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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상왕봉, 바다 위 인수봉인 숙승봉에 크게 반하다
1. 일자: 2023. 2. 16 (목)
2. 산: 심봉(598m), 상왕봉(644m), 백운봉(601m), 업진봉(544m), 숙승봉(461m),
3. 행로와 시간
[대구미마을(11:50) ~ (310봉/385봉/460봉) ~ 대신리 갈림(12:56) ~ 심봉(13:17) ~ 상왕봉(13:32~55) ~ (하느재/임도) ~ 백운봉(14:51) ~ 업진봉(15:09) ~ 숙승봉(15:41) ~ (동백숲) ~ 불목저수지(16:23) ~ 주차장(16:30) / 10Km]
< 상왕봉 산행을 준비하며 >
완도 상왕봉에 간다. 가야할 산으로 마음먹은 지 오래된 곳인데, 갈 길이 멀어 미루다 이제야 기회를 얻었다. 그새 상황봉으로 알고 있는 산이 상왕봉으로 바뀌었다. 2017년의 일이다. 큰 코끼리 상왕(象王)은 불교에서 부처를 말한다. 부처의 산이다.
상왕산은 완도의 맹주이며 지붕이다. 능선에 서면 삼면으로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북쪽으로는 산줄기가 육지를 향해 힘차게 뻗어 있다. 상왕산은 난대림의 보고다. 수림은 동백나무와 후박나무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 내륙의 산과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 숲이 울창하게 보존된 데에는 장보고의 죽음 이후 완도 사람들은 전라도 김제로 강제 이주됐다가, 고려 공민왕 때부터 다시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것에 연유가 있다. 500년동안 비워 둔 섬에 숲이 울창해진 게다. 아픈 역사의 산물이다.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가야할 길을 3등분 해 본다. 5개의 봉우리를 넘어야 한다. 들머리에서 심봉 넘어 상왕봉까지는 3km 90분을 예상한다. 385봉과 460봉 넘어 정상으로 가는 등로는 거칠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산죽과 뒤엉켜 있고 집채만한 바위를 우회하기도 한다. 심봉은 혹처럼 불쑥 솟아오른 암봉으로 정상에 서면 막힘 없는 조망이 펼쳐진다. 완도읍과 신지대교, 장보고대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상왕봉에는 커다란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인근 섬들의 파노라마 풍광을 즐길 수 있다.
정상에서 백운봉까지는 2.5km 거리다. 임도가 이어지는 하느재까지 1.4km가량 완만한 내리막이고 두 개의 전망데크를 지난다. 업진봉까지는 30분 완만하게 내려간다. 상봉에서 업진봉까지는 3.9km 100분쯤 걸릴 것이다. 숙승봉은 그림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특이한 형상의 거대한 바위 봉우리로다. 혹자는 팽이를 뒤집어 놓은 모습이라 한다. 100여m 높이 암봉에는 철 계단과 로프가 매여 있다. 시원하게 열려 있어 조망이 좋다. 숙승봉에서 날머리 불목저수지까지 2.1km 내려가는 길은 사납다. 하지만 환상적인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룬 터널 길은 힘듦을 잊게 한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발그레하게 피어 있는 동백의 꽃말은 ‘너만을 사랑해’ 이다.
총 10km 5시간의 산행을 예상한다. 글로 길의 대강은 그려지지만 감이 흐릿하다. 현장이 답이다.
< 희망사항 >
당초 무박산행을 계획했다가 버스 안에서 뒤척이면서 잠을 설칠 일이 두렵고, 일출 전 3시간 가까운 컴컴한 산행이 싫어 당일로 변경했다. 완도는 청산도 섬여행 이후 2년만이다.
산행을 준비하며 상왕봉을 특징지을 키워드를 정리해 본다. 장보고의 자취, 난대림, 섬 산 위에서 굽어보는 바다, 동백의 꽃말 ‘너 만을 사랑해’ 등이다. 길을 걸으며 풍경을 바라보며 되새겨 볼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당연히 성사되겠지 하던 산행이 성원 미달로 취소될 위기에 처한다. 산행 준비 기록을 쓰는 월요일 저녁까지 성사 여부 안내가 없다. 취소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려볼 생각이다. 그만큼 완도행을 기다려 왔다.
< 완도 가는 길에 >
갈 길이 머니 출발도 이르다. 버스에는 20명이 탑승했다. 빈 자리가 많다. 완도는 아마도 당일 산행으로는 가장 먼 거리가 아닌가 싶다. 길이 머니 준비하는 호흡도 길어야 하고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지만, 한 번 몰입된 여행 준비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덕분에 꽤 괜찮은 새 정보를 얻는다.
군산에서 한 번 머물고 쉼 없이 달린 끝에 완도에 들어선다. 바다와 포구의 모습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낸다. 날은 흐리지만 바다가 있는 풍경은 근사하다.
어느 낯선 도로에 내린다. 시간은 11시 50분이다. 무척 멀다.
< 대구미 ~ 상왕봉 >
시작 고도는 채 50m가 되지 않는다. 초입부터 거친 돌길이다. 곁눈으로 보는 나무들은 확연히 육지와 다르다. 겨울이지만 푸른 잎을 간직하고 있는 나무가 꽤 많다. 된비알이 이어진다. 숨을 고르며 천천히 오르지만 트래킹과 작은 배낭에 길든 몸이 버거워 한다.
30여분 1km쯤 빡 세게 걷자 첫 전망이 열린다. 고도는 300미터 어름이다. 너른 들녘과 마을이 보이고 뒤편으로 바다가 펼쳐진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엷은 코발트색 하늘도 풍경 만들기에 한 몫을 한다.
길은 잠시 순해지더니 다시 돌비탈이 이어진다. 바위 난간에서 또 풍경이 열린다. 만만치 않은 길에 풍경이 힘이 되어준다. 대신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이정목 앞에 선다. 2km 조금 넘는 거리를 한 시간 넘게 걸었다. 섬 산이라 600미터지만 북한산급의 높이다.
심봉 가는 길은 암릉이다. 이 험한 곳에 멧돼지가 땅을 파헤쳐 놓았다. 검은 흙이 암봉에 공포를 더한다. 조심스레 오른다. 남쪽 멀리 상왕봉이 거대한 모습을 드러낸다. 우뚝 솟은 모습이 장관이다. 정상에 사람들이 서성인다. 13:17 심봉에 선다. 598m의 정상석이 거대하다. 바라보는 풍경에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다. 멀 길을 온 보람을 첫 봉우리에서부터 찾는다. 흐린 하늘이 이국적이고 몽환적인 풍경에 일조한다. 기대 이상이다. 상왕봉의 모습은 조금 더 선명하다.
심봉에서 상왕봉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그래도 봉우리를 잇는 길에는 오르내림이 있었다. 정상에서 보는 풍경 욕심에 걸음이 빨라진다. 13:32 상왕봉에 선다. 커다란 스카이워크가 놓여 있다. 인증 사진을 찍은 후 바다 풍경에 빠져든다. 섬을 잇는 다리들이 보이고 완도 읍내 풍경이 손에 잡힐 듯 분명하다. 멀리 바다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서로 연결될 듯 점점이 이어진다. 세계 어느 명소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풍경이다. 오직 다리 품 팔아 산에 오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를 맘껏 즐긴다. 데크 위에 자리를 편다. 최고의 바다 풍광을 앞에 두고 먹는 음식은 그 어느 것이라도 최고의 성찬이다. 오랜 만에 차 한 잔의 호사도 누려본다.
정상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 중에는 인근 파출소에서 온 경찰들도 있다. ‘와! 우리 파출소도 보이네.’ 란 여경의 말에서 남도의 구수한 말투가 느껴진다. 여러 모로 완도는 풍요의 섬으로 기억될 것이다.
< 상왕봉 ~ 숙승봉 >
정상에서의 시간은 후딱 지나갔다. 쉬고 일어났더니 추위가 느껴진다. 상왕봉과는 이별이다. 다시 또 오고 싶은 곳이다.
백운봉까지는 2.5km 거리다. 길은 초반 내리막이 거칠더니 이내 순해진다. 나뭇가지에 파랗고 노란 표지가 나부낀다. 이 길은 남파랑길의 일부다. 기대하지 않은 만남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백운봉은 하얀 화강암 암괴로 무척 멀고 험하게 다가온다. 저길 오른다 말이지 하는 걱정이 앞선다. 날도 더 흐려진다.
상왕봉에서의 화려한 풍광이 멀어지자 숲이 눈에 들어온다. 회색과 녹색과 갈색의 은은한 조화가 근사하다. 잎을 떨어낸 남도의 겨울나무가 저마다의 거리로 숲을 이룬다. 조릿대도 간간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낯선 모습과 색의 조화에 빠져든다. 이것이 바로 난대림이다. 평소 접하지 못한 식생이 무척 다양해 보인다.
하루재까지 꽤 내려선다. 임도가 등장하고 남파랑길과는 이별이다. 휴양림과 길이 연결되나 보다. 곧 오르막이 등장한다. 또 오른 걱정이 앞선다. 눈에 들어온 공지선이 몇 번이었는지 모르겠다. 조우한 버스 일행들도 이구동성 ‘만만치 않다’고 힘겨워 한다. 그 버거움의 끝은 백운봉이었다. 암봉 자체가 정상석 역할을 한다. 암괴가 켜켜이 쌓여 있는 틈으로 조심스레 걸어 봉우리에 닿는다. 사각 바위에 ‘백운봉 601m’이란 글씨가 써 있다. 특이한 앉음새에 반한다.
업진봉으로 향한다. 고도 차는 백운봉과 50m 수준이다. 평탄한 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지금껏 본 것 만으로도 상왕봉은 산림청 200대 명산 중 최고의 명품 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섬에 600미터가 넘는 높이도 그렇고, 5개의 각기 특성 있는 봉우리의 존재 그리고 우거진 남대림과 무엇보다 바라보는 바다와 산의 조화가 기가 막히게 훌륭하다.
업진봉에 선다. 암봉 위가 아니고 바위 위 평지에 정상석이 서 있다. 돌아보는 눈에 지나온 백운봉이 우뚝하다. 눈을 바다 쪽으로 돌리는 순간, ‘인수봉이 왜 여기에 있지?’ 라는 착각이 들만큼 거대한 암봉이 바다 위에 솟아 있다. 비현실적일 만큼 놀랍고 멋진 풍광에 말을 잊는다. 봉우리 뒤로 푸른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의 존재가 더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내가 섬에서 본 풍광 중 단연 최고다. 더욱 놀라운 건 숙승봉 정상 위에 사람들이 어른거린다는 게다. ‘저기를 오른다 말이지. 말도 안돼.’ 란 생각이 들었다. 놀라움의 연속이다.
업진봉에서 숙승봉은 꽤 멀었다. 봉우리를 내려서 임도와 만나고 또 길게 내려서자 트랭글이 부저를 울린다. 거대한 숙승봉 바위를 우회하여 돌아든다. 긴 철계단과 밧줄을 잡고 낑낑거린 끝에 높이 461m, 숙승봉 정상에 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봉우리 위에서는 암봉의 화려한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불목리 일대의 바다 풍경이 그만이다. 날머리 저수지 모습도 보인다. 시원한 그러나 그리 춥지 않은 바다 바람이 부는 암봉 위에서 오늘을 기억한 사진들을 찍는다. 새롭고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몰라서, 외면 해서 그렇지 우리 국토에는 숨은 보물이 참 많다.
< 숙승봉 ~ 불목리 >
숙승봉에서 불목리까지는 2km가 조금 넘는 거리로 평지라곤 하나 없는 거친 내리막의 연속이었다. 간간이 동백이 꽃을 피우고 있었지만 화려하진 않았다. 등로가 맞나 하는 의심이 들만큼 숲이 짙고 비탈도 심하다. 예상보다 거친 길에 당황하며 조심스레 내려선다.
상왕봉의 산 봉우리 이름이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운봉은 흔하지만 코끼리 상자를 쓰는 상왕봉도 그렇고, 심봉/업진봉/숙승봉은 그 어느 곳에도 없는 봉우리 이름이 아닌가 싶다. 흔지 않아서 더 귀하고 매력 있어 보인다.
심봉 오를 때까지 만해도 시간이 빡빡하겠다 여겼는데, 날머리가 가까워 올수록 산에서 좀 더 여유 있게 풍광을 즐길 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들었다. 약속된 시간보다 50분을 먼저 내려왔다. 버스는 저수지와 청소년야영장을 지나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겨울 해가 뉘엇뉘엇 넘어가고 있다. 남도 섬에서 기억에 오래 남을 산행을 했다.
< 에필로그 >
산행 전 준비한 지도에는 아직도 상황봉이라는 명칭이 선명하다.
상왕봉은 200대 명산이 아니라 100대 명산에도 상위에 오를 산이라 판단한다. 수도권에서 거리가 멀어 덜 알려진 이유겠지만 사람들이, 특히 관에서 판단하는 명산의 조건에 이의를 제기해야 할 만큼 명품이었다. 특히, 심봉과 상왕봉에서 내려다 보는 바다 풍경과 업진봉에서 바라보는 숙승봉의 우람한 모습은 비교를 불가할 만큼 멋졌다. 먼 길을 달려온 보람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
긴 귀경길, 메모장에 기록을 들쳐본다. 소설 토지를 다시 읽고 있다. 20년 만이다. 그때는 줄거리 중심으로 읽었다면 이번엔 묘사와 인물 중심으로 읽는다. 읽는 내내 마음은 구천이, 최치수, 용이, 수동이, 김평산, 강포수, 김훈장 등이 되어본다. 800명이 넘는 방대한 인물을 등장시키며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하는 치밀한 서사 전개와 디테일한 묘사에 감탄하며, 무엇보다 이리 맛깔나게 우리말을 표현하는 하는 재주에 아니 놀랄 수 없다. 감사의 마음도 솟는다. 박경리 선생에게 큰 존경을 표한다.
토지 역시 8000페이지가 넘는 긴 분량에 제대로 끝까지 읽은 이들이 많지 않을 것이라 여겨진다. 상왕봉과 토지, 멀다고 길다고 그 본래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리리란 생각이 들었다. 대신 찾아 확인하고 읽은 자의 감동은 그 어느 것보다 크다는 확신이 든다.
저녁 10시가 넘어 사당에 도착했다. 졸음과 피곤이 몰려든다. 그래도 완도 상왕봉 산행은 길게 기억될 값진 추억이었다.
많은 것들에 감사한다.
첫댓글 가보고 싶네요. ^^
멋집니다. ^^
가 볼만 합니다.
기대 이상 이었습니다.
멀어서 그렇지 남도 섬에는 좋은 곳이 참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