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OB 감독 시절
김감독은 중요한 시합이 있는 경기에는 프런트에 요청해서 선수 가족들이 직관 하도록 했다고 함.
가족들 앞에서 가족들의 응원을 받는 선수들이니 평소보다 훨씬 집중하리라는 생각에서...
요즘도 그러시는지 모르지만 김감독은 양말을 신을때 항상 왼발 부터 먼저 신는다고 함.
한번은 아무 생각 없이 오른발부터 신었는데 그날 시합에서 삼성에게 영봉패를 당해서라고 함.
84년 OB 감독 시절
OB의 2군 선수단의 별칭은 "유격장" 혹은 "유격대" "군번 없는 특공대" 라고 불렸다고 함.
그야말로 지옥이었음.
김감독에게 "너 내일부터 2군가라"는 말은 선수에게 죽으라는 소리보다 더 무서웠다고 함.
실제로 이 당시 중고참 선수 중 하나가 약한 부상으로 성적이 주춤하자 2군행 통보를 받음.
이 소식을 들은 해당 선수가 후배들이 보는 그자리에서 주저 앉아 펑펑 울었다고 함.
85년은 OB주전들이 초토화 된 시즌
주전 3루수 양세종 군입대, 주전 유격수 한대화(야왕) 간염, 주전 2루수 김광수(한화 신임수석코치) 척추 부상,
주전 포수 김경문(달감독) 허리 디스크...
급한데로 백업 선수들로 시즌을 시작했고 다행히 살아난 타력 덕분에 전반기는 삼성 다음으로 2위를 유지했으나 선수들의 체력 저하로
후반기는 5위(당시 6개 팀)를 기록함.
86년 플레이오프전
당시 삼성의 김영덕 감독과 OB의 김성근 감독의 수싸움이 대단했던 경기들이었음.
양팀간에 소위 말하는 위장 오더, 역정보 흘리기, 특급선발을 9회 마무리 투수로 올리기, 1회 타석 때 타자 교체 등등.
프로야구 창단하던 해에 OB의 감독은 김영덕, 코치는 김성근이었는데 OB의 성적 하락으로 김영덕 감독이 삼성으로
가고 공석이 된 OB의 감독직을 김성근 감독이 물려 받았음. 이게 1984년임.
삼성으로 간 김영덕 감독이 84년 시즌 시작때 감독 인터뷰로
"(자기가 없는) OB 따위가 무슨 우승권이냐? 3강도 힘들다"(당시 6개 구단)라고 김성근 감독을 지명해서 독설을 퍼부었다고 함.
84년과 85년은 OB가 성적 부진으로 삼성과 포스트 시즌에서 맞붙을 일이 없었고 드디어 86년에 두 앙숙 감독이 만나게 됨.
결과는 3승2패로 삼성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함.
87년 시즌 중 날씨까지 활용해서 선발 투수를 적절히 기용한 김성근 감독에 대한 어느 신문기사
"기상대의 예보만 잘 이용할 줄 알아도 프로야구계의 제갈공명 정도는 되는 셈이다"
OB 창단 원년 맴버인 주전포수 김경문(달감독)
당시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85년 타율 .190, 86년 .183을 기록하여 누구도 달감독이 다시 재기 하지 못하히라고 여겼음.
겨우겨우 뛰어난 투수 리드와 주자 견재력 때문에 타격이 좋은 백업 요원인 조범현(전 기아 감독)과 교대로 기용됨.
당시 완전히 은퇴까지도 생각 할 만큼 힘들었던 달감독을 겨울 동안 혹독하게 훈련 시킨 김성근 감독.
드디어 87년 시즌 중반까지 타율 .316으로 타격 9위에 랭커됨.
물론 고질적인 허리 부상의 재발 등으로 시즌 막바지 다소 부진하게 됨.
이후 OB의 주전 포수는 당연히 조범현.
경인방송과 공중파에서 야구 해설가로 잘 알려진 박노준
86년 박노준은 신인 드레프트에서 1차 1순위로 OB에 지명 받아 투수로 입단 함.
선린상고, 고려대 출신으로 촉망 받는 젊은 신인 투수였음.
데뷔 첫해인 86년에 33경기 출전 5승 6패 7세이브 방어율 2.28의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고교, 대학 시절 무지막지하게 혹사 당한
탓에 87년 부터는 거의 투수로써는 생명이 끝나는 폐급 분위기 였음.
87년 9경기 출전 1패 방어율 6점대가 넘어 갔음.
당시 김성근 감독은 투수의 생명은 끝났다고 판단, 젊은 나이를 감안하여 타자로 맹훈련을 시켜 87년 투수/타자 겸업으로 타율은 .315로
타자 전향에 성공 시킴. 이후 완전히 타자로 전향하여 빠른 발을 이용한 붙박이 1번 타자가 됨.
이후 박노준은 1997년 은퇴할때 까지 통산 타율 .262로 무난한 선수 생활을 함.
1993년 쌍방울로 현금 트레이드 된 박노준은 그해 .220의 타율로 약간 부진한 모습이었으나 그해 말 김성근 감독이 쌍방울로
(이거 지금 정근우 꼴인가?^^) 부임하고 다시 지옥의 동계 훈련(이라고 쓰고 지옥이라고 읽음)을 거치고 나서
1994년 .303의 타율에 도루를 43개나 기록하여 새사람으로 태어나게 됨.
97년도에도 큰 활약을 기대하였으나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부상을 입고 아쉽게 현역 은퇴하게 됨.
OB감독 시절부터 김감독의 야구스타일은 "기록의 야구", "컴퓨터 야구" 등 데이터 활용에서는 국내 최고의 감독으로 인정 받음.
88년 성적 부진 등의 이유로 구단은 89년 김감독과의 계약을 포기함.
이후 89년 시즌에는 이광환 감독이 선임 되어 김감독의 관리야구, 데이터야구를 배척하고 메이저리그의 '자율야구'를 OB에 도입함.
그러나 그때까지 자율야구라는 것이 한국 실정에 맞지 않은 탓인지 89년 시즌 OB는 5위의 성적으로 마감하여 그런데로 이광환감독
체제가 안정되는듯 했으나 '자율야구'에 묻힌 동계훈련의 부실탓으로 90년 시즌 11연패를 하는등 팀이 괴멸 분위기가 됨.
이로인해 90년 6월 시즌 도중 이광환 감독은 해임되고 자율야구는 원자분해가 되도록 까이게 됨.
이광환 감독은 후에 LG의 감독으로 발탁된 후 또한번 자율야구를 도입하였고 많은 사람의 우려속에서 드디어 94년 팀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하도록 만들기도 했음.
89년 OB 감독에서 당시 최약체 태평양으로 자리를 옮긴 김감독
당시 태평양의 상황이 지금의 한화와 너무나도 흡사한 느낌이 듬.
일단 당시 태평양 감독으로 부임한 김감독은 태평양이 약체가 된 이유가 수비 불안에서 찾음.
그리하여 겨울 동안 중계 플레이, 커트 플레이 등 수비훈련에 중점을 두고 개인 플레이 보다는 팀배팅 위주의 세뇌 교육을 시킴.
이리하여 89년에는 전년도 최하위 팀을 정규리그 3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 시켜 준 PO에서 '최강'삼성을 2승1패로 따돌리고
인천 연고 최약체 만년 승수 보탬 도우미팀(삼미, 청보, 태평양)을 최초로 플레이오프에 진출 시킴.
이때 상황을 지금 한화에 대입해 보면 아마도 한화의 올해 동계 훈련에서는 지옥의 수비 훈련과 몇몇 스타 플레이어의
엉성한 개인플레이에 대한 대대적인 정신 개조작업에 들어갈듯 함.(태균아! 너의 이름이 왜 떠오르지?)
우완 잠수함 박정현 투수
유신고 졸업 후 88년에 태평양에 입단 하였으나 입단 첫해에는 거의 빛을 보지 못함.
88년 당시 6경기 출전 1패 방어율 7.71의 왜 뽑았는지 모르겠던 투수 였는데 투수출신 김성근 감독에게 조련 당하여
데뷔 2년차 89년 시즌에는 19승 10패 방어율 2.15 17완투 4완봉승의 특급에이스로 올라서게 됨.
당시 태평양의 정명원, 최창호, 박정현 등을 특급에이스 삼총사라고 불렀음.
역시 조련에는 야신 김성근 감독임.
89년 시즌이 한참 무르익던 8월 모처럼 인천 시민들에게 활력소를 주던 태평양이 OB에게 연패를 당하며 주춤거리기 시작함.
당시 삼미, 청보로 이어지는 패전 전문 구단으로 어린이 야구단의 삼미 점퍼 입고 서울 시내를 쪽팔려서 돌아다니지 못하는
수준이었으나 간만에 팀이 중상위권에 오르자 시민들의 기대와 관심이 대단했나 봄.
그날밤 연고지 팀의 연패에 격분한 인천시민 천여명이 야구장을 봉쇄하여 김성근 감독의 직접 해명을 요구함.
전경 300여명 출동하여 관중들을 진압하고 이와중에 투석전 발생. 관중 20여명과 전경 1명이 부상했다고 함.
모처럼 인천시민들에게 야구의 재미와 함께 엄청난 관심을 불러 일으킨 애증의 김감독...
89년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 시키자 신문기사에는 김감독을 "야구의 달인"이라고 추켜 세우기도 했었음.
당시 태평양 1군 등록선수 53명 중 39명이 타지역 연고의 선수로 구성되어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었음.
당시 여론은 '이런 오합지졸 외인구단을 단숨에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한 이유'를 김감독의 용병술과 관리야구와 함께
땀과 눈물, 직업근성, 가혹한 지옥훈련 등에서 찾고 있었음. "꼴찌의 반란"이라는 평가와 함께...
한화 선수들 보고 있냐?^^ 올 겨울부터 반란 좀 해야지?^^
시즌 중 삼성과의 중요한 경기
김감독의 팀이 수비 중 암만 봐도 스트라이크인 볼을 심판은 볼로 선언.
이 판정으로 삼성은 밀어내기로 결승점을 뽑고 경기는 그대로 종료.
열받은 김감독이 무려 심판을 붙잡고 24분이나 항의를 했다고 함.
김감독에게 볼 하나는 승리 하나라는 집요함과 절실함이 있었음.
어떤 경기에서는 판정 시비로 선수단 철수를 지시하고는 열받은 심판에 의해 심판 통보도 없이 10분만에 장내 방송을 통해
몰수 게임패 선언을 당하기도 했음(프로야구 역대 2번째 몰수패)
89년 꼴찌 태평양이 단숨에 삼성을 깨부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 시키자
그 시즌 후 부터 김감독은 '조련사'로 불리며 망한팀을 재건 하는 마법의 조련사로 통하게 됨.
내년 시즌 한화의 재건이 기대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