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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懷州祠의 聖域化 事業
평화마을 하면 어쩐지 마음이 포근하고 정겹다. 평화는 평할 평(平)자와 될 화(化)자의 마을이다. 평화마을은 해발 518m 억불산(億佛山) 자락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읍에서 동남쪽에 뻗어있는 산의 모양은 국내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한 기묘한 자태를 보인다. 어찌 보면 파도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영화속의 한 장면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평화라는 이름은 신씨들로 인해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고려 때 억불산 연대봉(396,7m)의 봉수대를 관리하면서 왜구의 침입을 막은 신경원(申敬源)이 조정으로부터 땅을 하사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손자 신원수(申元壽)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평산인(平山人)의 화속지(化屬地)라 하여 평화촌이라는 마을이름이 붙여져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장흥읍에서 평화촌으로 통하는 길은 3개의 코스가 있다. 찾기 쉬운 길은 버스터미널과 군민회관 앞에서 들판을 가로질러 직선으로 뚫려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를 이용한다. 다른 하나는 명동가든 옆의 논을 가로지르는 길을 이용해서 마을 앞을 거쳐 가는 코스다. 군민회관 앞길은 자동차로 5분, 명동가든 옆길은 8분정도 소요된다.
마을 앞에 이르면 오른쪽에 농업용저수지 둑이 나타난다. 조금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은 내평화 마을로 간다. 오른쪽으로 90도를 꺾어들면 약30m 전방 언덕에 몇 채의 기와집이 시야에 들어온다. 여기가 바로 우리의 시조공․중시조공․충렬공․판사공․통선랑공 등 5현조의 위패를 모신 회주사(神室)와 백산재(講堂)가 자리 잡고 있다.
성지주변 환경은 이렇다. 백산재로 들어가자면 시조공의 사적비와 마주친다. 제각의 앞뜰격인 이곳에는 사적비 이외에도 신실과 강당의 안내판과 장학비 그리고 각종 비가 뜰 오른쪽에 세워있다. 강당으로 들어가자면 7m 안팎의 시멘트 계단을 거쳐 외삼문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정면 우람한 강당, 오른쪽에 관리사, 외쪽에 재기고가 있다.
신실은 강당 왼쪽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제기고와 강당 왼쪽 사이의 마당에서 보면 역시 5m 정도의 계단을 거쳐 신실 외삼문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참배하는 게 법도라고 한다. 나올 때는 신실 외삼문이나 재작 외삼문이나 왼쪽 문(나온 사람의 위치에서는 오른쪽)을 통해서 나오게 되어 있다. 계단을 걸을 때도 두발을 합해서 오르내린다고 한다.
강당 마당에서 주변을 살펴보자. 정면에는 푸르른 대나무 밭이 시원스럽게 보인다. 왼쪽 언덕 밑의 저수지는 우리 성지의 연못처럼 느끼게 한다. 수중을 헤엄치며 먹이를 찾고 있는 백조는 선경(仙境)의 운치를 자아낸다. 읍 쪽의 빌딩을 보면 속세를 벗어난 듯싶다. 그러나 코앞에 있는 민가가 유흥업소로 바뀌면서 성지의 풍광을 그르치게 한다.
1. 魏氏와 平化村과의 因緣
장흥 위씨와 평화마을과의 인연은 조선초로 올라가야 한다. 원래 우리 조상들은 장흥읍 동동리 현재 법원과 검찰청사 자리에서 살았다. 그 터는 백제 때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 신라 때 마읍(馬邑), 고려 때 수령현(遂寧縣)으로 이름이 바꿔지면서 영암의 속영이 됐다. 그 후 언젠가 장흥으로 이속(移屬)시켰다고 하나 확실한 기록은 없다.(이홍직 국사사전)
존재공(存齋公)께서 족보에 기록한 방촌(傍村)과 장흥부(長興府)의 연혁을 보자. 이 기록을 보면 지금 방촌지역은 백제 때 오차(烏次), 신라 때 오아(烏兒), 고려 때 정안(定安)이라 하였고, 고려 예종(睿宗) 때 장흥부로 개칭됐다 원종(元宗) 6년(1265․乙丑)에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됐다. 그 후 충선왕(忠宣王) 2년(1310)에 장흥부로 환원됐다고 한다.
그러므로 수령(遂寧)․오차(烏次)․회령(會寧)․장택(長澤) 등 4개 현(縣)을 관할하는 치소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령현의 경우 정확히 언제부터 어느 때까지 행정구역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리고 국사사전의 기록과 존재공의 기록과도 상이한 부분이 있다. 또한 수령현과 정안현 이름의 현이 없어진 이유가 장흥부의 발족으로 비롯된 것인지 의문이 있다.
존재공의 기록으로 보면 선조들은 옛 수령현의 치소자리에서 사셨다고 되어있다. 그러다 조선이 건국한 후 22년만인 1414년 집 자리를 치소자리로 내주고 쫓겨 나와야 했다. 여말 14세 판사공(判事公)의 고려조정을 위한 친위혁명기도와 윤귀택(尹龜澤)의 고변 등 당시의 상황에 관해서는 인터넷 홈페이지 장원봉 답사기에서 설명돼 있어 여기서는 생략한다.
당시 수란을 겪은 세대는 물려 9대에 이른다. 14세 판사공이 당사자이고, 15세 통선랑공, 16세 자온․자량․자공․자검 등 3대가 직접피해자라 할 수 있다. 전후 사정으로 보아 판사공은 장원봉 밑에서 살 때 고문의 후유증 등으로 이미 타계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평화로 이사할 때는 통선랑공과 아들 4형제 등이 주인공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당시의 선조들이 왜 평화를 제2의 보금자리로 선택하셨을까. 이에 대해서도 장흥 위씨 요람세거지편에서 자세히 적혀있다. 요약하면 평화들의 농지와 선영과의 가까움 등이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어떻든 무엇이 선택의 이유인지 확실치 않으나 할아버지께서는 평화로 이사해서 우리의 성지가 됐으니 거의 600년에 이르고 있다.
평화로 이사한 후 위씨들은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최대의 변화는 분파(分派)라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 외줄로 내려오던 자손이 평화로의 이사전후를 통해 이루어진다. 즉 16세 자온계는 능주․자량계는 관산, 행원, 여천․ 자공계는 사월파, 관북파로 갈리게 된다. 다만 막내 자검계는 현손대 이후 손이 끊기면서 계파를 이루지 못하고 소멸되게 된다.
또 하나의 변화는 생활의 무대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그 때까지 조상들은 사는 곳이 다르지 않았다. 항상 같은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식구가 불어나면서 더 이상 한집에서 살기가 어려웠다. 결혼과 당시의 여러 요인을 감안해서 흩어 졌다. 자공(自恭)의 경우 용산면 사월방으로 가서 손자까지 두었으나 천리타향 함경도로 삶의 무대를 옮겼다.
평화에는 관산과 행원파인 18세 유형(由亨)과 유정(由貞) 형제와 여천파조 용(庸) 등이 산다. 형인 습독공(習讀公)은 다전등(茶田嶝)에 산정재(山亭齋)를 짓고 자손들을 가르쳤다. 한편 공은 당대의 문사들과 종유하고 지낸다. 그들 가운데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과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1491~1554) 등과 수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평화의 보금자리에서 지킨 것은 유정계의 행원파(杏園派)다. 족보의 기록으로는 대략 200년 안팎동안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습독공과 4촌간인 18세 용(傭)은 여천에 정착한다. 이후 19세 진보(晉寶)․진수(晉秀)․진현(晉賢)은 능주․장동․어산 등지로 흩어진다. 진수계는 운주동에, 동생 진현계는 관산 당동으로 장가들면서 그곳에 정착하게 된다.
1) 平化村의 先祖 遺跡
우리 위씨와 평화촌 간의 인연은 역사를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5세 통선랑 휘 덕룡(悳龍) 할아버지께서 장원봉 밑 동동리에서 1414년에 이곳으로 이사하셨을 것으로 보면 2006년을 기준으로 꼭 592년이 된 셈이다. 실로 장구한 세월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습독공 형제의 유적만 남아 있을 정도에 그치고 있다.
오늘 우리 후손들이 이용하고 있는 백산재(栢山齋) 강당과 외평화(外平化)에 있는 추원당(追遠堂)이라는 정각이 그것이다. 습독공이 사셨던 15세기와 16세기에는 산정재가 공의 묘소자리에 있었다. 다만 그 정자 또는 재각이 언제 어떤 연유로 없어진지는 알 수 가 없다. 그 후 현재 백산재 자리에 초가지붕의 재각인 다산재(茶山齋)가 있었다.
초가인 다산재는 너무 낡아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회은공(悔隱公) 이 1936년 자기 집 사랑채를 사비를 들여 뜯어나 재조립해 문중의 재각으로 헌납한 것이다. 문제의 사랑채는 1895년에 지은 장흥부의 동헌(東軒)건물이었다. 이 건물을 1934년 일제가 경찰서를 신축하려고 철거한 것을 공(公)이 구입, 사랑채로 이건한 것이다.
한편 오현조 신실인 하산사(霞山祠)는 1975년에 신축한 건물이다. 우리는 시조공 등 상계(上系)조상의 위패를 모신 신실이 없었다. 그러다 5세조인 충렬공 묘소 인근에 재각인 하사재를 1910년대쯤 마련했다. 그 후 1925년부터 재각 동편에 설단, 시조공과 14세 판사공의 제향을 올렸다. 그리니까 시조공이 동래한 후 1287년 만에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러나 후손들은 하산재에서 드린 설단제사가 미흡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 이유는 선조들의 위패를 모실 신실이 가장 아쉬웠다. 다음으로는 재각이 외진 곳에 있어 후손들이 제향에 참여하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여러 해 숙의를 거듭한 끝에 우리의 성지인 백산재에 신실을 짓거나 그 것이 어려우면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드리기로 확정했다.
처음에는 자금이 없어 제단을 만드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 후 전체 후손을 대상으로 모금을 해서 신실을 짓기로 했다. 그런데 덕운(德雲) 황량(滉良) 종원이 딸의 혼수비용 240여만원을 희사, 오늘의 하산사라는 신실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신실이 마련된 후 당초 시조공, 판사공에서 중시고공, 충렬공, 통덕랑공 등 5위의 선조에게 제향을 드린 것이다.
한편 외평화(外平化)에도 선조들의 유적이 있다. 그곳에는 습독공의 동생이자 행원파(杏園派)의 파조이신 휘 유정(由貞)의 정각인 추원당(追遠堂)이 남아 있다. 지금은 관리가 소홀해서 외롭게 서 있지만 이곳 평화가 우리 장흥 위씨의 성지임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유적이 아닐 수 없다.
2) 聖域化 事業의 時急性
위씨의 성지 평화는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백산재 입구에는 2층 벽돌양옥이 들어서 찻집으로 성업 중에 있다. 그 뒤쪽으로 기와집 두 채가 있는데 한 곳은 어린이 집으로 이용되면서 여러 놀이기구가 설치돼 유원지로 변해가고 있다. 자칫하면 성지 앞뜰이 유흥음식점과 유원지로 둔갑, 난장판지대로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 놓여 있다.
우리가 성지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금 대책을 세워야한다. 자고로 신실과 재각의 주변은 고요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앞뜰에 음식점과 유원지가 들어서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럼으로 우리는 문중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하는 게 시급하다. 우선 두 채의 집만이라도 구입, 유원지화를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도문중이 나설 것을 제의 한다. 시급한 것은 대밭 밑에 있는 두 채의 가옥을 매입하는 것이다. 소요자금은 모금을 하거나 아니면 CD사업을 해서 수익금으로 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기묘대동보 잉여금을 투입해서라도 성역화의 저해요소를 없애야 한다.
물론 이 제안에 반대할 종원도 많을 것이다. 사람의 의견은 모두 같을 수 없다. 전적으로 동의할 사람도 있고, 반대할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하산사 주변이 술집과 놀이터로 둔갑해서 장터처럽 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그런 것이다.
만일 유흥음식점이 난립했을 때를 가정해 보자. 그 때는 아무리 큰돈을 투입해도 그런 업소를 매입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나서자는 것이다. 어찌 보면 현명할지 모른다. 매사는 타이밍을 맞혀야 한다. 한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에 오늘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또 이때를 놓치면 성역화는 영영 불가능해 질 수 있다. 그래서 늦었을 때가 빠르다고 한 것이다. 우리 모든 종인들은 하산사 성역화만은 남의 일이 아니고 곧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고 관심을 가져줘야 한다. 우리의 성지를 남이 만들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2. 文化財로 指定된 栢山齋
백산재(栢山齋)가 문화재로 지정됐다. 장흥 위씨 소유의 건물로는 관산읍 옥당리 천관산 기슭에 있는 지방문화재 제72호인 장천재(長川齋)에 이어 두 번째로 문화재가 됐다. 선조들의 숨결이 스며있는 건물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우리의 자랑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장흥 위씨의 시조 등 오현조의 위패를 모신 성지(聖地)의 중심건물이고 보면 더욱 감개무량하고 가슴 뿌듯한 일이다.
백산재의 유래를 알아보자. 평화하면 어쩐지 마음이 포근하다. 차분하고 정감어린 말과 소리로 느껴진다. 사람들의 머리와 마음속에 난리나 전쟁 같은 개념이 아니고 태평(泰平)스런 이미지인 평화(平和)가 있는 마을처럼 편안함을 준다. 사람들에게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그러리라. 우리 국민은 너무도 많은 난리를 겪고 살았기에 평화라는 말을 소중하게 여긴지도 모른다.
장흥 위씨의 성지라 할 평화는 평할 평(平)자와 될 화(化)자의 마을이다. 평화마을은 해발 518m 억불산(億佛山) 자락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읍에서 동남쪽에 뻗어있는 산의 모양은 국내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한 기묘한 자태를 보인다. 어찌 보면 잔잔한 파도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쩌면 편안한 말(馬) 등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영화속의 그림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평화라는 이름은 신씨들로 인해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고려 때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는 한편 억불산 연대봉(396,7m)의 봉수대를 관리하는 책임자인 신경원(申敬源)이 조정으로부터 땅을 하사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손자 신원수(申元壽)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평산인(平山人)의 화속지(化屬地)라는 의미를 줄여서 평화촌이라는 마을이름이 붙여져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1) 600년을 이어온 애환
장흥 위씨와 평화마을과의 인연은 조선초지로 올라가야 한다. 원래 우리 조상들은 장흥읍 동동리 현재 법원과 검찰청사 자리에서 살았다. 그 터는 백제 때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 신라 때 마읍(馬邑), 고려 때 수령현(遂寧縣)으로 이름이 바꿔지면서 영암의 속영이었다. 1156년 정안현이 장흥부로 승격되면서 편입되고 회주목, 장흥부, 조선건국과 함께 장흥도후부 치소가 됐다.
존재공(存齋公)이 기록한 방촌(傍村)과 장흥부(長興府)의 연혁을 보자. 이 기록을 보면 지금 방촌지역은 백제 때 오차(烏次), 신라 때 오아(烏兒), 고려 때 정안(定安)이라 하였고, 고려 예종(睿宗) 때 공예태후의 출신지라 해서 장흥부로 개칭됐다. 그후 원종(元宗) 6년(1265․乙丑)에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됐다. 충선왕(忠宣王) 2년(1310)에 회주목을 장흥부로 환원됐다고 한다.
장흥부로 승격은 정안현과 수령현의 통합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안현이 장흥부로 승격되면서 수령현이란 행정구역이 증발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치소는 정안현의 방촌으로 통합되었다고 추정된다. 이로 미루어보면 우리 조상들은 장흥부 승격시점을 전후해서 옛 수령현의 치소에 보금자리를 잡았다고 보인다. 적어도 원감국사 3형제는 여기에서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고려 말로 판사공이 이성계세력을 뒤엎으려다 적발돼 고초를 당한다. 설상가상으로 중령산(中寧山) 인근에 있던 1414년 장흥부가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비좁다는 이유로 선조들이 살고 있던 자리를 내주고 나와야 했다. 수령현 자리에서 약 200여년간 살다 쫓겨난 것이다. 이 수난시대의 주인공은 14세 판사공과 아들 15세 통선랑공, 16세 자온․자량․자공․자검 등 3대라 할 수 있다.
평화로 이사한 후 위씨들은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최대의 변화는 분파(分派)라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 외줄로 내려오던 자손이 수령현 마을에서 평화로 이사한 이후에 이루어진다. 즉 16세 자온계는 능주(綾州)․자량계는 관산, 행원, 여천, 자공계는 사월파, 관북파로 갈리게 된다. 다만 막내 자검계는 현손대(玄孫代) 이후 손이 끊기면서 계파를 이루지 못하고 소멸되게 된다.
또 하나의 변화는 생활의 무대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그 때까지 조상들은 사는 곳이 다르지 않았다. 항상 같은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식구가 불어나면서 더 이상 한집에서 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결혼 등 여러 요인을 감안해서 흩어 졌다. 자공(自恭)의 경우 용산면 사월방(沙月坊)으로 가서 손자까지 두었으나 사민(徙民)정책에 따라 천리타향 함경도로 삶의 무대를 옮겼다.
평화에는 관산과 행원파인 18세 유형(由亨)과 유정(由貞) 형제와 여천파조 용(庸) 등이 살았다. 형인 습독공(習讀公)은 다산등(茶山嶝)에 산정재(山亭齋)를 짓고 자손들을 가르쳤다. 한편 공은 당대의 문사들과 종유하고 지낸다. 그들 가운데 생육신의 한 사람인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과 귀양 온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1491~1554) 등과 수창하기도 했던 곳이다.
2) 栢山齋의 來歷과 文化財
오늘 문화재로 지정된 백산재(栢山齋) 강당과 습독공이 15세기와 16세기에는 산정재가 공의 묘소자리에 있었다. 다만 그 정자 또는 재각이 언제 어떤 연유로 없어졌는지는 알 수 가 없다. 그 후 현재 백산재 자리에 초가지붕의 재각인 다산재(茶山齋)가 있었다. 다산재는 너무 낡아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다. 문중의 원로들은 신축을 꾀했지만 뾰쪽한 방법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회은공(晦隱公) 원량(元良․1882~1945)은 자기 집 사랑채를 문중에 헌납하기로 결심했다. 문제의 사랑채는 1895년에 지은 장흥부의 동헌(東軒)건물이었다. 이 건물을 1934년 일제(日帝)가 장흥경찰서를 신축하려고 철거한 것을 회은공이 구입, 일단 부산면 기동(基洞) 자신의 집 사랑채로 이건한 것이다. 그러나 회은공은 붕괴직전의 재각을 보고 모른척할 수 없었다.
이미 옮겨지었지만 사랑채를 문중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1936년 다시 사랑채를 뜯어 옮겼다. 초가인 다산재 재각을 뜯어내고 그 자리에 이축(移築)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이축에 따른 비용과 공사감독도 자신이 맡아했다. 그가 공사를 하면서 고구마로 시장기를 때웠다니 아마 그해 늦가을로 짐작된다. 그렇게 해서 이건공사를 마친 후 문중에 헌납한 것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과정과 이유를 보자. 도문회는 2007년 장흥군을 통해 전남도에 문화재지정을 요청하는 공문을 접수했다. 그러나 서류미비 등으로 반려됐다. 그 후 서류를 보완해 다시 접수했다. 사계의 전문가들이 현장을 답사하고 사실여부를 조사했다. 그것도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여러 차례에 걸쳐 조사가 이루었다. 그런 연후에 4명의 전문가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았다.
『백산재는 문중의 재실(齋室)이다가 장흥 위씨 문중의 사우인 하산사의 강당으로 함께 활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원래 조선후기 장흥부의 관아(官衙)건물로 2차(二次) 이건(移建)을 통해 193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온 것이다. 당시 이건 과정에서 거의 원형 그대로 옮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백산재는 건축부재나 결구수법(結構手法) 등으로 보아 조선후기인 19세기경의 건물로 보인다.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된 본 건물은 비록 이축과정에서 다소 변형된 구조기법을 보이기는 하나 넓은 대청과 온돌방 등 조선후기 관아건물 구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들보 등 사용부재도 매우 장대하고 견실하며, 기둥은 모두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5량 가구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백산재는 조선시대 행정관아의 건물이 거의 없어지는 터에 보존이 잘 되어 있어서 관아건물 연구 자료에 도움이 되고 장흥부 관아의 복원측면, 공공기관 건물이 장소와 시간의 변화에 따라 용도가 변화되는 점을 알 수 있는 측면, 문중의 지속적인 보존노력으로 새롭게 사우 강당으로 정착한 측면 등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라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전라남도는 2008년 12월 26일 문화재지정을 위한 지정예고 1개월(2009년 1월 25일)의 공고기간을 거쳐 전라남도는 문화재보호법 제72조와 전라남도 문화재 보호조례 제 3, 5, 7, 9조와 동시행규칙 제 3조의 2호 등의 규정에 따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지정대상 제272호로 지정한 것이다. 이어 전남고시 제2009-126호로 지정 고시된 지정문화재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의 지정구역(보호구역) 지형도면을 토지이용규제기본법 제8조 동시행령 제7조에 따라 고시했다.
3) 東學軍에 전소된 官衙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서 비롯된 동학농민혁명의 최후 항전지는 장흥이다. 1892년 2월 대궐 앞 시위가 효시가 됐다. 전봉준의 농민군은 1894년 백산(白山)에서 2차 봉기 후 3월 21일 고부관아를 점령한다. 이후 5월 7일 전주화약을 맺어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에 착수했다. 그러나 일군이 경복궁을 점령, 노골적인 침략야욕을 보이자 전봉준은 3차로 9월 13일 삼례에서 봉기한 후 일군을 응징하기 위해 북상하다 우금치전투에서 대패해 궤멸됐다.
장흥인의 동학입문에 두 설이 있다. 하나는 1891년 해월로부터 수도설(受道說)이고 다른 하나는 전라도 접수로서의 수도설이다. 그러나 이방언(李芳彦)․이인환(李仁煥)․구교철(具敎徹)․이사경(李士敬)․강봉수 등은 전봉준의 2차 격문에 따라 가담한다. 강진에서는 김병태(金炳泰)․남도균(南道均)․안병수(安炳洙)․윤시환(尹時煥)․윤세현(尹世顯) 등이 동참한다. 장흥에서는 이사경이 접주로 6월에 용계면(龍溪面, 현 夫山)에 집강소가 설치되어 활동했다.
동학사태의 안핵사(按覈使)로 임명된 부사 이용태(李容泰)의 후임으로 1894년 7월 30일 박헌양(朴憲陽)이 부임했다. 그는 장흥의 동학을 다스리기 위해 향교의 유림들과 토벌계획을 마련하는 한편 수성소(守城所)를 설치, 도당을 체포하면 포살했다. 전봉준의 농민군이 북상할 당시 이방원 휘하병력은 5천명이 넘었다. 박부사가 강경책을 쓰자 10월 16일부터 장평 사창(社倉)으로 집결했다. 11월 중순에는 웅치․회령․대흥 등지에도 수천명이 웅거함을 확인했다.
주력부대는 목촌(木村)에 이방원, 용계(자라번지)는 이사경, 웅치는 구교철, 고읍(관산)은 김학삼(金學三)이 접주였다. 당국은 전봉준의 주력부대가 북상할 틈을 이용하려 했다. 광주에 머문 손화중과 최경선은 나주 수성군과 접전했으나 그때마다 패해 12월 1일 남평과 능주로 후퇴해 그 일부가 장흥까지 내려왔다. 이 때문에 전북 금구출신 김방서(金方瑞)․화순 김수근(金秀根)․능주 조종순(趙鍾純) 등이 합세하면서 장흥의 농민군은 엄청나게 불어난 것이다.
사창에 집결된 이방원부대 1만명은 12월 1일 벽사역(碧沙驛)으로 진격했다. 찰방 김일원(金日遠)은 가족을 데리고 성안으로 대피했다. 그는 농민군에게 성이 함락될 것을 직감하고 병영으로 찾아가 병사 서병무와 나주 초토영에게 다급하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양쪽 모두 자신들도 위태롭다며 거절했다. 농민군은 벽사역을 불태웠다. 12월 5일 새벽에는 어산 접주 이방원, 용계면 이사경, 웅치 구사철 부대 3천여 병력이 동동리 소재 장흥부청을 향해 쳐들어왔다.
농민군은 천주(天主)부적을 그린 수건으로 머리를 두르고 주문을 외면 죽창을 들었다. 박부사는 중과부적으로 대적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모두에게 살길을 찾으라며 혼자 동헌을 지켰다. 농민군이 쇄도해서「선화당」에 앉아있는 그에게 인수(印綬)와 병부(兵簿)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는줄 수 없다거절했다. 그러자 그를 끌고 동헌 밖에서 죽였다. 박부사의 시신은 12월 7일 유림 김용후(金容厚)와 박우인(白禹寅)이 수습, 모래사정에 가매장했다.
농민군에게 함락된 장흥성은 완전히 불바다가 됐다. 모든 부청의 건물들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들이 벽사역과 장흥부청에 대해 크게 앙심을 가진 이유는 전임 부사 이용태가 안핵사로 임명되면서 찰방의 병력을 데려가 농민군을 가혹하게 다루고, 신임 부사도 지방의 도당을 발호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강경일변도로 대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부는 장흥부의 관아를 이듬해인 1895년 신축했다. 그 가운데 백산재의 전신인 동헌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강제로 한․일 합방이 이루어진 후 국사는 일본의 의도대로 추진됐다. 이른바 근대화를 위한 작업이 강력히 추진됐다. 그 가운데 지방조직도 대폭 개편됐다. 종전의 감사․목․부․군․현제도가 시와 군으로 개편되고 치안은 경찰서가 전담하게 됐다. 그래서 시군에 경찰서가 들어섰다. 장흥도 1934년 동헌자리에 경찰서 건물을 세우게 됐다. 한식인 동헌을 뜯어내고 양식건물을 신축하기 위해서다. 동헌건물의 목재를 회은공이 자신의 사랑채로 앉히기 위해 구입해서 이건했던 것이다.
그러니 백산재는 동학농민군에 의해 전소된 장흥부의 동헌건물로 1895년에 신축되어→회은공의 사랑채→장흥 위씨 재각→강당을 거쳤다. 한 개의 건물이 이렇게 다양한 용도로 변신을 거듭한 경우는 매우 희귀한 사례일 것이다. 그러기에 다른 어떤 건물보다 가치가 있는 건물일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전문가들의 평가대로 19세기 조선 관아의 건물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그러므로 조선조 관아의 건축양식을 공부하는 전문가와 학생들에게는 살아 있는 건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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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
3) 朴益洙「장흥동학사 105쪽)
4) 吳知泳「동학사 초고본」24, 25쪽
5) 박기현「日史 甲午 7월 3일조」
6) 일부 동학란 기록에는 어떤 과부가 암장했다고 하나 당시 희령(會寧)유림 덕파(德坡) 문면행(文冕行)의 동학기에는 시신을 수습해 모래사장에 가매장한 사람의 인적사항을 명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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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亡者의 歸鄕
숨이 멎었다
살갗이 검게 변한다
역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냉동고로 옮겨 부패를 막는다
산 사람들의 복잡한 예법을 거친다
쓰레기 처리하듯 산이나 화장장으로 옮긴다
구덩이를 파서 묻고 그 위에 산봉우리를 만든다
타고 남은 재를 항아리에 담아 선반에 진열한다
이승을 하직하고, 저승으로 가는 절차가 끝난다
세상에 나왔다 가면서 거치는 통과의례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망자의 귀향은 막을 내린다.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산자들은 잊어간다
그게 인생이다
(2009. 4. 7)
원산 위정철(32세, 존재학연구소)
원산 시(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