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를 생각하다
1. ‘1억 명 옥쇄’를 주장하며 끝까지 항전의지를 불태우던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터지자 결국 항복하게 된다. ‘원폭 투하’는 이후 많은 논쟁을 일으켰지만, 당시 미국이 판단했을 때 원폭은 미군들의 희생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원폭 투하는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희생자들을 가져온 일본에게 이상한 심리를 가져오게 하였다. 자신들이 ‘원폭의 피해자’라는 점을 강조하고 교묘하게 전쟁 책임에서 회피하게 하는 집단적인 무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 결과 소수의 군부를 제외하고 책임에서 면책되었으며, 최고 책임자인 일왕은 오히려 전쟁을 끝낸 평화의 상징으로 포장되었던 것이다. 한 학자는 일본의 파시즘을 특유의 일본적 현상이라고 평가하면서 그 위험성을 분석하였다. “이탈리아나 독일의 파시즘이 ‘위대한 지도자’의 지도 원리에 의해 통솔되고, 그의 몰락에 따라 쇠퇴하는 것과는 달리, 천황제 파시즘은 ‘책임의 끊임없는 전가’에 의해 그 구조가 지속될 뿐 아니라, 그 기원의 모호함 또는 은폐를 통하여 더욱 깊숙이 내면화되는 것이기도 하다.”
2. 전쟁의 종결로 한국은 해방되었지만 건국을 위한 준비는 결코 순조롭지 못했다. 승전국(미, 영, 소)들은 한국의 신탁통치에 대한 막연한 구상만을 결정했고 세부적인 시행계획에는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소련의 한반도 진입과 함께 38선이 그어졌고 미국과 소련의 임시 통치체제를 출발하였던 것이다. 해방되었지만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통합되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극심한 분열과 혼란 속에 있었다. 당시 미국 정보국의 보고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수권능력에 대한 심각한 불신이 담겨있었다. 마이클 브린은 다음과 같이 혹평하기도 하였다.“‘한국인’이란 말은 심지어 국제 사회주의 운동 세력들 사이에서 조차 ‘파벌주의’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고 있었다. 지도자의 분열이 분단의 한 요인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광복의 새벽은 밝았지만 어둠은 아직도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렇게 식민지 시대는 끝났다.
3. 35년간의 식민지 시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학계에서 가장 논쟁이 된 주제는 ‘식민지 시대’의 성격에 관한 것이었다. 학계 주류는 ‘식민지 수탈론’에 기초하여 일본의 통치가 우리의 내부적 발전을 막았고, 정치·사회·경제에 대한 심각한 피해를 끼쳤다는 입장에서 식민지 시대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새로운 주장이 등장한다. 경제사회적 통계를 기초로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자는 태도를 강조한 소위 ‘신자유주의적’ 주장이 대두된 것이다. 이들은 인구의 증가와 다양한 영역에서 물질적 성장을 가져왔다는 점을 들어 식민지 시대가 한국 사회의 근대화의 기초를 가져왔다는 일명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한다. 객관적 자료를 통한 역사 읽기는 지나친 애국주의적 관점과 민족주의적 시각에 대한 반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역사에 대한 평가는 물질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출 수 없고 다양한 측면을 통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점에서 한국인들이 감내해야 했던 심각한 고통과 피해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들의 주장은 일본의 우익이 주장하는 것과 내용과 형식에서 동일한 쌍둥이가 되고 말았다. 역사는 비인간적 세계가 아니다. 인간이 겪어야 했던 실질적인 행복과 불행의 영역을 탐색하는 작업이라 하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적 주장은 식민지 시대의 핵심적 고통을 은폐하는 접근이라 할 수 있다.
4. 식민지 시대에 대한 성격과 함께 일반적인 시민들에게 더 중요했던 문제는 ‘친일’과 ‘친일인사’에 대한 처리 문제였다. 많은 지식인들이 일제 말기 대부분 전향했고 일본의 전쟁 선전에 동원되었다. 하지만 친일인사들에 대한 분노는 적절하게 통제되지 못했고 냉정하게 심판하지도 못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에서 친일했고 그 친일의 성격과 파장의 크기는 분명 달랐다. 그런 이유로 악독하고 심각한 친일행위를 한 자들과 소극적으로 친일를 방치한 사람들의 행위가 뒤섞였으며 그 차이를 명시하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친일’ 그 자체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지만, 심각한 범죄적 행위의 친일을 처벌하지 못하고 흐지브지되었던 것이다. 다만 남은 것은 친일에 대한 공격과 방어의 논리만이 남게 되었다. ‘합당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란 정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실현되지 못했던 것이다.
5. 식민지 시대의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한 쪽에서는 ‘친일인사’들이 한 번도 정확한 역사적 평가와 심판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쪽에서 똑같은 사람들을 두고 과도한 비난과 모욕을 통해 인격적인 파탄을 초래했다고 옹호하기도 하는 것이다. 2024년 총선에서도 총선에 출마한 한 역사학자가 유튜브 방송에서 발언했던 식민지 시대에 대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논란이 되고 있을 정도로 ‘식민지 시대’는 아직도 한국사회에 대한 입장과 평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남아있는 것이다. 역사는 부분적인 요소만을 보았을 때는 잘못 판단할 수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연결되면서 만들어지는 생명력 넘치는 사고와 실천의 영역이다. 그런 점에서 전체적인 지식이나 전망에 대한 고려없이 부분적으로 또는 타인이 제공하는 단편적인 정보를 통해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최소한 식민지 시대의 사실과 흐름에 대한 지식과 의견에 대한 수집이 필요하다. 충돌하는 의견에 대한 청취와 판단없이 이루어지는 견해는 자칫 독단적인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우선 식민지 시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통해 최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태도가 중요하다. ‘준비되지 않는 판단’은 위험하다. 편견을 극복하는 객관적 자료와 통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역사적 상식이라는 최소한의 조건을 통해 역사를 만나려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노력들이 ‘식민지 시대’를 평가하는 기본적인 방식이 되어야 한다.
첫댓글 - 암울한 시대를 건너는 시간이 너무 길다.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 속에 숨은 기회주의자들은 아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