질을 했다"고 <호산청일기>는 적고 있다. 신생아의 안녕과 복을 비는 행사인 권초제(捲草祭)는 이렛날 되는 19일 진시(오전 7~9시)로 정해졌다.
산실문 밖에 큰 상을 차려 그 위에 쌀과 비단, 은을 올려놓고 권초제를 주관하는 권초관이 절을 했다. 권초관은 마지막으로 해산할 때 깔았던 거적을 걷어 붉은 보자기에 싸서 권초각에 옮겨 보관했다.
천한 궁녀의 몸에서 태어나 왕세제가 되고 이복형 경종이 급서하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르는 행운을 거머쥔 영조는 생모 숙빈 최 씨에 대한 애틋함이 남달랐다. 영조는 일흔이 되던 해 이 <호산청일기>를 직접 열람한다.
그는 자신이 탄생했던 정황이 기술된 일기를 보면서 감동했다. 영조는 "아! 칠순이 되는 9월에 우연히 일기를 얻어 보게 되었다. 육상궁(숙빈 최 씨의 사당)에 가서 배알하고 돌아오니 마음이 무척 새롭구나"라고 감회에 젖었다. 영조는 이후에도 몇 차례 더 일기를 찾아서 보았다.
<호산청일기>에서 서술된 것처럼 왕자가 태어나면 이레 동안 산모와 신생아의 목욕, 세태, 권초 등의 중요 행사가 이뤄진다. 이 기간이 산모와 신생아에게 가장 위험한 시기다. 이 시기가 지나면 비교적 안심할 수 있다. 호산청도 이레가 지나면 해체됐다.
사진3. 청와대옆 궁정동에 위치한 육상궁(사적 제149호).
영조의 생모 숙빈 최 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 원년(1724)에 세워졌다. 사진 문화재청
조선 26대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 영친왕 이은은 광무 원년(1897) 9월 25일에 태어났다. 상궁 엄 씨가 경운궁의 숙옹재에서 영친왕을 생산했다고 <정유년 호산청 소일기>는 전한다. 상궁 엄 씨는 고종 22년(1885)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 씨가 살해된 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의 시중을 들다가 영친왕을 임신했다.
그때 엄 씨의 나이는 서른둘이었다. 엄 씨는 여덟 살 때 궁궐로 들어왔으며,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과 반란군을 피해 달아나 잠시 실종된 사이 고종을 지극정성으로 보필해 지밀상궁이 됐다.
엄 씨는 고종의 승은을 입은 후 명성황후에게 발각돼 궁궐에서 쫓겨났다. 같은 해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자 고종은 엄씨를 다시 궁궐로 불러들였다.
영친왕이 태어난 다음 날 일기를 살펴보면 "엄 씨는 분만한 뒤 평안하여 화반곽탕을 세 번 들었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씨도 젖을 잘 빨고 대변을 보았으며 숨도 잘 쉬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고종은 평소 총애하던 엄 씨가 아들까지 낳자 너무나 기쁜 나머지 출산 사흘째 되는 날 정5품 상궁에서 무려 7단계나 품계를 높여 종1품 귀인에 임명하는 파격을 단행한다. 귀인은 왕비와 빈 다음으로 높은 내명부 세 번째 품계다.
산모와 신생아의 목욕, 세태, 권초 등의 중요 행사는 전례와 동일하게 진행됐다. 이후 엄 씨는 순빈, 순비로 차례로 품계가 높아졌고 나중에는 귀비에 봉해졌다. 엄 귀비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영친왕을 가져서 그런지 아들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다.
고종 39년(1899) 서울 성북구 돈암동 흥천사에 막대한 돈을 시주해 극락보전과 독성각을 중창하고 아들의 만복을 비는 원찰로 삼았다. 배한철기자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7.무수리의 자식, 탕평의 화신이 되다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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