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노고단~화엄사 (2024. 7. 28)

[느리게]

비 오는 날의 데자뷰, 노고단과 화엄사
 

1. 일자: 2024. 7. 27 (토)
2. 산: 지리산
3. 행로와 시간
   [성삼재(03:13) ~ 노고단대피소(04:10~06:15) ~ 노고단(06:43) ~노고단대피소(07:15~30) ~ 무넹기(07:53) ~ 코재(08:08) ~ 집선대(08:35) ~ 국수등(09:05, 화엄사 3.5km) ~ 연기암(09:45) ~ 화엄사(10:25~40) ~ 대형차주차장(11:03) / 13.7km]
 

< 지난 추억 >

  2017년 7월 새벽 2시 화엄사 어느 모퉁이, 눅눅하고 습기찬 공기는 긴 버스 이동에 지친 마음을 더 가라앉힌다. 어디선가 세찬 물소리가 들리고 사위는 어둠에 젖어 있다. 예상보다 이른 시간이다. 화대종주를 꿈꾸지만 힘 닿는 대로 걸어보자는 심산으로 나선 세 남자 걸음은, 작은 돌다리를 건너는 것으로 지리의 품으로 들어선다. 1차 목표인 노고단 대피소까지는 6.5km 거리이다. 맨 위쪽 코재 부근 경사 급한 너덜지대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산행하기에 비교적 수월한 계곡길이라 예상된다. (착각이었다. 3.5km 지점인 국수등을 지나며 코재까지도 된비알의 연속이었다.)  

  대피소에서 비를 피하며, 남들 고기 구워 먹는 모습이 너무 부러워 하산하면 꼭 사먹으리라 다짐하던 일, 동냥 소주에 알쌀한 기분에 젖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렇게 2시간 넘게 기다리다 우비를 사 입고 노고단으로 향한다. 대피소에서 우의를 파는 줄 미리 알았으면 빗 속을 뚫고 일찌감치 길을 나섰을 게다.   오랜 쉼에 오르막이 힘에 겹다. 눈에 익은 노고단 통제소 앞에 선다. 출입허가증까지 출력해 가져왔건만 금줄은 개방되어 있다. 숙제 다 해왔는데 그날 따라 선생님이 검사를 안 해 주는 기분이다. 오늘은 되는 일이 없네….
 
  널찍한 데크를 따라 오른다. 오랜 로망은 별 감흥 없이 현실이 된다. 다행히 비는 거의 그쳤다. 연무가 자욱하다. 풍경은 기대할 게 없다. 그나마, 노랗고 분홍빛 들꽃이 비가 그치고 나니 색이 더 곱다. 노고단 정상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잘 나올 것 같지 않다. 대신 까마귀란 놈이 비석의 주인인 냥 돌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근사하다. 지리산의 이름난 풍광에 빛나는 노고단이건만 오늘은 예외다. 세우(細雨)가 모든 걸 앗아가 버렸다. 이 역시 하늘이 하시는 일이라 군말 없이 돌아선다. 이후 물이 몹시 불어 위험한 피아골 계곡을 건너서 하산했다. 택시로 구례로 이동하여 다이소에서 슬리퍼 사 신고, 고기 대신 순대국에도 기분 좋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의 첫 노고단에서의 추억은 이렇듯 고난과 그 속에서의 소소한 행복으로 기억된다.

< 노고단 가는 길에 >

  올해도 장마가 길게 이어진다. 그만 왔으면 좋겠는데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다행히 주 후반이 되니 비는 잦아든다. 이번엔 날이 맑아 멋진 해돋이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사당행 버스에 오른다. 

< 노고단에서 >
 

성삼재 3시, 가늘게 비가 내린다. 지나가겠지 바라며 걷는데 더 굵어진다. 무넹기를 지나고 급기야 노고단대피소에서 비를 피한다. 우비를 구매한다. 머리에 스치는 단어 하나, 데자뷰. 
 
  대피소 문옆에 쭈그리고 앉아 문득 드는 생각, 다행이다. 온몸이 다 젖지 않아서, 대피소가 있어 잠시 비를 피하고 몸을 말릴 수 있어서, 예전과 다르게 조바심 견딜 수 있어서, 그리고 2시간의 기다림은 있어도 비가 그쳐 노고단에 갈 수 있어서. 이게 바로 기다림의 미학인가 보다. 핸드폰과 워치를 다시 운동모드로 바꾼다. 전화위복을 노려본다. 어쩌면 노고단 운해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노고단과 주능선의 갈림까지 오르막을 올라 통제소에서 고마운 일행들이 미리 예약해 둔 바코드를 찍고 몽환적인 노고단길에 발을 들여놓는다. 원추리, 동자꽃, 달맞이꽃, 나리꽃이 지천이다. 바람에 누운 풀들이 가는 비에도 흔들린다. 근사하다. 내리는 비인지 바람이 실어나르는 비인지 빗줄기가 제법 굵어진다. 노고단과 비와 나
는 운명인가 보다. 삼각대를 세워 내 모습을 찍고 높다랗게 솟은 돌탑도 담는다.  평소 같으면 어둠이 빛에 물들어 가는 시간, 지리산의 봉우리들은 시간과 더불어 흔들리면서 흘러가고 있었을 게다. 아쉽다. 아산 카페에 올라온 사진 만큼 멋지진 않지만 흐린 날의 일출도 기대했다. 게다가 비를 맞을지는 생각도 못했다.  더 머무르며 운무를 기다리려 했으나, 비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내려 오는 길에 돌아보는 노고단은 온통 연무와 비에 젖어있다. 
  
  또 노고단대피소에서 걸음을 멈춘다.

< 화엄사 하산 길에 >

  다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일행 중 일부는 성삼재로 택시 타러 가고, 나머지는 화엄사로 향한다. 굳이 오늘 산행에서 새로운 것이 있다면, 무넹기에서 화엄사까지는 내려간다는 것이다. 오를 때보다 쉬울 거라는 기대도 있다.  코재까지는 말 할 것도 없고, 1.5km 지점인 집선대까지도 험했고, 국수등을 지나 이후로도 연기암 전까지는 울퉁불퉁 돌길이 길게 이어졌다. 샌들을 신고 온 분도 있는데 돌길에 걱정이 되었다. 
  
  조릿대가 우거진 작은 숲을 지나며 길은 순해진다. 우렁찬 폭포수 소리를 들으며 무념무상으로 걸어 내려온다.  하산 길에서, 특이한 건 조릿대가 군락을 이루는 곳에서는 잠시 흙길이 나타난다는 것과, 화엄사 계곡에도 크고 작은 멋진 폭포가 많다는 사실이다. 돌길을 걷다 잠시 걷는 흙길은 꿀 같은 기쁨이다. 발 밑 감촉이 너무 편하다. 잠깐의 호사에서 힘을 얻는다. 휴식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건 내가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는 것의 증거이다. 산에서나 일상에서나 이는 같은 진리이다.
 
  연기암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산사는 지난 봄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오늘 풍광이 더 푸르다. 연기암의 아침은 세우와 함께하고 있었다. 목 좋고 운치 있어 보이는 찻집은 오늘도 들르지 못했다.  
 
  화엄사 경내에 들어선다. 지난 해 봄 홍매화 보러 왔을 때도 화엄사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제 노고단, 화엄사이란 말에는 비가 묻어나겠다. 비 오는 산사는 색다른 운치가 있었다. 나무와 꽃과 절집 각각의 색이 살아나는 느낌이다. 석탑 앞 박석과 흙에 물길이 만들어진다. 물에 어르거리는 사찰의 모습도 근사하다. 
 
  풍성한 배롱나무의 분홍꽃이 특히 도드라진다. 오늘 본 최고의 풍경은 바로 비오는 각황전 주변 풍경이다.

< 에필로그 >

  비가 거세져 일행을 찾다가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내려와 눈에 들어오는 첫 음식점에서 길었던 노고단~화엄사 여행을 멈춘다. 비빔밥을 앞에 두고 사진을 본다. 여느때보다 양과 질이 빈약하다. 이 역시 비의 영향이다. 그래도 풍경의 표정들은 사진에 남아 있었다. 
 
  비록 빗속을 걷고 대피소에서 오래 기다렸지만 그리 나쁘지 않았다. 산에서 다시 일상으로부터 풀려나 자유로웠고, 몸으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자족했다. 이 자유로움에 의지해서 다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게다.  
 
  산과 길에 대해 생각해 본다. 빗속에서도 산길의 주인은 나였다. 신경준 선생은 '도로고(道路考)' 라는 글에서 "무릇 사람에게는 그침이 있고 행함이 있다. 그침은 집에서 이루어지고, 행함은 길에서 이루어진다. 집과 길은 중요함이 같다. 길에는 주인이 없고 그 길을 걷는 사람이 주인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여행은 집을 나서 길을 걷다 집으로 돌아오는 행위이기에, 집과 길은 삶의 중요한 연결점이라는 걸 말하고 있다. 오늘은 밤새워 노고단과 화엄사와 그 주변을 걸었고, 내 길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그침으로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이다.
 
  거친 길 함께 한 모든 분들에게 수고하셨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산거북]

여유있게 즐기는 산행 모습이 멋집니다 ^^
화대종주길로 내려 왔네요.
올라갈 때 꽤 힘들었던 생각이 납니다 ^^

[느리게]

예전에 행진, 아이넷과 갈 때도 비 맞았는데, 징크스인가 봅니다.^^