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습 – 제38차 파식망상필부득(叵息妄想必不得 )
망상분별 쉬잖으면 절대 결코 얻지 못해
파식 : 어렵사리 쉬다, 불가하다..
망상 : 망상분별을
필 : 반드시, 필히, 절대
부득 : 얻지 못한다.
망상을 쉬지 않으면 불가하다.
“망상분별을 쉬잖으면 절대 결코 얻지 못해”
-> 시고행자환본제의 당연한 귀결이다.
수행자가 돌아가는 근본자리는 무엇을 쌓고 더하여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지우고 지워서 이룩된다.
본래 진여불성으로 돌아가려면 파식망상필부득이다.
망상을 그만 두지 않으면 반드시 얻을 수 없다.
‘망상을 그만 두지 않으면’ 이 말은 뭘까?
청정하지 않으면.. => 파식망상을 쉬지 않으면.. 이 말이다.
청정이 안되면 반드시 본제로 못 돌아간다.
불교의 지혜는 뭐라 했나!
고정관념을 깨는거, 뭐 얻는거 아니다.
다 버릴 때, 우리 고정관념을 다 버려야 해!
바로 ‘파식망상’이다.
그러니 청정이 안 되면 절대 안된단 말이다.
주리반특가가 탐욕을 지우고, 분노를 지우고, 우치를 지워서 아라한이 되었듯이..
선종의 제 3조 승찬은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취사 분별만 멀리 하면 된다” (至道無難, 唯嫌揀擇)고 가르친다.
분별망상을 혐오한다는 말은 분별망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지.
오직 그것 뿐이란 말이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불교의 깨달음은 만들어서 이룩되는 아니다. 지우고 씻어서 만난다는 점, 초기불교 이후 현대 한국불교의 간화선 수행에 이르기까지 일관하는 모든 불교수행의 공통점이다.
수행의 방법이 몇가지인가?
수행, 여태까지 그거하고 있는거 아닌가?
고정관념, 탐진치 제거되는 수행방법 많다.
수행방법이 자기한테 어떤게 맞나!
그리고 뭐 하자고 하나!
그러니까 뭐 하려고?
깨달으려고 한다.
깨달음이 뭐냐? 지금 계속 이거 하잖아!!
뭐 다른거 없다.
뭘 하는지도 모르고 수행을 하고 있으니까...
이제 법성게가 다 끝나고 있는데, 지금까지 내가 똑 같은 말 하고 있다.
끊임없이 이야기 해도 그게 안들어가나? 머릿속에!!
우리 중생의 업력이 대단한 거다.
그렇지! 보면 볼수록 대단하다.
이제 중생이 뭔가도 알지!, 부처가 뭔가도 알겠고.. 나도 그리 되겠다는 거다.
그리 되려고 노력해야 되는거다.
그 방법을 이야기 해 주는게 불교다.
수행방법이 아까도 말했듯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수행방법중에서 최고가 없는 줄 알았다.
이제 최고가 없다. 내가 하는 수행이 뭘 가리키고 있는가?
분명히 알면 된다.
그걸 보려고 노력해야지!
화살표라 했다.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내가 돌려야 된다.
망상에서 벗어나면 모든 법의 진실성을 알게 되고, 있다거나, 없다고 하는 망상분별에서 떠나는 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이다.
불교 바깥의 종교에서는 ‘깨달음’이나 ‘해탈’을 그렇게 정의하지 않는다.
예를들면,
고대 바라문교의 성전인 <우빠니샤드>에서 ‘범아일여’에 대한 자각을 해탈이라 본다. 우주의 주재자인 브라만이 견문각지와 행주좌와의 구심점인 아뜨만(아)과 일치한다는 자각을 해탈이라고 가르친다.
이는 망상을 버려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아뜨만’을 발견하고 브라만을 발견한 후 양자의 일체성을 체험함으로써 얻어진다.
바라문교 육파철학 가운에 하나인 샹카 사상에서는 궁극적 자아인 뿌루샤의 독존 체험을 해탈이라 주장한다.
이는 망상을 제거함으로써 체득되는 불교의 깨달음과 그 방식이 전혀 다르다.
순수주관인 뿌루샤와 객관인 쁘라끄리띠라는 근본 원리가 만난후 쁘라끄리띠에 변화가 일어나 세상만사가 출현했다는
전별설에 근거하여 삼매에 들어가 뿌루샤의 독존을 직관함으로써 해탈한다.
자아인 뿌루샤의 발견이 수행의 최종목표인 것이다.
사문의 종교 중 하나로 현재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자이나교에서는 고행을 통해서 궁극적 자아인 지와(Jiva)를
업의 물질에서 해방하는 것을 종교적 목표로 삼는다. (순수영혼을 표주박에 비유하여 설명한 내용 참조하시라!)
그러나 불교 수행자는 그저 번뇌만 제거할 뿐이다.
‘파식망상필부득’이라고 노래하듯이 ‘망상만 쉴뿐’이다.
초기불교의 사성제에서 가르치듯이 집기(集起)하는 번뇌를 도(道)의 수행을 통해 제거하여 고(苦)를 멸(滅)한다.
망상을 쉬고, 간택을 멀리하고, 번뇌를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의 열반에 이를 수 없다.
파식망상필부득이다.
다시 생각하면,
망상을 쉰다는 것은 자아와 법에 대한 집착을 제거한다는 의미다.
아공,법공을 체득하는 일이 망상을 쉬는 것이다.
일불승인 화엄교에서는 초발심의 순간에 모든 망상을 제거하여 근본 자리로 돌아간다.
망상을 제거하지 않으면 근본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파식망상필부득이다.
- 무연선교착여의 (無緣善巧捉如意)
조건없는 선교방편 여의주를 손에 넣어
시고행자환본제 파식망상필부득 무연선교착여의 귀가수분즉자량 “그러므로 수행자가 본래 자리 돌아갈 때, 망상분별
쉬쟎으면 절대 결코 얻지 못해, 조건 없는 선교방편 여의주를 손에 넣어 귀가할 때 분수 따라 자량으로 삼는다네”
의상은 이 네 구절이 ‘수행의 방편을 밝힌 것(明 修行方便)’이라고 적고 있다.
보살도의 길을 돌고 돌아 이제 수행의 종착점에 이른 수행자는 선교방편을 써서 중생을 돕는 이타행을 시현한다.
그리고 이 이타행의 공덕은 성불을 위한 자량이 된다. (본제)
이타행의 선교방편은 바로 무연(無緣)의 것이다.
조건없는 선교방편 여의주를 손에 넣어 이타행을 시현하는 것이다.
보살이 7지에 오르면 20가지 법에 집착하지 않게 되며, 20가지 법을 완전히 구족하게 된다.
이중 5째가 ‘일체중생에 대해 자비의 지혜를 구족하는 것’으로 무연의 대비로 중생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야 모든 중생을 마치 자신의 아들처럼 생각할 수 있다.
이를 무연대비라부른다. 차별없는 선교방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비로자나 부처님께서 차별없이 내어주는 선교방편의 가르침을 잘 포착해야 한다. ‘무연선교착여의’다.
- 귀가수분득자량 (歸家隨分得資糧)
귀가할 때 분수 따라 자량으로 삼는다네에서
'귀가'에서 수행자가 돌아갈 집(家)은 '모든 법의 본질인 진공(眞空)'을 비유한다.
따라서 귀가한다는 것은, 모든 법의 본질인 진공을 자각한다는 의미다.
진공이나 법성이나 참된 근원 모두 의미는 같다.
법성은 모든 법의 공통점인 공성이며 공성은 모든 법의 참된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수행자가 진공의 집, 법성의 집, 참된 근원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준비하는
자량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근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분수가 다르다고 표현했다. 성문,연각,보살은 그 분수가 다르기에
하는 가득 내리는 빗방울 같은 선교방편의 여의주를, 각각 자기 분수에 맞게 받아서 성불의 자량으로 삼는다.
자량은 문자 그대로 자구(資具)와 양식(糧食)을 의미한다.
즉, 재물이나 식량이 우리의 삶을 뒷받침하듯이, 깨달음을 지향하는 보살에게도 자량이 필요하다.
화엄경 <이세간품>에 실린 2천가지 답변이 보살행의 자량이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보리심, 선지시, 선근, 육바라밀,...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 가르침을 주시는 여래 등에 의지하는 것이
자량이 되며,... 부처님의 대반열반을 목도함으로써 제행무상을 자각하고, 일체 유위법이 편안한 것이
아님을 자각하며, 반열반이 가장 편안한 것임을 자각하고, 반열반은 생멸에서 벗어난 것임을 자각하는
덕목들이 자량이 된다.
보살은 이런 류의 2천 가지 덕목들을 자량으로 삼아서 진공이며, 법성이며, 참된근원인 성불의 집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귀가수분득자량이다.
분에 따라서 보살의 지위가 다르듯....
**중론의 불과 연료에 대한 분석은 앞에서 몇번씩 언급한 것이라 설명 생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