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에 관한 반성(反省)을 기록한 성경을 대하는 자세
(예비자교리.....2024-06-19. 수 )
<1.예비자교리에 참여하는 사람에게>
1. 사람이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배운다’는 표현의 의미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그것을 바꾸겠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지금까지는 내가 몰랐지만, 내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내 삶에 도움이 되게 하자는 의도를 포함하는 행동입니다.
2. 이렇게 배우고 싶다고 말할 때, 그 대상을 알게 되는 일은 생각만큼 쉽게 되는 일은 아닙니다. 새로 배우기 전, 먼저 내가 안다고 생각한 것이 나중에 알게 되는 내용을 거부(拒否)하게 만드는 일도 있고, 받아들여서 새롭게 알게 되는 일이 분명히 새로운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내 삶을 변화하게 했다면서도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내 삶에 좋은 결과를 만들려면, 새로운 것을 대하는 내 마음과 생각이 겸손해야 하고, 순박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3. 여러분이 천주교회의 신앙을 말로 설명하고 듣는 시간을 많이 지냈습니다만, 여러분은 천주교회의 신앙을 대하면서 지금까지 신앙을 말하는 시간에 배운 것을 삶에 드러내면서 여러분의 삶에 어떤 변화가 왔다고 여기십니까?
4. 우리가 예비자교리라고 부르는 이 시간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 그 세상에 사는 사람을 사랑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을 배운 본보기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시간입니다.
5.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모습을 배우겠습니까? 신앙인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지금 배우는 일을 포함하여, 여러분이 이에 관한 설명을 반복해서 들을 기회는 앞으로도 여러 차례가 있겠지만, 실제로 그 지식을 배운 대로 드러내는 것은 내가 듣는 소리를 내 행동으로 선택하는 일입니다.
6. 하느님은 당신의 피조물인 사람을 사랑하셨다고, 교회에서는 신앙인과 신앙인이 되려는 사람에게 말합니다. 문제는 하느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세상에 사는 사람이 다 믿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 귀에 대고서 하느님의 뜻이 그러하다고 말하겠지만, 내가 그 소리를 존중하지도 않고, 그 소리에 맞추어 살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많은 얘기를 듣는다고 해도 그 소리는 의미가 없고, 내가 세상에서 지낸 시간은 올바르다고 말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7. 교회가 하느님에 관한 선언을 그렇게 가르치는데, 교회라는 공동체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바로 옆에서 하나하나를 지켜보았기에 그 내용을 정리해서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목적하는 바를 드러내려고 일반적으로 하는 행동과 비슷하게, 하느님도 신앙인들을 통해서 전달되는 얘기에 바라는 목적이 있을 거라고 우리가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는 세상에서 자기의 명예나 이익을 먼저 생각하면서 행동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세상에 바라시는 목적을 비슷하게 표현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담으신 말씀과 행동을 해석하면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세상에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일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해도 될까요?
< 2.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 구약성경>
8. 여러분이 신앙인으로 살겠다고 준비하면서,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그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는 성경(聖經)이라는 책은 우리가 사는 나라인, 대한민국의 역사를 담은 것도 아니고, 우리가 사는 곳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나라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신앙의 본보기를 담은 책으로 알게 된, 성경이 담은 역사는 히브리 민족이라는 나라의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곳과는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살던 그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했다거나 /혹은/ 거부하고 실천하지 않았는지에 관한 내용을 사람의 기록으로 남긴 내용입니다.
9. 비판하는 표현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사는 곳도 아닌, 히브리민족이 살면서 그들이 자기들의 삶에 관한 것을 기록한 그들의 삶을 기록한 역사를 왜 배워야 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하면서 배우는 일은 성경의 기록에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진리가 있다고 인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삶의 기록을 남긴 그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또 그 내용을 지금 대하는 나는 얼마나 올바른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고 실천해야 하는지 그 본보기와 삶의 모습을 보자는 것입니다.
10.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하느님의 뜻을 대하고 실천한 것을 기록한 성경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실제로 중요하게 대합니다만, 자기 민족의 역사에 관한 기록은 히브리민족만이 남긴 기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그러한 기록을 역사(歷史)라고 말하지만, 자기들의 신화와 역사를 담은 기록은 어느 나라에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우리나라의 삼국사기, 삼국유사도 그런 종류로 말할 수 있습니다. 묘하게도 역사를 기록하면서 자기들 삶의 기록에서 자랑할 만한 일들을 강조해서 하는 기록이 세상의 역사라고 말하는 판단이라면, 성경은 일정한 목표나 의도에 따라서 자기들의 삶을 각색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삶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여 얼마나 가까이 갔는지 혹은 얼마나 멀리 떨어진 삶의 모양을 만들었는지 있는 그대로 썼다는 특징을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다른 사람들이 그 내용을 알게 되면, 히브리민족의 가치를 낮추어 보게 될 일도 담았고 기록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11. 구약성경의 첫째 권인 창세기가 기록하는 세상의 첫 사람은 아담과 하와입니다. 창세기라는 책-세상을 창조한 기록-이 책에 쓰인 내용을 아무리 찾아도 아담과 하와는 ‘히브리 민족’의 사람이나 자기 민족의 시조(始祖)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누군가를 부모로 하여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흙으로 빚어 코에 숨을 불어넣어 그가 아담이 되었고, 그 아담의 갈빗대에서 그의 배우자인 하와의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우리라 예상하는 바와 다른 내용을 대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배우는 내용의 한 가지는 아담과 하와는 히브리 민족의 시조라는 내용이 창세기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아담과 하와가 산 곳은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으로 만드신 곳이었고, 그 에덴동산은 현실의 히브리민족이 살고 있는 팔레스티나 지역이 아니라, 창세기의 기록을 보면, 그 에덴동산의 주변에는 4개의 커다란 강(2,11-피손-금이 나는 하윌라땅/2,13-기혼-에티오피아/2,14-티그리스-아시리아의 동쪽으로 흐름/2,14-유프라테스)이 있던 곳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이 강들은 한 나라나 한 장소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에덴동산은 현실의 이스라엘의 북동쪽에 있는 이라크와 이란이 있는 지역부터, 아프리카 동쪽 편, 다시 말해서 현실의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를 건너, 이집트의 남쪽의 아래에 있는 에티오피아까지 넓은 범위의 어느 곳에 있다고, 그 장소가 있었던 곳도 아주 넓은 범위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니 실제로 아담과 하와는 어디에서 살았는지, 그는 민족의 분류를 따지면 히브리 민족의 사람이라는 표현을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민족의 역사를 바탕으로 그리고 배경으로 써 있는 것이 현실의 모습이지만, 실제로 성경은 히브리 민족이 자기들만의 자랑을 남기기 위해서 미화(美化)하거나 그렇게 해석할 내용을 담지도 않았다는 것이 신기한 일입니다.
12. 세상에 사는 사람은 민족을 따져서 내가 우월한지, 다른 사람이 열등한지 말합니다만,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담과 하와는 히브리 민족의 시조나 조상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야기의 시작으로 생각하면, 민족의 조상을 말하기 이전의 사람들이라는 막연한 소리를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세상에 처음으로 있던 사람인데, 그들에게 어떤 민족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그런 설명도 나오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들이 처음부터 살았던 곳인, 에덴동산은 현실에서 말하는 것처럼 민족들이 자리를 잡은 위치를 중심으로 민족의 이름을 말할 것은 아니므로, 아담과 하와를 가리키면서 그들이 히브리 민족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13. 구약성경의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오는 ‘사람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의 다음에는 첫 사람들이었던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서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고, 죄를 범하는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던 나무의 열매를 뱀의 유혹에 빠져서 먹고, 원죄(原罪)라고 부르는 죄를 지으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아들인 카인과 아벨은 첫 사람의 아들이면서도, 형님인 카인이 동생인 아벨을 죽이는 첫째 살인을 범한 사람들이 됩니다. 이렇게 사람의 세상에는 인류의 죄악, 시간이 조금 더 흘러서는 역사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기에 원역사(原歷史)라는 표현을 쓰는, 노아의 홍수와 하느님의 심판에 관한 얘기,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너른 들판에 모여서 ‘우리의 이름을 흩어지지 않게 하자’는 뜻으로 지구라트 탑을 세웠다는 바벨탑 사건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로 죄악을 범하고 죄를 자기들의 삶에 불러들인 일을 만들었고, 사람은 하느님을 떠나서 하느님을 등지고 살게 되면서, 자기들이 살던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대하면서 우리는 어떤 판단을 하겠습니까?
<3. 복음에 관한 설명>
14.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다스리던 사람의 삶에 자기의 선택과 결정으로 죄가 들어와 자리를 잡았고,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는 결과가 만들었습니다. 구약성경이 그렇게 사람은, 자기의 선택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에 시소를 타듯이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왔다가 다시 멀리 도망치기를 반복한 삶을 드러냈습니다. 그 삶의 끝에, 창조에서부터 예수님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4000년쯤 시간이 흐른 뒤, 사람의 삶을 다시 하느님께로 이끄시려는 방법으로 신약성경의 복음서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신 예수님의 삶을 기록하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일을 복음서라고 부르는 책에서 설명합니다.
15. 신약성경의 복음서는, 세상의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서기를 간절히 바라는 방법으로 하느님의 뜻에 맞는 가르침을 주시는 예수님의 삶과 그에 관한 내용들이 나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노력으로 예수님의 희생이 있었고, 세상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한 예수님의 활동이 있었습니다.
16. 신약과 구약성경을 읽으면, 거기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성경의 내용을 한 걸음 혹은 두 걸음을 물러서서 전체의 내용을 보고 요약하여 말하면, 인류의 역사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려고 애쓰고, 죄를 짓거나 죄를 범하는 이야기와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은 예언자들이 백성들을 향하여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면서 히브리 백성을 하느님의 뜻을 담은 바른길로 이끄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17. 역사를 이렇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만, 사람은 세상의 삶에서 하느님의 힘보다 사람의 힘을 더 강하게 드러냅니다. 이 말은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서 제멋대로 살면서도 자기들이 잘못 살았기에 나쁜 결과가 생겼다고 판단하거나 삶을 돌이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그렇게 우기고 주장한 삶의 결과는 자기들의 삶에 고통과 멸망을 가져왔고, 삶에 어려움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이 전체 이스라엘의 역사이며 구약성경의 내용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성경에는 그 시간의 길이에 관한 표현은 없습니다만, 일반적으로 말할 때 아담과 하와의 창조 때부터 인류의 구원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삶에 이르기까지는 대략 4000년쯤 시간이 흘렀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창조에서부터 구약의 시간인 4000년이 지난 다음,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선포했다고 말하고, 그때로부터 다시 2000년쯤 지난 시간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18. 세상에 우리가 아는 시간에 맞춰서 하느님의 일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어느 시간에 이루어졌는지 년-월-일-시-분-초를 획정할 방법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시간과 세상의 시간이 다르다는 표현은 시편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물론, 시편의 기록도 사람이 알아들은 것을 사람이 읽는 표현으로 기록한 것이니, 어느 한쪽의 영향은 클 수는 있지만, 어느 것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지는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은 시편 90장 4절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천년도 당신의 눈에는 지나간 어제와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다>는 시간에 관련된 표현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시간을 사람이 알아듣는 방법에 따라 기록한 계산법이겠지만, 하느님께서 다루시는 하루는 인간에게 천 년의 길이만큼 된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으로는 무척이나 길다고 할 시간도 하느님의 앞에서는 한순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해석과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19.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시어, 하느님이 이루신 모든 창조물/피조물의 으뜸이 되게 하셨고, 모든 동물을 다스리게 하신 사람의 특징은 무엇으로 말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물의 영장으로 삼으셨으니, 사람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명체에 관하여 절대권력을 쥐고서,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허락이었을까요? 이렇게 사람의 생각을 표현할 수도 있지만, 이런 판단은 지나치게 인간(人間)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만의 판단일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해도, 내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사람인 내게 관리(管理)를 맡기신 창조물/피조물을 대하면서 그 만물의 본래 의미대로 대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헛되고 헛된 결과를 만든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에게서 놀라운 허락을 받은 것이 사람이지만,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부터 사람이 보인 삶의 태도를 간단하게 말한다면, 사람은 자기의 사력(死力-죽을 힘)을 하느님에게서 도망치려고 했다는 표현대로 알 수 없는 길을 간 특징을 보입니다. 물론 우리가 성경을 읽는 부분에 따라서,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게 살려고 한 모습을 찾을 수도 있지만,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대하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좋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20. 구약성경에 나오는 본보기와 모습을 한꺼번에 살피는 일이 가능하다면, 사람이 보이는 모습은 죄로 기울어져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방법을 생각하려고 애쓰는 존재라는 표현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담아서 우리에게 실천하라고 주신 일들을 사람은 좋게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의 선포와 예언자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사람에게 강요한다는 생각으로 대했고,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듣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태도를 넘어서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쉽게 죽였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들을 향한 일반적인 평가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방법대로, 창세기에 나오는 에녹이라는 사람과 열왕기가 기록하는 것처럼, 엘리야 예언자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일을 빼면,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삶의 방법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다가온 사람들의 판단이 그러했고, 유배가 현실이 됐을 때, 활동했던 에제키엘 예언자에게도 비슷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예언자들은 이런 사정을 안타깝게 여기고,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말했지만,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진 한쪽으로 비틀어진 모습을 보이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힘을 사용하여, 기적을 베풀고 그 힘으로 사람을 한꺼번에 바꾸려는 시도는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전하고 선포하는 예언자들에게 잘못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보호하지 않으신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언자들은 사람들의 박해로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선포한 예언자들을 위하여 아무런 방패막이도 되지 않았다는 것이 서글픈 일입니다.
21.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그렇게 보호하지 않고 그냥 놔두셨는데, 그때 하느님의 사명을 전하는 역할을 하던 예언자들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았다고 말하겠습니까? ‘하느님의 일을 충실히(!) 한 나를 돕지 않으신 하느님을 내가 왜 존중하고 그 뜻을 실천해야 하겠느냐?’고 묻고 하느님을 등지고 떠나야 한다고 할까요? 물론 우리가 이렇게 질문해도 원하는 대답을 하느님에게서 들을 수는 없다는 것이 또 안타까운 일입니다.
22. 하느님은 세상을 향하여 당신의 뜻을 여러 차례 밝히셨다고 역사는 기록하지만, 어떻게 하시든지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선 모습을 보이지 않자,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대신하여 예언자들을 보내시는 일로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셨고, 하느님이 생각하신 마지막 순간에는 당신의 아들인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이 신앙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계획과 실천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성자께서 사람의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리셨는데, 그분이 세상에서 하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내용은 여러분이 예비자교리 시간에 배우실 내용이고, 신앙인으로 세상에 사는 동안 강조하여 들을 내용이며, 그 본보기를 배워서 각자가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실천할 일입니다.
23. 예수님께서 세상에 하신 일을 요약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과 똑같은 삶을 산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이기도 하고, 세상에 산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온전하게 알아듣기가 어렵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지금으로부터 2027~2028년(서기2024년+3~4년) 전에 현실의 이스라엘 땅에 태어나시어 세상에서 33년을 사셨다고 합니다. 그 누구도 이 내용을 증언할 사람은 없지만, 성경이 기록하는 표현에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세례를 받고 제자들을 선택하여 행동에 나서셨을 때, 서른 살(30살) 쯤이라는 표현과, 요한복음서가 기록하는 예수님의 삶에 과월절에 관한 표현이 세 번 나오는 것을 합쳐서 계산하여, 세상에서 지내신 예수님의 삶은 33년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생애의 마지막 3년간 제자와 지내신 공생활(公生活)에 스승을 배반하여 자기가 선택한 길로 간 유다를 빼고 셈하면, 11명의 제자를 데리고 다니시며 특별히 교육하셨습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을 교육한 시간은 구약성경이 기록하는 예언자들의 삶을 제자들이 드러내도록 훈련하신 기간이었으며, 사람들의 삶에 하느님의 뜻을 심고 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훈련시키며 그렇게 사셨지만, 예수님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올바르게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당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에 일치할 방법을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 그 방법을 찾은 것은 하느님의 계획이었고 실천이었을 뿐, 사람들이 하느님을 향하여 올바로 돌아선 결과를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힘이 부족해서 그랬을까요, 사람들이 드러낸 고집이 커서 그랬을까요? 물론 하느님은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그냥 두신 것이 아니라, 사흘의 밤과 낮이 지나서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24. 성경을 대하는 우리가 바르게 생각할 것은 구약시대에 소리로 들렸던, 예언자들의 선포와 예수님께서 하신 삶의 본보기를 기억하고, 우리가 살면서 제자들의 삶을 따라 사는 모습으로 우리가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나의 삶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일이고, 나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과 영광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현실에서 신앙인으로 잘사는 모습이 언젠가 내가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는 훌륭한 재료가 되도록 살면 좋겠습니다. 저도 **사제로 살면서**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이 내게 베푸실 영광을 기대하는 마음과 생각으로 삽니다.
25.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에 대한 사랑, 세상에 실현될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이루어져야 할 하느님의 평화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인내와 희생,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보이는 것이 희생의 모습으로 세상에서 사셨지만, 사람들의 삶에서는 그 일에 충실하게 협조한 모습을 보지 못하셨습니다. 결국 그 일은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일일 것입니다.
26. 예수님께서 복음선포를 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다음을 기록하는 사도행전부터 요한의 세 번째 편지까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운 사도들이 세상의 공동체들이 실천할 일을 여러 가지 상황에 맞춰 해석하고 선포한 내용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들의 편지와 기록은 구약시대에 하느님의 백성을 향하여 예언자들이 외쳤던 삶을 반복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자리를 차지한 요한묵시록은 구약성경의 처음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언젠가 하느님께서 당신이 뜻을 완성하실 세상 심판의 모습을 그리는 내용입니다. 세상의 심판이 이루어진 뒤, 달라질 하느님나라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우리도 그 나라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에서부터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그 모습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27.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제자들의 선포내용을 간단하게 생각했습니다만, 우리가 그 모습을 대하는 일을 구경거리의 하나로만 생각할 것이냐, 아니면 삶의 본보기로 생각하여 따라 살 것이냐의 차이는 남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좋게 말하면 내가 잘 선택해야 하는 일이지만, 우리가 하는 선택과 그 결과에 따라서 삶의 모습은 달라질 것입니다. 드러나는 모습이라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광에 참여한다는 뜻이 될 것이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본보기를 내 마음대로 해석하여 내 마음과 생각대로만 살지 않는다면 내 삶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영광에 참여하게 될 일이라고 기대하면 좋을 일입니다.
28. 우리가 만날 수 있고, 읽을 성경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설명하겠다는 생각으로 준비했습니다만, 이에 관한 내용은 여러분이 시간을 두고 자꾸 반복하여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이셨으니, 우리가 그 사랑을 배워 하느님께서 보이신 사랑을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보이고 실천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