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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56
ㅡ 백제 전성기, 근초고왕 2 ㅡ
('일본서기' 기록과 관련)
[近肖古王 比流王第二子也 體貌奇偉 有遠識
근초고왕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체격이 크고 용모가 기이하였으며, 식견이 넓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근초고왕조 첫 문장이다.
근초고왕은 백제 제13대 군주 이자 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346년에 즉위해 375년에 사망했다. 백제 최전성기를 이끈 정복왕으로 평가받는다.
백제 최전성기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신라 '진흥왕'과 비견될 만하지만 광개토대왕은 18세에 즉위하자 마자 백제 10성을 점령하는등 치세를 전쟁과 정복으로 보낸 진정한 정복군주이다.
신라 진흥왕도 10대 후반~20대 나이 때 영토를 즉위 시점 2배~3배로 확장시켰다.
하지만 근초고왕은 약 20년 동안이나 힘을 축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재위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복에 나섰다는 점이 다르다. 그래서 근초고왕에 대한 역사기록에 공통적으로 <식견이 넓었다> 라는 말이 나온다. 이 이야기는 근초고왕은 약 20년 동안이나 힘을 비축하며 가만히 기다리다가 치밀한 국제정세 분석과 조정을 통해 넓은 식견의 최소한 전력 소모로 단번에 패권을 휘어잡았다 는 것을 의미한다. 위 내용으로 보면 근초고왕은 대단히 치밀하고 경제적 성격의 군주가 아니였을까 한다.
특이한 것은 근초고왕에 관한 삼국사기 기록은 재위 2년부터 21년 사이 기록이 하나도 없다. 때문에 그가 그동안 나라를 어떤 식견으로 다스렸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근초고왕 시절에 대한 기록은 오히려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 더 많이 남아있다.
이쯤에서 삼국시대 고대사에 대해 상당한 기록이 남아있는 일본측 역사서 '일본서기'에 대해서 알고가야 앞으로 이야기가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일본 역사서 중 가장 오래된 정사이다. 후대작인 '속일본기' 기록에 따르면 '일본서기'는 도네리 친왕이 덴무천황 명을 받아 편찬하기 시작하여 720년(요로 4년)에 완성한 역사서이다. 대체로 중국식 한문체로 쓰였는 데, 일본식이 가미된 문체로 쓰인 부분도 있다.
'일본서기'에는 제15대 '오진천황' 모후로 섭정이었던 '진구황후'
('신공황후'와 동일인물)대 기록 부터 제29대 '긴메이천황' 까지 기록들에는 '백제삼서'라 불리는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가 상당수 인용되어 있다. 그래서 백제 근초고왕 시절 '아직기' 나 '왕인', 백제 성왕과 관련된 기록등이나 '가야연맹'과 관련된 기록은 '한국사서'보다 '일본서기' 에 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일본서기' 531년 기록 에는 일본 국내기록임에도 불구 하고 '백제본기'를 인용하고 있다.
'일본서기'는 그 당시 백제기록인 '백제본기'(百濟本記)를 인용해 "일본의 천황과 태자, 황자가 한꺼번에 죽었다.(日本天皇及太子皇子 倶崩薨)"고 기록 하였다.
일본이 한자를 본격적으로 수용 하기 시작한 시점이 5-6세기 이므로, 일본은 그 이전에 문자가 없었다. 그래서 그 전 기록은 구전에 기초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로 문자가 생기기 이전 사건을 기록한 내용은 구전을 기초로 했으며, 그런 기록들은 역사라고 부르기에 어렵다. 역사는 문자가 있어야 성립한다. 그러므로 4-6세기 이전 기록으로 갈수록 신화나 전설이라고 부를 정도로 기괴한 내용이 많으며, 일본 국내기록이 많지 않으므로 백제기록을 대거 인용했던 것이다.
'일본서기'는 비록 8세기 당시 역사책이지만, 초기기록이
신화에 기대었거니와 편찬 목적 중 하나가 선대 황실권위를 알리고 칭송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많은 과장과 조작이 들어갔다. 사실 객관적 실증주의가 부족했던 전근대 다른 역사기록들도 왜곡 이나 과장, 신화적 수사가 많이 들어가지만 '일본서기'처럼 기본적인 서사구조마저 의도적 으로 짜맞추는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일본서기'를 편찬한 8세기 당시 일본은 한반도 통일신라와 점점 관계가 불편해지고 있었다. 신라와 일본은 서로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던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당시 신라는 삼국통일전쟁으로 생긴 후유증 수습을 끝낸 뒤
'나당전쟁' 이후 사이가 멀어졌던 당나라와 화해하였다. 반면 일본과는 관계가 악화되는 정황이 이 시기 부터 많이 등장한다.
'일본서기'와 같이 자국 황실 권위를 무작정 높이기 위해 타국 을 무조건 낮추거나 사신파견을 무조건 조공으로 보는 주관적인 시각은 중국사서에서도 볼 수 있으며, '일본서기' 또한 순한문체로 중국계 인물이 최종적인 윤문과정에서 깊이 개입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최근에 제기된 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황실이 삼국보다 훨씬 오래됐음을 주장하기 위해 '이주갑인상'(주로 역사적 으로 장수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 여기서 이주갑은 120년을 의미하며, 사람이 두 번의 60년 주기인 "갑자"를 채워 120세 이상 살았다는 뜻)으로 계보를 끌어올리거나, 실제로 있었던 전쟁 및 외교 활동이라도 그 주체를 일본이 주도했다는 식으로 일본에 유리하게 바꿔 적었으며, 한반도 왕조는 일본 신하라는 식으로 변조했다는 의심 (주체변조론)등 여러 가지 논쟁이 있다. 따라서 '일본서기'에 실린 내용은 '중국사서'와 마찬가지로 묘사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동시대 사료나 고고학적 근거로 교차검증하여 비판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간단히 말하면 백제와 관련 '일본서기' 해당 기록에서 '일본이 했다'는 부분을 '백제가 했다'로 주체를 교체하면 아귀가 맞는 내용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일본서기에 나온 '임나일본부' 기록은 백제 근초고왕과 깊은 관련이 있다.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 平定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 七國 仍移兵 西廻至古奚津 屠南蠻忱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時比利辟中布彌支半古四邑 自然降服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몰아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침미다례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 벽중, 포미, 지반, 고사의 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ㅡ '일본서기' 진구황후 49년
3월 ㅡ
이 부분은 사실 '일본서기'에서 '진구황후' 업적으로 쓰여 있는 것으로, 특히 '5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는 기록은 그동안 줄곧 일본측 '임나일본부설'의 주요 근거가 되어왔다.
그런데 근래 <천관우를 시작으로 이도학, 이희진, 김현구 등 한국측 사학자>들의 분석에 의해 이 정벌의 주도권자를 '근초고왕' 으로 보는 '주체교체론'이 크게 대두되어 신빙성을 얻었다. 즉 '근초고왕' 업적이 '진구황후'의 업적으로 바꿔치기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야마토보다 북쪽에 있는 '침미다례'가 '남만(南蠻)', 즉 남쪽의 오랑캐라고 적혀 있다는 것도 의심을 사고있다
또한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369년, 근초고왕은 드디어 행동에 나선다. 사백, 개로가 백제 측 대표가 되어 탁순국에 이르고, 여기에 장군 목라근자·사사노궤가 군사를 이끌고 따라갔다. 이러한 일연의 사건이 '일본서기'의 과장된 표현에 따르면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신라와 더불어 가야 지방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7개국을 모아 실질적으로 백제 중심의 패권을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만들어진 중국의 '양직공도'
(중국 남조 시대 역사적 문서이자 그림으로, 당시 외국 사신들의 모습을 기록한 중요한 자료)
에도 가야의 소국들이 백제의 부용국이라는 기록이 있다.
훗날 백제 성왕은 이를 두고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들과 부형자제 (父兄子弟) 관계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때 일본측 대표로는 아라타노 와케와 가가노 와케가 참석했다고 한다.
'일본서기'에서는 자국중심주의 기록 특성상 이 당시 백제가 왜를 섬긴 것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근대에 발견된 '칠지도'에 적힌 문장을 보더라도 반대로 백제 왕이 천황을 아랫 사람 취급하고 있다.
'칠지도'는 글씨 몇 자가 훼손 되었기에 이를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 학계 간 의견차가 있다.
일본학계는 보통 4세기 중엽, 백제 근초고왕으로추정되는 인물이 일본에 바쳤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학계 대다수 연구자는 칠지도를 만들어 왜왕에게 하사한 백제 왕이 근초고왕 일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간지(干支)가 딱 맞아떨어지는 전지왕(腆支王) 4년(408)이라든가 동성왕(東城王) 2년(480)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 연구 결과도 있다.
다만 어느 쪽이든 당시 백제와 왜가 상당히 우호적 관계였음은 맞아보인다.
'칠지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일본서기' 기록은 아래와 같다.
[52년 가을 9월 정묘삭 병자(10일)에 구저(久氐) 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彥)을 따라왔다. 이때에 칠지도(七枝刀) 한 자루와 칠자경(七子鏡) 한 개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신국(臣國)의 서쪽에 강이 있는데, 그 수원은 곡나철산(谷那鐵山) 입니다. 너무 멀어서 7일 동안 가도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 물을 마시다가 문득 그 산의 철을 얻으니 영원토록 성조(聖朝)에 바치고자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五十二年秋九月丁卯朔丙子、久氐等從千熊長彥詣之、則獻七枝刀一口・七子鏡一面・及種種重寶、仍啓曰「臣國以西有水、源出自谷那鐵山、其邈七日行之不及、當飮是水、便取是山鐵、以永奉聖朝]
ㅡ 일본서기 진구황후조 섭정 52년 ㅡ
그러나 '칠지도'에 직접 명문으로 적혀진 내용은 전혀 다르다. '칠지도'에 직접 적힌 기록이 훨씬 더 정확한 사실일 것이다. 일본서기 내용대로 백제가 왜에 조공을 받치면서 백제왕이 '칠지도'를 하사한다는 내용을 칠지도에 직접명문으로 박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않기 때문이다.
그럼 '칠지도'에 직접 박힌 명문을 살펴보자.
명문은 한쪽 면에서 34자, 다른 쪽 면에서 27자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명문 외곽으로는 금선(金線)이 상감기법으로 가늘게 둘러쳐져 있다. 명문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34자가 새겨진 곳을 보통 표면(表面) 또는 앞면이라 부르고, 27자가 새겨진 곳을 이면(裏面) 혹은 뒷면이라 부른다.
명문이 분명하지 못한 곳이 적지 않아서 판독된 글자는 연구 시점과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상당수의 학자들이 꾸준히 연구한 덕분에 근래에는 꽤 많은 부분에서 의견일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앞면〉 泰△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出(生)辟百兵宜供供侯王△△△△祥(作)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이를 우리말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앞면〉 태△ 4년 5월 16일은 병오인데, 이 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만하다. △△△△가 만들었다.
〈뒷면〉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이처럼 일본서기 내용과는 전혀 달라 '일본서기' 신뢰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때문에 가상 인물인 '진구황후'가 '근초고왕' 업적을 낚아챈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것처럼, 실제로는 '칠지도'도 '일본서기' 내용과 정반대로 '근초고왕'이 야마토에 우위를 과시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백제와 왜 관계를 떠나서, 1990년대부터 근초고왕의 남방 원정기록 자체가 6세기 백제 정치 질서를 정당화시키는 수단으로서 후대에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이미 제시되었고(연민수 등), 2009년 홍성화와 2010년 조경철 등에 의해 칠지도 연대가 근초고왕 사망 이후인 408년 아니냐는 설도 제시되는 등 모든게 추정의 영역이라 정설이라 할만한 것이 없다.
애초에 '일본서기' 신공 49년조와 그 전후 기사들의 신뢰도부터가 많이 의심을 받기 때문에 더 그렇다.
다음 편 근초고왕 업적으로 '백제 규슈진출설' 역시 임나일본부 설과 반대로 역사적 사실로 취급하기엔 근거가 많이 약한 가설의 영역이다.
다만 4세기 후반에 백제계 호(壺)
(고대 한국에서 사용된 특정한 용도로, 주로 고기나 식품을 저장 하는 금속 그릇 또는 용기)가
출토되는 등 일본 북부규슈 일부 호족과 백제가 교섭한 흔적은 있어 교류 정도로 보기도 한다.
물론 근초고왕 시대 이런 외교적 경로를 만들어낸 것 또한 사실이라면 절대 작지는 않은 업적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 갈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서기'의 내용을 부정하면서 임나를 경영한 나라는 일본이 아닌 백제였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백제 왕인(王仁) 박사가 일본에 건너가 학문을 전파하고, 불교 전래와 오경박사 파견 같은 부분에서는 내용을 그대로 신뢰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사실, 전남 영암군에서는 '왕인박사유적지'가 있고 왕인축제도 지자체가 직접나서서 하고 있지만 왕인에 관한 기록은 국내에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일본서기와 일본 고사기 기록에만 남아있는 내용이다.
한국고대사학회는 이처럼 이중적 잣대로 인식해온 '일본서기' 해석과 연구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하고는 있다 한다.
이어서 근초고왕 업적 3 이 계속
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