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2년(영조 38년) 윤5월 13일(양력 7월 4일).
조선왕조사의 가장 처참한 비극이 벌어진 역사의 현장 창경궁 문정전(文政殿)이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어가를 따라 휘령전으로 나아갔다. 휘령전은 세상을 떠날 때 절하는 곳이었다.
문정전은 영조의 정성왕후의 혼전(魂殿)인 휘령전(徽寧殿)으로 쓰이던 곳이다. 정성왕후는 사도세자의 법적인 어머니다.
영조가 휘령전의 용상에 앉았다. 세자는 월대아래 판위에서 네 번 절하는 예를 행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세자가 집영문(集英門) 밖에서 지영(祗迎)하고 이어서 어가를 따라 휘령전으로 나아갔다. 임금이 행례를 마치고, 세자가 뜰 가운데서 사배례(四拜禮)를 마치자, 임금이 갑자기 손뼉을 치면서 하교하기를,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왕후(貞聖王后)께서 정녕하게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하고, 이어서 협련군(挾輦軍)에게 명하여 전문(殿門)을 4, 5겹으로 굳게 막도록 하고, 또 총관(摠管) 등으로 하여금 배열하여 시위(侍衛)하게 하면서 궁의 담쪽을 향하여 칼을 뽑아들게 하였다. 궁성문을 막고 각(角)을 불어 군사를 모아 호위하고, 사람의 출입을 금하였다.」
- 『영조실록』1762년(영조 38) 윤5월 13일(을해)
아들 사도세자가 어머니 정성왕후 휘령전에서 사실상 죽음의 예식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버지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는 끔찍한 사건이 벌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사건을 이렇게 기록한다.
「날이 늦었다. 재촉하여 나가시니 대조(大朝)께서 휘령전에 앉아 계셨다. 칼을 안고 두드리시더니, 그 처분을 하시었다.
(사도세자를 서인으로 강등하고 뒤주에 가둔 일을 말함)차마 망극하니 이 모습을 내가 어찌 기록하겠는가. 서럽고 서럽도다.
소조(小朝)께서 나가시자 대조의 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휘령전과 덕성합이 멀지 않아 담 밑에 사람을 보냈다.
“벌써 세자께서 용포를 벗고 엎디어 계십니다.” 대처분인 줄 알고 천지가 망극하여 내 마음이 무너지고 깨지는 듯하였다.
거기 있는 것이 부질없어 세손이 있는 곳에 와, 서로 붙들고 어찌 할 줄 몰랐다. 신시(申時: 오후 3~5시)즈음에 내관이 들어와 말했다. “밧소주방의 쌀 담는 궤를 내라 합니다.” 어쩐 말인고! 저들도 어찌할 줄 몰라 하며 궤를 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세손궁이 망극한 일이 있는 줄 알고 대문 안에 들어가 아뢰었다. “마마! 아비를 살려주소서!” “나가라!” 대조께서 엄히 말씀하셨다. 할 수 없이 세손은 왕자 재실로 돌아가 앉아 있었다. 내 그때의 정경이야, 고금천지간에 없었다.
세손이 나가자, 하늘과 땅이 맞붙는 듯, 해와 달이 깜깜한 듯하니, 내가 어찌 잠시나마 세상에 머물 마음이 있었겠는가.
칼을 들어 목숨을 끊으려 하자 옆에 있던 사람이 빼앗아 뜻대로 못하였다. 다시 죽고자 하였지만 촌철이 없어 못하였다.
숭문당을 지나 휘령전으로 나아가는 건복문 밑으로 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다만 대조께서 칼을 두드리는 소리와 소조가
말씀하시는 소리만 들렸다. “아버님! 아버님! 잘못하였습니다. 이제는 아버님께서 하라 시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 마소서.”내 간장은 마디마디 끊어지고 눈앞이 캄캄하니 가슴을 두드린들 어찌하겠는가. 당신의 용맹스러운 힘과 건장한 기운으로 아버님께서 “궤에 들어가라!”하신들 아무쪼록 들어가시지 말 것이지 어찌 들어가셨는가. 처음에는 뛰어나오려 하다가 이기지 못하여 그 지경에 이르니, 하늘이 어찌 이렇게 하셨는지. 만고에 없는 설움뿐이다. 내가 문 밑에서 목 놓아 슬피 울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소조는 벌써 폐위되었으니 처자인 내가 어찌 편안히 대궐에 있겠는가.」-『한중록』 한중만록 3권에서
영조는 칼끝을 두드리며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하라고 명하였다.
"네가 자결하면 조선 세자의 이름을 잃지 않을것이니 자결하라"
영조는 전에서 내려와 섬돌 위에 앉아 말했다.
"내가 죽으면 3백년 종사가 망하고 네가 죽으면 3백년 종사는 보존 될것이니 네가 죽는 것이 옳다."
이말에 (사도)세자는 통곡했다.
세자는 말했다.
"전하께서 칼로 찌르신다해도 신은 칼끝에 놀라지 않을것입니다. 지금 죽기를 청합니다."
이어 세자는 허리띠를 풀어 목을 맸고 곧이어 땅에 쓰러졌다.
모두가 (사도)세자를 구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세손(정조)이 들어왔다. 당시 세손의 나이는 만 10살이었다.
세손은 아버지 사도세자처럼 관과 도포를 벗고 세자뒤에 엎드렸다.
"할바마마 아비를 살려주옵소서"
영조는 말했다.
"누가 세손을 데려왔는가? 빨리 데리고 나가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 사관(한림) 임덕제(林德蹄)는 최후의 수단으로 황급히 내전에 연락하여
당시 열한 살의 왕세손(훗날의 정조)을 업어 오게 한 뒤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아버지(사도세자)를 용서해 달라고 빌게 하였다.
세손의 눈물에도 영조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한림 임덕제가 세자 뒤에 엎드려 일어나지 않자 영조가 끌어내라고 명했고, 위사(衛士)들이 달려들자,
"내 손은 사필(史筆)을 잡는 손이다. 이 손을 끊을지언정 나를 끌어낼 수는 없다"고 항의했지만...
이후 홍봉한이 준비한 뒤주에 (사도)세자를 들어가게 한다음 영조는 직접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잠근 후
큰못을 밖고 동아줄로 뒤주를 봉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전교를 내렸다
"세자를 폐해 서인으로 삼는다." (廢世子爲庶人 自內嚴囚, 遂命世子幽囚 )
이 후 삼복더위에 물한모음 먹지 못하던 세자는 8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세자가 죽던 그 날, 홍봉한은 한강에서 배를 듸우고 놀다가 세자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궁으로 들어왔다.
영조는 죽기 한달 전 세손과 대신들에게 사도세자에 대하여 유언을 했다.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제기하지 못하고, 차마 말 할 수 없다."
이와 함께 영조는 앞으로 사도세자 사건의 잘잘못을 언급하는자는 역률로 처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영조는 '나의 통석(慟惜)한 마음' 이란 표현으로 그 때의 일을 아픔으로 후회했다.


선인문 앞의 400년된 회화 나무이다.사도세자의 아픔을 기억하는 듯이 뒤틀린 모습을 하고 있다.
뜨거운 햇볕 아래 놓인 뒤주 속에서 사도세자는 괴롭고 힘들어 마구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을 듣고 자란 회화나무다.
영조는 화를 내며 큰 뒤주를 갖다 놓고는 사도세자를 그 안에 가두었다.
한여름 가장 무더운 복더위 때 밀폐된 뒤주 속에서 8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사도세자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도세자와 순조가 태여난 집복헌이 앞쪽의 건물이다. 옆 건물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죽은 곳 영춘헌(迎春軒)이다.


정조는 한의학에도 조예가 깊다. 동의보감을 참고해서 자신의 의서를 편찬한 정조다.
정조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영춘헌이다. 독살로 의심하는 인사들도 있다.정확한 진상은 그 누구도 모른다.


사도세자 묘지는 1968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29-1번지 배봉산에서 출토된 문화재다. 사도세자의 능은 그의 아들인 정조가
비극적 죽음을 맞은 아버지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1796년 원래의 배봉산에서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화산 기슭의 현릉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묘지석은 그 당시 수습되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이 이후에 발견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묘지문을 아래에 옮긴다.
사도세자는 이름이 훤이고 자가 윤관으로 영조 즉위 을묘년 (1735) 1월 21일 영빈의 아들로 탄생하였다 .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자라면서는 글월에도 통달하여 조선의 성군으로 기대되었다 . 오호라 , 성인을 배우지 아니하고 거꾸로 태갑의 난잡하고 방종한 짓을 배웠더라 . 오호라 , 자성하고 마음을 가다듬을 것을 훈유하였으나 제멋대로 언교를 지어내고 군소배들과 어울리니 장차는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노라 .
아 ! 자고로 무도한 군주가 어찌 한둘이오만 , 세자 시절에 이와 같다는 자의 얘기는 내 아직 듣지 못했노라 .
그는 본래 풍족하고 화락한 집안 출신이나 마음을 통제치 못하더니 미치광이로 전락하였더라 . 지난 세월에 가르치고자 하는 바는 태갑이 일깨워주는 큰 뉘우침이었지만 , 끝내는 만고에 없던 사변에 이르고 , 백발이 성성한 아비로 하여금 만고에 없던 짓을 저지르게 하였단 말인가 ? 오호라 , 아까운 바는 그 자질이니 개탄하는 바를 말하리라 . 오호라, 이는 누구의 허물인고 하니 짐이 교도를 하지 못한 소치일진대 어찌 너에게 허물이 있겠는가 ? 오호라 , 13일의 일을 어찌 내가 즐기어 하였으랴 , 어찌 내가 즐기어 하였으랴 . 만약 네가 일찍 돌아왔더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으랴 .
강서원에서 여러 날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은 어찌 종묘와 사직을 위한 것이겠는가 ? 백성을 위한 것이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쳐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노라 .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 .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구술하노라 . 때는 임오년 여름 윤 5월하고도 21일이라 . 이에 다시 예전의 호를
회복하게 하고 시호를 특별히 하사하여 사도라 하겠노라 . 오호라 , 30년 가까운 아비의 의리가 예까지 이어질 뿐이니 이 어찌 너를 위함이겠는가 ? 오호라 , 신축일의 혈통을 계승할 데 대한 교시로 지금은 세손이 있을 뿐이니 이는 진실로 나라를 위한 뜻이니라 .
7월 23일 양주 중랑포 서쪽 벌판에 매장하노라 . 오호라 , 다른 시혜 말고 빈에게는 호를 하사하여 사빈이라고 하는 것으로만 그치노라 . 이것은 신하가 대신 쓰는 것이 아니며 내가 누워서 받아 적게 하여 짐의 30년 의리를 밝힌 것이니 , 오호라 . 사도는 이 글월로
하여 내게 서운함을 갖지 말지어다 .
세자는 임술년 (1742)에 학문에 들어가고 계해년 (1743)에 관례를 올리고 갑자년 (1744)에 가례를 올려 영의정 홍봉한의 여식이자 영안위 주원의 오대손인 풍산 홍씨를 맞아들였다 . 빈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 첫째가 외소세손이며 둘째도 곧 세손으로 참판 김시목의 여식이자 부원군의 5대손인 청풍 김씨와 가례를 올렸다 .
장녀 청연군주 , 차녀 청선군주가 있으며 측실로 또한 3남 1녀의 자제를 두었다 .
승정 기원후 135년 임오 (1762,영조 38년 ) 7월 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