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燕尾寺(안동 이천동)1
제비원에서 院은 여행길에 쉬어가던 일종의 여관이다.제비원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제비원에는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심부름을 하던 燕이라는 처녀가 있었다.예쁘고 마음씨가
착한 연이를 동네총각들이 사모했다.총각은 비명에 죽어서 저승에 가게되었는데,염라대왕은 총
각이 살아 생전에 악덕을 많이 쌓았으므로 다음생에는 소로 태어날 것이지만, 연이는 착한일을
하여 선행의 창고가 가득 쌓여있으니 좀 꿔서쓰면 다시 살아돌아 올 수 있다고 하였다.저승에
서 연이의 재물을 빌려쓰고 살아난 총각은 이승에 돌아와 연이에게 자초지정을 설명하고 자
기가 재물은 나누어 주었다.큰 재물을 얻은 연이는 이를 모두 부처님을 위해 쓰기로하고 법당
을 지었다.5년의 세월이 걸려 법당을 짓는데,마지막날 와공이 발을 헛디뎌 지붕에서 떨어졌다.
그후 몸이 산산조각이 났는데,그 순간 와공의 혼이 제비가 되었다고 한다.그 때부터 이절을
제비사 또는 연미사라고 부르고 이 일대는 제비원.연미원이라 부르게 되었다.연이는 서른여
덟해에 죽었는데,그날저녁 큰바위가 갈라지면서 지금의 석불이 나타났다고 한다.공덕을 쌓
은 연이가 부처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부처를 미륵불로 여기고 치성을 드린다.아들
을 낳게 해달라고 하거나 집안이 두루편안하게 해달라고 빈다.
안동 제비원석불(제비원 마애불입상)(안동 이천동)(보115호)2
燕飛院 석불은 태화산 산록 제비원에 있는 고려시대 마애불 입상이다.
안동인들은 제비원미륵으로 친숙하다.높이 9.95m.너비7.2m.두상2.43m
이다.한손은 가슴에 다른한손은 배에 대고있고 엄지와 장지를 맞댄 中品
下生印을 한 마애여래불의 모양을 하고 있다.
天燈山 鳳停寺 一柱門3
672년(신라 문무왕12년)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날린 종이 鳳이 이곳에 내려앉아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극락전에서 발견한 상량문에 의하면 의상의 제자인
能仁大德이 창건한 후 조선시대까지 계속 중창이 이어져 오늘에 이른다.우리나라
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극락전(구15호).조선시대 건립한 대웅전(국311호)
화엄강당(보448호).고금당(보449호).고려시대 삼층석탑.만세루.요사채 등이 있고
산내 암자로는 靈山庵.知照庵이 있다.
봉정사 안내도(사인보드)4
1극락전 2대웅전 3화엄강당 4고금당 5삼층석탑 6무량해해 7만세루
8협문 9종각 10삼성각 11영산암 12지조암 13화장실 14안내도(현위치)
봉정사 소나무5
봉정사 소나무6
天燈山 鳳停寺 萬歲樓7
天燈山 鳳停寺 .南無阿彌陀佛(현판)8
만세루(四物-범종.북.목어.운판)9
萬歲樓에서 본 산세10
만세루의 사물과 범종각11
봉장사의 소각장12
봉정사 大雄殿(국311호).無量海會(안동 서후 태장리)13
대웅전은 봉정사의 중심건물로 조선시대 초기의 건물로 추정된다.정면3칸
측면3칸의 단층건물이다.공포의 구성에서 힘있고 단순한 수법은 초기의 다
포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내부 단청은 고려시대 요소를 지니고 있어 건물
과 함께 중요한 회화자료로 주목되고 있다.이후 2000년에 해체보수하였다.
無量海會14
무량해회 건물의 주련15
自從今身至佛身(자종금신지불신)은 지금 이몸으로부터 불신에 이르기 까지
堅持禁戒佛毁犯(견지금계불훼범)은 금하는 계율 견고히 지켜 훼범하지 않으리니
무량해회 건물의 주련16
唯願諸佛作證明(유원제불작증명)은 오직 바라건데 모든 부처님께서 증명하소서
寧捨身命終不退(영사신명종불퇴)는 차라리 신명을 버릴지언정 마침내 물러나지 않겠나이다.
봉정사 華嚴講堂(보448호).大雄殿(국311호)(안동 서후 태장리)17
화엄강당은 승려들이 공부하는 장소로,보기 드물게 온돌방 형식을 갖추고 있다.
정면3칸.측면2칸으로 남으로 2칸부엌.북으로 4칸온돌방이 있었으나 원래는 정면
4칸.측면4칸이었다.불당에 비해서 낮은 기둥을 사용하였다.측면중앙에 사각기둥
1개를 세워 대들보를 받치게 했으며 그 사이에 창을 내었다.
봉정사 대웅전(공포.단청)18
봉정사 대웅전 문수보살(좌).중앙-석가모니불(중앙).보현보살(우)19
봉정사 화엄강당(좌).대웅전(중앙).무량해회(우)20
안정사 석조여래좌상(유44호)(안동 서후 태장리)(아래좌)21
안동 월곡 미질리에서 발굴된 것으로 안동댐 건설로 안정사가 폐사됨으로 1973년 봉정사에서
보관하게 되었다.결가부좌를 튼 하반신을 높게 표현하여 안정감이 느껴지며 손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제작시기는 9세기경으로 추정한다.
봉정사 大雄殿22
봉정사 요사채(功德堂)23
봉정사 極樂殿(국15호).三層石塔(유182호).佛像24
極樂殿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정면3칸.측면4칸의
맞배지붕 주심포건물로 고려시대 것이지만 통일신라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다.
원래는 대장전이라고 불렀으나 나중에 극락전으로 고쳐 불렀다.기둥의 배흘림.공포
의 단조로운 짜임새.내부가구의 고결함이 이 건축물의 특징이다.
봉정사 三層石塔은 극락전 앞뜰에 있으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높이는 3.18m이다.고려중엽의 석탑양식을 하고 있다.
극락전(불상)25
봉정사 극락전.삼층석탑26
봉정사 극락전.삼층석탑27
봉정사 極樂殿.大雄殿.佛像.華嚴康堂.無量解會(현판)28
극락전의 현판은 松坡童蒙이 쓴 것으로,송파동몽은 안동권씨 권행의 15세손인 松坡 權靷
(권인)을 말한다.동몽은 자신을 낮추어 부를 때 쓰는 말로 1882년 임오4월에 쓴 것이다.
봉정사 古金堂(보449호)(안동 서후 태장리)29
古金堂은 정면3칸.측면2칸의 맞배지붕으로 원래 선방이었으나 지금은 요사채로 사용하고 있다.
당시 남쪽에는 우화루가 있어서 남쪽지붕이 이 건물과 연결되고 그 아래쪽을 부엌으로 사용했다.
봉정사 고금당.삼층석탑.극락전30
봉정사 靈山庵을 오르는 계단31
영산이란 원래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하시던 영축산을 말한다.
영산암(민126호)의 입구인 雨花樓32
영산암은 봉정사에서 100m정도 떨어져 있는 암자로 부속건물로는 응진전.염화실.송암당
삼성각.우화루.관심당 등 6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건물이 ㅁ자형식으로 배치되어 있고
3단의 마당구성과 우화루의 벽체를 없애고 송암당을 누마루로 처리한 기법에서 폐쇄적인
느낌이 들지 않도록 배치되어 있다.입구의 우화루의 현판은 원래 극락전앞에 있던 누각의
현판이었다.雨花는 석가모니께서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처음 설하실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영산암 입구인 우화루33
우화루 현판을 달려면 높은 고승이 기거를 해야한다고 한다.
영산암의 요사채(관심당)에 앉아있는 소요유적회원34
관심당은 내마음을 관한다는 뜻으로 모든 마음의 작용을 제어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영산암 송암당 앞의 소나무.맞은편의 관심당.응진전의 벽화35
영산암 應眞殿36
영산암 三聖閣.應眞殿37
영산암 염화실.삼성각(제일안쪽)38
영산암 삼성각(불화)39
영산암 松岩堂40
송암당은 승려들이 기거하는 요사채로 앞에는 소나무가 있어서 운치가 있다.
영산암과 지조암에서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촬영장소로 알려져 있다.
중간마당에는 송암당과 맞은편에는 관심당이 있다.
영산암 송암당.삼성각.응진전.관심당41
영산암 응진전 제화갈라보살(좌).석가모니불(중앙).미륵보살(우)42
봉정사 대웅전 중문(眞如門)43
봉정사 영산암을 내려오는 일행44
봉정사 암자인 知照菴45
창암정사(倉巖精舍).명옥대(鳴玉臺)46
천등산(576m) 바위굴에서 의상대사의 제자 능인대덕이 득도했다.
바위굴에서 수도할 때 천녀가 내려와 불을 밝히며 득도를 도왔다고 한다.
이굴을 천등굴.산이름을 천등산이라고 했다.명옥대는 봉정사 입구에 있다.
명옥대가 있는 태장리는
공민왕 시절 궁중에서 이곳에 태를 뭍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정면2칸.측면2칸에 계자난간을 둘렀다.처음 정자이름을 낙수대로 했
으나 육사형의 시를 따 명옥대로 개칭했다는 내용의현판이 걸려있다.
명옥대사적비.명옥대(해서체글씨)라 쓴 바위47
명옥대는 퇴계 이황(1501년-1570년)이 친구들과 놀던 곳이다.이황은 16살 때 봉정사에서
사촌인 이수령.권민의.강한과 함께 3개월 정도 독서를 했다고 한다.숙부인 이우가 봉정사
에서 독서를 주선했다고 한다.명옥대에서 물이 떨어지는 바위를 낙수대라고 이름했다.
이황은 중국 서진의 시인 육기가 쓴 나는 샘이 명옥을 씻어 내리네 라는 시구에서 글을 따
명옥대로 바꾸었다.
죽헌고택과 퀸 엘리자베스 로드(사인보드)48
임시정부요인 東農 金嘉鎭(1846년-1922년)공이 1866년(조선 고종 23년)에 지은 집이다.
그후 1890년 참봉 竹軒 李鉉贊(1851년-1915년)공이 인수하여 재사로 사용하고 있다.
퀸 엘리자베스 로드는 영국여왕이 1999년 4월21일 안동 하회마을과 봉정사를 방문했다.
이를 기념해서 봉정사와 죽헌고택을 연결해서 퀸 엘리자베스 로드로 지정했다.
삼태사 천년의 길 종합 안내도(사인보드)49
안동 차전놀이의 유래(사인보드)50
(2017.11.04)
첫댓글 봉정사를 자세히도 찍어 왔구나. 나도 십년 쯤 전에 가본 기억이 떠오르네.
봉정사는 정말 유서가 깊은 절이지...특히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란 영화의 촬영장소가 영산암.지조암이란다...영산암은 정말 아늑하고 운치가 있는 암자였다네...
지난날의 추억을 생각하면서
엘리자베스 길을 걷고싶네요👒
예!! 정말 호젓하게 걷고 싶은 길일 것 같습니다.저도 그 길은 걷지는 못하고 사인보드만 찍어 올렸답니다.참 봉정사는 그렇게 대찰은 아니지만 볼거리는 상당한 절이었답니다.특히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찍은 영산암이 고즈넉한 암자였답니다.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