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란 말은 "인생이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는 뜻이다. 이 말은 불교 금강경 종장인 사구게의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에 있는 말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꿈과 환상, 물거품,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잘 관찰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세상의 무상을 바로 보라는 뜻이다.
인간의 몸은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생노병사(生老病死)를 하고 마음은 생겨나 머물다가 변하여 소멸되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을 하고 우주는 생겨나고 머물며 무너져 없어지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을 한다. 인생은 이 같은 변화무상을 초월할 수 없다. 서산대사는 입적할 때 “산다는 것은 한 조각의 구름이 일어남(生卽一片雲起)이요. 죽음은 한 조각의 구름이 없어짐 (死卽一片雲滅)이다.”고 말했다.
불교는 관찰의 종교다. 관찰자의 응작여시관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사물은 변하지만 관찰자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경지에서 관찰한다. 있는 그대로를 바라볼 뿐이며 시비하고 분별하거나 가르지 않고 선악이나 이해로 나누지 않는다. 고통과 즐거움에 대하여 여여(如如: 그대로 진실의 모습)할 뿐이다. 관찰할 때는 내가 거기에 없고 나는 없고 내 눈이 보고 내 귀가 들을 뿐이다.
이 같은 관찰의 기쁨은 지혜와 자비를 샘솟게 한다. 변하는 것을 쫒아 다니지 말고 무상한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무상한 것을 바로 보고 변하는 것에서 해방되어 변하지 않는 것을 완성해 가야한다. 상락아정의 관찰자가 되고 불성과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라. 무소유와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라고 하면서도 그 차원에 이르기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일까.
두 가지의 수행법이 있는데 첫째는 자기부정이다. 자기와 소유를 버리는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자만과 욕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속세를 버리고 출가해 삭발을 하고 소식과 체식을 하며 수도 생활을 한다. 그러나 육신이 있는 한 육신의 욕구를 부정하기 어렵다.
두 번째는 위타적(爲他的) 실천을 하는 것이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희생하며 남을 사랑한다. 남을 위해 나의 가진 것과 내 자신을 바친다. 남에게 베풀고 나면 마음이 너무도 편안하다. 작은 자비라도 실천하면 자신은 너무나 큰 희열을 느낀다. 선물을 받는 것 보다 주는 기쁨이 더 크다.
남을 위하는 위타적 행위를 하고 기쁨에 넘칠 때가 자기가 없어진 자기부정의 경지에 이른다. 응작여시관이요 상락아정이 된다. 세상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 수천억의 부정을 저지르고도 얼굴을 더 쳐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일생 동안 모운 돈을 이웃을 돕는데 쓰도록 이름도 숨기고 내놓는 사람도 있다.
부처가 절에만 있지 않고 세상에 있다고 하고, 하느님 대하듯이 사람을 대하라는 가르침도 있다.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 내가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면 그도 나를 그렇게 대하게 되며 구성원을 방편이나 도구로 대하면 믿고 따르지 않게 된다.
성현들 앞에 서면 고개가 숙여지게 되는 것은 예수님이 인류를 위해 죽었고 석가도 중생을 위해 죽었기 때문이며 나라와 세계를 위해 살다가 죽은 사람들도 자기를 희생하였기 때문이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 그 순간이야 말로 자기가 없어지고 바른 관찰 즉 정관(靜觀)을 하고, 깨달음을 얻으며 자비만 남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최선의 수행법이다.
글 : 이동한 헌정회(憲政會)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